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세계
연설에 있어서는 첫 문장이 언제나 가장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 내 뒤에―. 그러나 나는 시에 대해 말할 것이기 때문에 다음 문장도 어려울 것이고, 셋째, 여섯째, 아홉째, 마지막까지도 어려울 것이라고 느깁니다. 이 주제에 대해 난 아주 드물게 의견을 말했습니다, 거의 전혀. 그리고 이것을 언제나 잘하지 못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내 강연은 별로 길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불완전함도 조금씩 주면 견디기가 쉽습니다.
오늘날의 시인들은 회의적이고 의심 많고―어쩌면 그 무엇보다―자신에 대해서조차. 시인이라는 것을 대중에게 알리기를 꺼려합니다―그것을 조금 수줍어하는 것처럼. 그러나 우리의 시끄러운 시대에서는 효과적으로 나타나기만 한다면 단점을 인정하기가, 깊숙이 숨겨져 있고, 스스로도 끝까지 믿지 않는 장점보다 훨씬 쉽습니다. 여러 앙케이트에서나 대화에서 시인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꼭 말해야 할 때, "문학가"나 부업의 이름을 말합니다. 시인과 면접하고 있다는 소식은 공무원이나 버스 동승자에게 가벼운 못믿음과 불안함과 함께 받아들여집니다. 철학자도 비슷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통 자신의 전문분야를 어떤 과학적 학위를 가지고 장식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나은 상황에 있습니다. 철학 교수―이것은 훨씬 더 장엄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시 교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전문적이 대학공부, 규칙적으로 치르는 시험, 서지학과 참조표시로 풍부해진 이론 논쟁, 그리고 비로소 격식과 함께 받게 되는 학위증이 필요한 고용이란 뜻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훌륭한 시가 적힌 종이라 할지라도 충분치 못하다는 뜻입니다―시인이 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도장이 찍힌 종이쪽지가 꼭 필요합니다.
이런 믿음으로 소련 시의 영광인, 미래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브로츠키(Josif Brodski, 1987년도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를 국외 추방했다는 것을 회상합시다. 그는 시인일 수 있다는 행정적인 증명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생충"으로 인정됐습니다...... 몇 년 전에 그와 만난 기쁨과 긍지를 가졌습니다. 내게 알려진 시인들 중에 그 하나만이 자신에 대해 시인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했고, 내적인 저항 없이 이 단어를 발음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자유스럽게조차. 이것은 젊음 속에서 경험했던 잔인한 창피 때문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인류의 존엄성이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 않는 행복한 나라들에서는 시인들은 출판되고, 읽혀지고, 이해되기를 갈망하지만, 이미 매일매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구별되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든가, 아주 조금밖에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직 그렇게 옛날이 아닌 우리 세기의 첫 십 년에 시인들은 독창적인 의상이나 별난 행동으로 충격을 주기를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혼자 자신의 방에 있으면 자신으로부터 그 모든 망토와 야한 것들과 다른 시적인 액세서리들을 내던지고, 침묵 속에 서서, 아직 씌어지지 않은 종이쪽지 위에서 시인이 자기 자신을 기다리던 때가 왔었습니다. 사실 이것만이 간주되기 때문에.
특징적인 것으로. 유명한 학자와 예술가들에 대한 전기영화가 계속 많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야심적인 감독들의 과제는 가장 유명한 예술작품의 형성과정이나 결과적으로 과학적 발견으로 이끈 창조과정을 믿을 만하게 상영하는 것입니다. 몇몇 학자들의 작업을 어느 정도 성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 실험실, 여러 종류의 기구, 움직이는 기계장치들은 한동안 시청자들의 주의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조그만 변경과 함께 천번째나 하는 실험이 예상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은 순간이 아주 극적인 때가 많습니다. 영화는 화가에 대해 볼 만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다.―그림의 모든 구성 단계를 첫 붓질부터 붓의 마지막 터치까지 재창조할 수 있습니다. 작곡가들에 대한 영화들은 음악이 채웁니다―창조자 내부로부터 들리는 첫마디부터 악기별로 씌어진 작품의 원숙한 형태까지. 이 모든 것은 계속 천진스럽고, 보통 영감(靈感)이라 불리는 이 이상한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지만, 최소한 뭔가 보고 들을 것은 있습니다.
시인들과는 가장 나쁩니다. 그들의 작업은 절망적으로 촬영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책상 앞에 앉거나 소파에 누워서, 고정된 시선으로 벽이나 천장을 응시하며 이따금 일곱 시구를 쓰고는 십오 분 뒤에 그 중 하나를 지웠다가, 다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시간이 흘러갑니다...... 어떤 관객들이 이런 것을 보고 있겠어요?
나는 영감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만일 영감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현대의 시인들은 애매한 회답을 줍니다. 결코 선행의 내적인 충동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이유는 다른 것입니다.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확연하게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 역시 가끔 이것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멀리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대답합니다 : 영감은 전체적으로 예술가들이나 시인들만의 특권은 아닙니다. 있고, 있었고, 언제나 영감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깨달아서 스스로 일을 택하고 열렬히 좋아하고 상상과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 흔히 있는 그런 의사들, 흔히 있는 그런 선생들, 그런 정원사들, 그리고 수백 종의 다른 직업들. 만일 매번 그 속에서 새로운 도전을 찾아내는 것만 한다면 그들의 일은 끊임없는 모험일 겁니다. 어려움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은 식지 않을 겁니다. 그들한테는 모든 풀린 문제에서 새로운 물음의 무리가 날아오릅니다. 영감, 그게 무엇이든지, 쉴새없는 "나는 모르겠어"에서 태어납니다.
이런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이 지구 위의 많은 거주자들은 생활비를 획득하기 위해 일합니다, 그래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의 정열로 일을 고르는 것이 아니고 인생의 환경이 그들 대신 고릅니다. 싫어지는 일, 지긋지긋한 일, 이런 형태로도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만 높이 평가되는 일은, 인간의 가장 큰 불행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가까운 세기들이 여기로 행복한 변화를 가져올 것 같지 않습니다.
사실 내가 시인들로부터 영감에 대한 독점권을 빼앗아간다는 말을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영감을 받지 않은 운명이 고른 사람들에게 배치합니다.
하지만 여기선 청중한테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의 교수형 집행인, 독재자, 열광자, 몇 개의 크게 외쳐진 구호로 권력을 다투는 선동장치가, 역시 자신들의 일을 좋아하고 열광적인 아이디어와 함게 일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압니다". 압니다, 그리고 그것, 그들이 아는 것은 한번으로 충분합니다. 이것 이상 흥미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들의 논쟁의 힘을 약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서 새로운 질문들을 전개하지 않는 모든 지식은 살기에 알맞은 온도를 잃고 짧은 시간 안에 죽습니다. 가장 극적인 상황에서는 옛날과 지금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에 치명적으로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작은 단어를 그렇게 높이 칩니다 : "나는 모르겠어". 작지만 견고하게 날개가 돋쳐 있습니다. 우리의 근소한 지구가 매달려 있는 공간과, 우리 속에 포함되는 공간이 우리의 생을 넓혀 주는.
아이작 뉴튼이 "나는 모르겠어"라고 하지 않았으면 사과가 그의 눈앞에서 우박같이 쏟아져도, 최대한 그것들을 줍기 위해 몸을 굽히고 식욕과 함께 그것들을 먹었을 겁니다.
만약 동포 마리아 스쿠워도브스카 퀴리가 자기에게 "나는 모르겠어"라고 하지 않았으면, 아마 좋은 월급을 받고 좋은 집안 아가씨들을 위한 화학 선생으로 남아 있었을 겁니다―가치 있는 일―이 일로서 그녀의 인생이 지나갔을 겁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했고 이 단어들이 그녀를 두 번이나 평온하지 못한 영혼을 가진, 영원히 찾는 사람들에게 노벨상으로 보답하는 스톡홀롬으로 인도했습니다.
시인 역시, 진짜 시인이라면 계속 자신한테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해야 합니다. 모든 작품으로 이것에 대답을 시도하지만, 마침표만 찍으면 망설임이 그를 집어삼키고, 그것은 현세의 대답이며 절대로 충분치 못한 대답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계속 한번 더, 한번 더 시도하고, 그 다음에는 그의 불만족에 대한 징표를 문학사가들이 커다란 클립에 끼우고는 "연작"이라 이름지을 겁니다.
가끔 나는 나한테 있을 수 없는 상황들을 소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뻔뻔스러움 속에서 감명을 주는, 모든 인간의 행동에 대한 비탄의 저자인 에클레지아스타와의 대화. 그한테 아주 낮은 자세로 인사를 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는―최소한 나에게는―제일 중요한 시인들 중의 한 명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 다음엔 그의 손을 잡았을 겁니다. "태양 밑에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에클레지아스타 당신은 썼습니다. 하지만 당신 역시 태양 밑에 새로운 것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신이 쓴 한 편의 시는, 역시 태양 아래 새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 이전에 아무도 그것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당신의 독자들입니다. 왜냐하면 당신 이전에 살던 사람들은 그것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그 그늘에 앉아 있덨던 사이프러스 역시 세상의 시작부터 여기서 자라고 있지 않았습니다. 당신 것과 비슷하지만 완전히 똑같지 않은 다른 사이프러스가 그에게 시작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에클레지아스타 게다가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태양 아래 새로운 무엇을 지금 또 쓰려고 하는지. 당신의 생각을 채울 무엇인가, 아니면 그 중 몇 가지에 대해 부인하려는 유혹이 있나요? 전의 시에서 기쁨 역시 발견했나요―어느덧 지나가버린 것들로부터? 당신의 태양 아래 새로운 시는 그것에 대한 것이 될 건가요?
첫 스케치일 메모를 이미 했나요? 이렇게 말하지는 않겠죠 : "모든 것을 다 썼다, 더 보탤 것은 없다". 세상의 어느 시인도 이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당신처럼 위대한 시인은.
세상, 무엇이든지 거대함에 연유한 공포에 대해 생각하고, 그에 따른 자신의 무력감, 각자의 고통에 대한 세상의 무관심에 대해 쓰라림과 함께 생각할 때―사람들, 동물들, 아마 식물들의 것일지도, 왜냐하면 식물들은 고통에서 자유롭다는 확신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 무엇에 대해서든지 별들의 빛으로 꿰매지는 공간에 대해 생각할 때 별들, 그의 둘레에서 이미 어떤 행성들을 발견하기 시작한, 이미 죽은? 아직은 죽은?―알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 이 거대한 극장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입장권이 있지만, 두 개의 날짜로 한정된 유효 기일은 우스울 정도로 짧습니다 ; 무엇이든 아직 이 세계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세계는 놀랍습니다. 하지만 "놀라게 하는" 속에는 어떤 논리적인 덫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한테 알려지고 일방적으로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인정된 표준의 당연성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놀랍니다. 하지만 그런 당연한 세상은 없습니다. 우리의 놀라움은 현존하는 것이고 그 어떤 것과의 비유에서 나온 결과가 아닙니다.
동의합니다, 단어 하나하나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지 않는 일상적인 말에선, 모두 이런 표현을 씁니다 : "평범한 세상" "평범한 인생" "평범한 물건들의 계열"...... 하지만 단어 하나하나를 재는 시어(詩語)에서는 어느 것도 보통이고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어느 돌도, 그 위의 어느 구름도, 어느 낮도 그리고 어느 그 다음의 밤도,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의 어떤 누구의 존재도.
시인들은 언제나 할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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