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직하고픈 이야기

소설ㅡㅡ 알렉산드리아/ 이병주

주혜1 2012. 4. 17. 05:13

 

한국논단  2012년 5월호

 

역사∙권력∙인간...거대담론에 대한 치열한 성찰

5∙16을 모티브로 쓴 이병주의 첫 작품 '소설∙ 알렉산드리아'

 

 

  1961년 5월 16일 미명에 육군소장 박정희가 일단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넘어와 장면의 민주당 정부를 ‘접수’했다. 그렇게  시작된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에 대한민국은 산업화에 성공했다. 그것이 사실(史實)이고 사실(事實)이다. 그러나 통상 5∙16으로 불리는 그 날로 부터 반세기 넘는 세월이 경과한 지금까지 5∙16이 근대화 혁명인가, 불법 군사쿠데타인가에 대해 정치사회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일치된 성격규정을 갖지 못한 채이다.

 

 

 이를 감안하면서 5∙16 51주년을 앞두고 그 5∙16을 모티브로 창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소설 한권을 다시 펼쳐 읽는다. 1992년에 작고한 이병주가 44세 때인 1965년에 펴낸 ‘소설∙알렉산드리아‘이다. 우선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은, 제목의 특이함이다. 그냥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라 ’소설∙ 알렉산드리아‘인데 평론가 이형기의 작가론까지 포함해서 문고판(범우사 발행)으로 173쪽 분량임으로 중편소설인 셈이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이병주’ 혹은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검색하면 관련 글들이 적지 않게 나온다. 따라서 이 소설에 관련해서 새로 글을 쓴다 한들 그것은 췌사(贅辭)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새삼 이 소설을 ‘읽을 만한 책’으로 뽑은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역사∙ 권력∙인간 등 거대담론에 대해 작가가 소설에서 논설적 언어로 치열하게 펼쳐 보이는 성찰이야말로 오늘의 독자에게도 큰 울림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소설 알렉산드리아의 공간적 무대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이집트의 고도(古都) 알렉산드리아까지로 이어진다. 아울러 식민시대, 6·25 전쟁, 5·16 ‘혁명’ 등 한국인이 현대사의 전개과정에서 격어야 했던 온갖 수난, 그리고 스페인 내전 와중인 1937년 4월 26일에 자행된 나치의 게르니카 폭격 만행과 2차 세계대전 때의 유태인 학살 등 유럽의 여러 비극들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비교적 짧은 소설이지만 작가는 이처럼 방대한 공간적 무대와 시간적 배경을 장치삼아 얘기를 전개해 간다.

 

 

 소설은, 필화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당시 명칭)에 갇힌 형이 알렉산드리아의 호화로운 캬바레 ‘안트로메타’에서 플롯 연주자로 일하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가 기둥 줄거리인데 그 동생이 ‘나’라는 일인칭 화자(話者)로 얘기를 이끌어 간다. 여기에 게르니카 폭격으로 부모를 잃은 사라 안젤과 나치의 유대인 학살로 어머니∙ 동생을 잃은 한스 셀라 등 두 남녀가 함께 휘말리게 된 사건과, 그 과정에서 싹튼 사랑얘기가 곁들여 이어진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동생이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보낸 형의 편지를 꺼내 읽으면서 알렉산드리아에서 보낸 2년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실제로 현실에서도 작가 이병주는 5∙16직후 당시 주필로 있던 부산국제신보에 ‘조국이 없다. 산하가 있을 뿐이다’라는 논설을 실어 반공법 위반혐의로 10년 실형을 선고받고 2년 7개월 동안 복역했다. 따라서 소설 속의 형은 아마도 작가 이병주일 것으로 짐작 할 수 있다. 감옥에서 보내 온 형의 편지 첫 문장은 감방 풍경의 묘사다.

 

 

 ”영하 20도라고 한다. 감방은 영락없이 냉동고다. 천정만 덩실하게 높은 이 비좁은 감방에 세 사람이 웅크리고 앉았는데 그 입김이 유리창에 서려 하늘로 통하는 유일한 창구는 하얗게 두툼하게 얼어붙었다.“- 이렇게 시작되는 형의 첫 편지는, ”진짜의 나는 너와 더불어 알렉산드리아에 있고 여기에 이렇게 웅크리고 있는 나는 나의 그림자, 나의 분신에 불과하다는 환각을 키우려한다“면서 “웃지 마라. 고독한 황제는 환각 없이 살아 갈수가 없다”는 서글픈 고백으로 끝맺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그 형의 편지는 모두 아홉 편인데 거기에는 수형(受刑)생활을 감내해야 하는 한 지식인의 고독한 심상(心象)은 물론 그의 세상과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색이 도저한 문장으로 채워져 있어 그것만으로도 소설 분량의 상당량을 채운다.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작가 이병주의 체험적 옥중기로 읽을 수 있는 이유도 그 편지들 때문이다.

 

 

 화자인 동생이 알렉산드리아까지 오게 된 것은, 한국의 어느 항구 술집에서 우연히 그의 플롯 실력에 감탄한, 마르셀이라는 프랑스 국적 선원의 주선에 의해서였다. 신문사 주필이었던 형이 10년 형을 받고 수감된 이유는 현실에서 작가의 죄목이 그랬던 것처럼 ‘조국이 없다. 산하가 있을 뿐이다.’라는 논설 때문이었다.

 

 

 뛰어난 미모의 사라는 그의 고향 게르니카가 당한 만큼 언젠가는 독일의 어느 소도시를 폭격해서 보복할 수 있도록 비행기를 사겠다는 일념으로 안트로메타에서 춤을 추며 돈을 모은다. 독일 국적의 유태인 한스는 부모와 동생을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보내 죽게 한, 안드렛트라는 이름의 나치 게스타포를 찾아내 복수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까지 흘러온다.

 

 

 문학 평론가의 작가론까지 게재된 소설에 대해 새롭게 부연 설명하는 것은 아주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럼으로 여기서는  그동안 여러 번 정독해서 거의 외우다 시피 된 소설 속 묘사나 표현들을 이 글의 독자와 함께 음미해 보았으면 한다.

 

 

 어떤 실체나 현상은 사실적 언어보다 추상적 언어로 묘사될 때 그 이미지가 훨씬 더 선명할 수 있음을 소설 알렉산드리아는 확인시켜 준다. 우선 사라 안젤의 미모에 대한 작가의 표현이 그런 문장의 전형이다.

 

 

 “사라는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극한(極限), 남성의 정열이 어떠한 대상으로 쏟아져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는 하나의 전형(典型), 여체의 신비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는 교훈, 진정한 향락이란, 지금 죽어도 좋다는 일락과 유열이란 어떤 것인가를 느끼게 하는 요물(妖物)- 한 여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설명으로 이 추상문장 이상의 수사(修辭)를 나는 달리 알지 못한다.

 

 

 그런 사라가 한스와 공모해서 나치 게스타포 안드렛트를 캬바레 안트로메타에서 살해 혹은 과실치사한 혐의로 알렉산드리아의 법정에서 재판받는 과정이 소설의 후반부다. 두 사람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 나온 신문사설, 검찰의 논고, 변호인측의 변론이야 말로 언론인 출신 작가 이병주만의 문장으로서 빛을 발한다. 그런 냉철하고 준열한 언어들을 통해 재판은 개인의 범행에 대한 심판이라는 차원을 넘어 ‘병든 유럽문명’을 단죄하는 의미로까지 확대된다.

 

 

 먼저 소설 속 ‘알렉산드리아 데일리’ 신문의 사설 몇 구절을 문장 그대로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전략) 이 사건은 그 본질에 있어서 규명하자면 나치 독일의 죄악에까지 미쳐야 할 것이고 1937년에 일어난 게르니카 학살 사건을 다시 한 번 회상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피고 하나는 자기 일생을 희생시킬 각오로 원수를 갚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곤 10여 년 동안 원수를 찾으려고 전심전력을 다했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의 고전적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체념∙ 망각∙ 타협∙ 도피∙ 자기변명으로 지새는 세계 속에서 이처럼 깨어 있는 의식이란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공감할 수 있으나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자기희생이 병행되기 때문이다. 이건 도의가 짓밟히고 사랑이 기교화 되고 편리화 되고 수단화된 오늘날에 상당히 높게 평가해야 할 모럴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사람을 죽이거나 폭행을 해서는 안 된다는 모럴도 소중히 해야 할 처지에 있다. 이건 분명히 하나의 딜렘 마이다(중략)”- 그러한 인식으로 이어진 사설의 결론은 “법관의 명식(明識)과 현찰(賢察)이 어떻게 이 문제를 처리 할 것인지 기대해 볼만하다”로 끝맺는다.

 

 

 결심 공판의 날, 검사의 논고는 준엄하다. 15년이란 세월은 웬만한 대사건도 망각 속에 파묻혀 버리는 시간인데도 그 동안 줄곧 원한을 품어와 드디어 살해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피고인의흉포성, 잔인성, 집요성으로 저질러진 명명백백한 살인사건이라면서 극형에 처해져야 하지만 가족을 잃은 정상을 참작해서 징역 15년을 구형한다.공범 사라에게도 똑같은 논거를 들어 15년을 구형한다.

 

 

 검찰 논고에 대한 변호인 두 명의 변론 또한 냉철하고 논리정연하다. “(검사의 논고는) 15년 동안이나 어머니와 아우에게 사랑을 고스란히 지녀 왔다는 사실엔 착목하지 않고 그로 인한 원한을 잊지 못한 갸륵함이 높이 평가해야 할 미덕이란 점엔 눈을 가리고 그의 성품을 흉포하고 잔인하다고 지적하는 마음을 본 변호인은 섭섭하게 생각 합니다. 법률은 개인의 복수를 금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개인의 복수를 금하는 건 개인을 대신해서 법률이 이를 처리해 준다는 전제가 암암리에 승인돼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건의 경우 개인의 원한을 법률이 처리할 수 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요지의 A 변호인 변론에 이어 변호인 B 는, 사건 경위의 세심한 설명을 통해 정당방위에 의한 괴실치사 혹은 정당방위의 과잉에 의한 과실치사 정도임을 주장하고 두 피고에 대한 무죄선고를 재판부에 요구한다

 

 

 소설은, 사라와 한스의 ’범행‘에 대한 알렉산드리아 법원의 절묘한 결정에 이어 형의 편지로서 끝난다. 일렉산드리아 법원의 결정은, “한스 셀러와 사라 안젤이 1개월 안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퇴거 할 것을 조건으로 즉시 석방한다. 이 결정은 판결이 아님으로 판례로써 취급하지 않는다.”였다. 형이 보낸 편지의 끝마무리는 니체의 어록이다. “자기 힘에 부치는 무엇인가를 시도하다 파멸하는 인간, 나는 그를 사랑한다.”

 

 

 소설 알렉산드리아 발표 후 부터 작가 이병주는 폭포처럼 여러 작품들을 쏟아 내면서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고 했다. 그런 그가 첫 소설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야기 하고자 한 것은 철저한 자유주의 사상, 말하자면 일체의 권력이나 사상으로부터의 자유다. 그런 정신으로 그는 소설을 통해 스스로의 실존을 확인했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알렉산드리아 속 형의 편지 구절은 이에 대한 집약적 표현이다.

 

 

 “사상이란 무엇이냐? 정(正)과 부정(不正)을 가려내는 가치관이 아닌가. 선과 악을 판별하는 판단력이 아닌가. 그러나 자연의 작용에 정·부정이 있고 선과 악이 있는가. 사람은 자연의 일부가 아닌가. 자연의 일부인 사람은 자연 그대로 살면 될 것이 아닌가. 사상이란 자연 속에서 벗어져 나오려는 노력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상이란 인간을 부자연하게, 그러니까 불행하게 만드는 작용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아닌가.”

 

 

 나는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육군본부의 사병 막사에서 읽었다. 어느 날 침상 바닥에, 누군가 동료가 읽다가 놔둔 잡지 한권이 눈에 띠었다. ‘세대’ 라는 처음 보는 제호의 잡지였다. 거기에 전작으로 게재된 소설이 '소설 알렉산드리아'였다. 아마도 그 밤에 소설을 거의 단숨에 통독했던 것으로 아직도 기억된다.

 

 소설 알렉산드리아의 문장들은 23세의 젊은이에게 세상과 인생에 대한 새로운 개안(開眼)의 언어였다. 무엇보다 먼저 글의 본질적 기능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소설도 논설적 문장으로서 얘기의 뼈대를 삼을 수 있고 논설적 문장이 소설 내용의 핵심이 될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사라에 대한 묘사에서 보듯이 관념적 언어에 의한 추상적 표현이 상황과 현상과 대상에 대해 사실적 언어에 의한 구체적 묘사보다도 훨씬 더 읽는 이에게 명료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도 실감하게 됐다. 더 포괄적으로는 세상에 대한 이해가 다의적(多義的), 다각적일 수 있다는 걸 마음속 깊이 새겼다.

 

 

 소년 시절부터 꿈꾸어 왔던 신문기자가 반드시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도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읽고 나서 부터이다. 그 후 신문 기자 생활동안 소설 알렉산드리아는 나에게 글쓰기의 전범(典範)이나 다름없었다. 역사와 시대에 대한 다의적 다각적 시각도 소설 알렉산드리아가 일깨워준 교훈 덕분이 아닐까 싶다. 5.16은 결과로서 혁명이라는 나의 개인적 인식 역시 거기서 연유한다.

조 규 석 /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