산문

예쁜 예비신자들을 위하는 길

주혜1 2005. 10. 24. 16:25
 

예쁜 예비신자들을 위하는 길


오느라고 참 추웠었지/ 여행하기에, 이렇게 긴 여행을 하기엔

일년 중에서도 가장 나쁜 때였지/ 길은 깊고 날씨는 살을 에이고

한겨울이었지. 그리고/ 낙타들은 껍질이 벗겨지고, 발이 쓰리고, 옹고집 부리고

녹는 눈 속에 드러누웠었지/ 몇 번이나 우리는 그리워했었어.

비탈 위의 여름 궁전, 테라스,/ 과즙을 가져오는 비단옷 입은 아가씨들을……,


  T. S 엘리엇의 시 “동방박사들의 여행” 의 첫 부분이다. 늙은 동방박사가 그 옛날 여행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된 이 시는 그리스도 탄생을 맞이하기 위해 그 먼 길을 고생고생해서  찾아내고는 마침내 만족스러워 한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이 탄생인지 죽음인지 묻고는 탄생과 함께 죽음을 보았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마지막 행에서 거짓신들을 움켜쥐고 있는 낯선 곳(현실)에서는 마음이 편치 않아 마침내 기꺼이 죽고 싶다고 한다.

 예비신자들이 교리를 받을 때의 모습은 참으로 어여쁘다. 나이와 상관없이 하나 같이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얼굴까지 붉힌다. 하느님을 영접한다는 기대감에 젖은 진지한 태도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대할 때면 어느새 나도 거울 앞에 앉은 것처럼 맑아진다. 그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연도 나름대로 다르지만 대체로 마음의 평화를 원하나, 그에 못지않게 지켜야 할 계명을 따르기가 쉽지 않음을 호소해 온다. 또한 금세 어떤 반응이 오리라 기대하고 있는 이들도 상당수 있다.

 이 시에서 동방박사들은 현실을 거짓신들이 날뛰는 세상이라고 표현하며 해방되지 못한 현실의 삶에서 회의를 느끼고 있다. 길을 떠날 때는 계절적으로 나쁜 시기였다고 표현한 것은 영적 구원을 위한 여행이 쉽지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본 탄생은 현실의 모든 유혹들을 떠난 여행이었으나, 현실 속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만든 신 앞에서 거짓믿음으로 그를 실망시키고 있어, 마지막 행에서 “마음이 편치 않아 또다시 죽어야 할까 보다.” 라고  죽음을 체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시는 마무리진다. 각자의 우상을 숭배하는 진실한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신의 은총을 기다릴 수 없다는 뜻이다.

 동방박사들은 여행도중 갈보리 동산의 십자가며, 은전을 걸고 주사위 놀이하는 것 등 죽음을 암시하는 것들을 보며, 현실이 종교생활을 영위하기에는 그리 좋은 것이 아님을 알고 탄생이 죽음과 흡사함을 말하고 있다. 새로운 삶의 도래이지만 옛 질서의 종말을 의미한다.

 예비신자들이 새로운 삶을 살려면 현실(비탈 위의 여름 궁전, 비단옷 입은 여자들의 유혹 등)을 떠나 정신적 실체를 추구하는 길에 겪는 온갖 유혹과 회의들을 오로지 믿음 하나로 모두 떨쳐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무지개빛 현실을 기대하고 있는 그 예쁜 예비신자들에게 희망적인 답을 던지기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현실의 유혹은 믿음이 헛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회의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해답은 선배신자들의 태도에 있다. 모든 신자들이 모범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예비신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산 교리가 되는 것이다. “대충, 까짓것” 믿음은 한껏 부풀어있는 예쁜 예비신자들에게 실망만을 안겨줄 것이다. 선배신자들이 영적 생활을 방해하는 그 어떤 본도 보여주어선 안 되겠다. 너무 큰 짐을 안겨주지도 말아야겠지만, 무관심은 독약과 같으니 신앙의 동반자로서 그들에게 끊임없는 관심과 배려로써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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