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나가시마 열도 시/정호정

주혜1 2013. 10. 10. 10:06

 

아픈 발

 

 

밟아도 좋다*

밟아도 좋다

밟히기 위해 세상에 왔다

 

하지만

성화를 밟고 온 날은

밤새 천둥 번개 치는

마음 밭이었습니다

가시덤불 속을 헤매며

가슴을 칩니다

 

괜찮다

괜찮다

음성 들리는 듯도 하지만

 

너덜너덜 해지고

가시에 찔린 이 발

 

내일도 모레도

아픈 발**이 되겠습니다.

 

 

 

* 밟아도 좋다 ; 엔도슈사쿠의『沈黙』에서

**: 아픈 발 ; 엔도슈사쿠의 노트에「후미에를 밟는다 발도 아프다(踏繪を踏む 足も痛い)」

 

 

 

드 로* 신부님의 우물

 

 

 

당신의 우물은 뚜껑 덮여있지만

 

집집마다 수돗물 펑펑 쏟아져

 

 

뚜껑 덮여있지만

 

철벙 두레박이 물에 닿는 소리

 

돌 돌 도르래 돌아가는 소리

 

두레박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

 

물통에 물 쏟아 붓는 소리

 

삐걱삐걱 물지게 메는 소리 들립니다

 

 

많은 열매 땅에 펼쳐놓은 레몬나무와

 

수선화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있는

 

무청이며 파 마늘도 파랗게 솟아나는

 

굽은 길을 더듬어 내려가면

 

 

도르래에 걸린 두레박을 건네십니다.

 

 

 

 

 

* 마르꼬 마리 드로(1840-1914) ; 프랑스 황족출신의 천주교신부.

일본 소토메 시쓰교회에 부임해 생을 마칠 때까지

인류애로 사람들의 영혼과 육신을 구제하기에 일생을 바쳤음.

 

 

동백꽃어머니

 

 

 

하, 고운 장미꽃은

 

당신께 바치는 꽃

 

 

수백 년 전

 

서양의 장미꽃을 모르는

 

나가사키 사람들에게 장미꽃은

 

고목에서부터 어린 나무들이

 

수시로 피워내는 동백꽃이다

 

 

고운 동백꽃으로

 

성전 창유리에 유리화를 새기고

 

쟁반이며 접시

 

작은 성물에도 동백꽃 동백꽃

 

 

오늘도

 

화환이며 꽃다발을 만드는

 

 

하, 고운 동백꽃은

 

당신께 바치는 꽃.

 

 

 

신앙의선구자 현창비 2011 4 5 (다시올문학 2012 여름호 게재)

 

 

아버지 시모무라 젠시치는 세모진 나무토막들 위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칼날 같은 나무모에 정강이가 토막 나는 것 같은데 무릎 위에 돌을 올려놓습니다 돌은 한 발도 넘는 네모진 돌기둥입니다 팔로 껴안을 만큼 높이 쌓습니다 이를 앙다물고 참아보지만 이빨 사이로 비명이 저절로 터져 나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끝내 마카오로 빼돌린 아들의 행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오동나무교회桐敎會 뜰에서 보면

에멜랄드빛 바다입니다

 

소토메外海 지방

석양의 언덕에 엎드린 침묵의 비」,

거기에 새겨진 엔도슈사쿠遠藤周作 의 말

 

‘인간이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도 푸릅니다’

 

 

 

마루오丸尾 삼팔선

 

 

우리나라의 삼팔선이

철통같아서

 

일본 고토열도의 상고토上五島

 

거기

수세기에도 무너지지 않는

이쪽과 저쪽의 경계

 

성당마을과 불교마을의

고즈넉한 길을 삼팔선이라 이르네

 

마루오 마을의 마루오 삼팔선

 

한 세기도 되지 않은

 

우리나라의 삼팔선이

철통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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