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감상

[스크랩]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주혜1 2007. 12. 3. 10:38
 
       
    "秘 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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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가니니의 바이얼린 소나타 1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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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icolo Paganini파가니니
    (1782~1840) 19세기 이탈리아의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 악마의 바이오린스트라 불린다.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 제노바에서는 악마의 화신이라 불린 대음악가가 태어났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그 대가로 불세출의 연주력을 얻었다고 쑥덕거렸다. 그의 이름은 니콜로 파가니니였다. 사람의 능력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란한 기교와 뛰어난 음악성으로 듣는 이들을 기절초풍케 했다. 파가니니가 악마로 불린 데는 그의 괴이한 행동거지가 한 몫했다. 끊임없는 방랑벽과 각종 연예 사건은 물론이고 몇 년씩 사라져버리곤 하는 괴이한 행태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그는 외모도 독특했다. 깡마른 몸과 이글거리는 눈, 가는 목선에 죽은 사람 처럼 창백한 얼굴은 그를 다른 세계와 통하는 인물로 여기게 했다. 그런 그가 일단 연주에 들어가면 미모의 소녀들과 부인들은 단번에 뿅뿅 기절하곤 했다.
      누군가 파가니니의 가르침을 받아 뛰어난 음악가가 되면 그건 파가니니의 마법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파가니니가 결혼하면 그들은 악마부부였다. 로마 교회도 파가니니가 하느님을 부정하는 자라며 공격을 퍼부었다. 로마 교회는 그가 악마의 제자로서 이 땅에 태어나 인간의 솜씨라고는 믿기지 않는 연주로 대중들을 유혹해 큰 이익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파가니니는 선천적으로 특별한 신체 조건을 부여받았다. 물론 천재성의 원천은 엄청난 연습량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어깨뼈와 아래팔, 손목뼈까지 매우 부드러웠다. 그리고 손바닥의 관절과 각지골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웠다고 한다. 연주시 손바닥은 평소 상태의 2배까지 벌어졌다. 고막도 매우 민감해서 누군가 곁에서 큰 소리를 내면 상당한 통증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니 선천적으로도 바이올린의 악마로 행세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바이올린의 줄이 하나든 두 개든 청중의 입을 벌어지게 하는 데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심지어 내면의 진실과 음악인의 우의를 중시하던 슈만조차도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였다. " 저녁 때 나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들었다. 정말로 놀라웠다. 놀라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마치 먼 곳 어디에선가로부터 다가오는 음악 같기도 하고, 침대 위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하는 음악 같기도 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파가니니가 이탈리아 니차에서 죽었을 때 그의 유해는 성 레파라타 거리에 있는 별장 에서 방부처리된 후 입관되었다. 그런데 교회는 유해를 매장하는 데 필요한 수속을 고의로 늦추었다. 니차의 주교가 파가니니를 기독교의 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파가니니의 매장 수속은 1년 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리에주에서 발간되는 잡지 '역사와 문학'에 실린 카톨릭계의 기사는 당시 그에 대한 곱지않은 시선을 보여준다. " 파가니니는 지난해에 니차에서 죽었다. 그는 신앙에 냉담했고 도덕적 퇴폐의 화신으로도 악명 높던 사나이다. 부활절 때 그는 신앙심을 가진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무를 태만히 했다. 그래서 니차의 주교가 그의 매장을 거부한 것이다." 파가니니의 친지들은 이러한 처사에 불복했다. 그리고 제노바의 추기경에게 사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추기경 역시 니차의 주교가 취한 조치에 찬성했다. 그리하여 파가니니의 유해는 관 속에 넣은채로 몇 달 동안이나 니차의 별장에 방치 되었다. 파가니니의 유해가 관대에 올려져 있는 동안 귀신 같은 연주자의 주검을 보려는 사람들이 별장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갈바노 주교에게 항의 라도 하듯 니차로 몰려들었다. 사체의 악취도 부근 일대에까지 풍기게 되었다. 그래서 니차의 주교는 파가니니의 유해를 지하실로 옮기도록 명했다. 결국 이 일을 못마땅하게 여긴 시의 위생 당국이 적절한 조치를 강구했다. 마침내 유해는 니차의 묘지에 매장되지 못한 채 빌라 프랑카 근처의 위생 병원에보관되었다. 그의 이름은 교회 기록부에서도 말소되었다.
        그런데 파가니니는 죽기 3년 전 그의 유언장에서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의 은총에 맡긴다고 썼다고 한다. 병세가 악화되어 고백 성사를 베풀 신부가 왔을 때도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고 교회에다 위안을 구하고 싶음을 고백했다. 그럼에도 니차의 주교는 파가니니를 사교도라고 격렬하게 탄핵했는데, 이는 파가니니가 악마이거나 악마의 사제라는 인식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파가니니의 시신은 파르마에 매장되어 있다. 1940년 고향 제노바로의 이장이 거론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성사 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애용했던 '캐논'이란 별칭이 붙어 있는 1742년산 바이올린 '과르넬리 델 제수'는 지금도 그의 고향인 제노바 시청에 보관되어 있다. 파가니니의 연주법은 그 흐름을 직접 잇는 유파가 없어 그 자신의 일대로 소멸하였다. 제자는 단 한 사람 시볼리를 가르쳤을 뿐이었으며, 시볼리에게도 연주법의 전모를 밝히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잘 사용한 기법은 플라졸레토, 왼손의 피치카토와 스코르다투라 등이며, 그밖에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극단적인 분리 사용 등 화려하고 곡예적인 주법을 창조했다. 자료참조 : (월간객석 1998년 9월호)
    출처 :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글쓴이 : 북극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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