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예수는 방화범인가!/ 조광호신부

주혜1 2025. 8. 17. 08:33

예수는 방화범인가
ㅡ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예수의 '불': 파괴가 아닌 변혁의 상징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루가복음 12:49). 예수의 이 발언은 2천 년 동안 수많은 해석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평화의 왕으로 불리는 예수가 불을 지르겠다고? 이는 모순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예수는 정말 방화범인가?

먼저 우리는 예수의 언어 사용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예수는 직접적인 명제보다는 비유와 은유를 즐겨 사용했다. '불'이라는 단어 역시 문자 그대로의 물리적 불이 아니라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불은 하느님의 임재와 정화를 상징했다. 모세가 본 떨기나무의 불, 엘리야가 부른 하늘의 불, 이사야가 경험한 제단의 숯불 모두 거룩함과 변화의 상징이었다. 예수가 말한 '불'은 이러한 전통 위에 서 있다.

예수가 지르려는 불은 기존 질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종교적 형식주의와 사회적 불평등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율법학자들은 복잡한 규율로 민중을 억압했고, 성전 종교는 특권층의 이익에 봉사했다.

예수는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불'로 태워버리려 했다. 그는 안식일 논쟁을 통해 형식적 종교를 비판했고,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부패한 종교 권력에 맞섰다. 세리와 창녀들과의 교제는 사회적 경계를 무너뜨렸다.

동시에 이 '불'은 개인 내면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는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사랑의 불씨를 다시 타오르게 하려 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언급한 '거듭남'이나,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한 '생수'와 같은 맥락이다.

이는 파괴적 변화가 아니라 창조적 변화다. 미움을 사랑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내적 혁명이다.

진실의 대가: 분열을 감수하는 용기

흥미롭게도 예수는 자신의 사명이 분열을 가져올 것임을 예견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태복음 10:34). 이는 변화의 불가피한 결과다.

진정한 변화는 항상 기존 질서와 충돌하며, 그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이 말씀의 현실적 무게를 나는 최근 몸소 체험했다.

지난 12월 3일 비상게엄 발표 후 즉시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수차례 SNS 에 올렸다.
30넌동안 담임신부를 했던 가톨릭 어느 단체 카톡방에 분열이 일어났다
나는 정치적 편가르기를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사제로서 그리고 민주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진실과 정의에 대한 양심의 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카톡방에는 불이 붙었다. 마침내 그 공동체 카톡방은 둘로 쪼개졌다.

나는 분열과 불화를 촉발한 범인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해 예수의 '불'이 가진 양면성을 더욱 선명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진리를 말하는 것, 정의를 외치는 것이 때로는 공동체에 균열을 가져온다. 하지만 그 균열은 평화를 해치는 독이 아니라  참평화를 위한 쓴 약이다

때로는 거짓된 평화보다 진실한 갈등이 더 건강할 수 있다. 부패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침묵보다는, 정의를 위한 목소리가 더 가치 있을 수 있다. 예수가 성전에서 상을 뒤엎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순간 성전의 평화는 깨졌지만, 그러나 더 큰 진리가 뭄터나기 시작햇다

이 의분이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재생이었다.
낡은 것을 태워 새로운 것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것이었다.

카톡방의 분열이 고통스럽긴 했지만, 그것을 통해 진정한 신념을 가진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구분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필요한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거짓된 일치보다는 진실한 분리가, 위선적 화합보다는 정직한 대립이 더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불이 때로는 생태계 재생에 필요하듯, 예수의 불과 양심의 불은 인간 사회와 개인의 영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정화의 불이다.

광신과 지혜 사이: 균형 잡힌 변혁의 길

그러나 예수의 불을 논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이 불은 생각 없이 열정만 넘치는 광신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상 종교적 광신주의가 저지른 폐해들을 볼 때, 이는 매우 중요한 구분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그는 항상 지혜와 사랑을 강조했다.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이 대표적이다. 이는 열정 없는 냉담함도, 지혜 없는 맹목적 열정도 경계하는 것이다.

진정한 예수의 불은 성찰과 분별력을 동반한다. 그것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추구하고, 겸손 속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균형 잡힌 열정이다. 광신주의가 타인을 정죄하고 배제한다면, 예수의 불은 포용하고 치유한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종교적 형식주의, 사회적 불의, 개인의 영적 침체라는 문제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예수의 불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근본적 문제 제기다.

하지만 이 불은 증오나 파괴의 불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의 불이다. 이는 타인을 해치거나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변혁의 에너지다.

예수는 방화범이 아니다. 그는 변혁가였다. 그가 지르려 한 불은 어둠을 밝히는 빛의 불, 추위를 녹이는 사랑의 불, 정의를 실현하는 열정의 불이었다.

SNS에서 양심의 소리에 따라 진실을 말했을 때 그 결과로 생긴 분열이 고통스럽더라도, 거짓된 평화보다는 진실한 갈등을 택할 수밖에 없다.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 불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억압받는 자들에게는 해방의 불로, 절망하는 자들에게는 희망의 불로, 사랑을 잃은 자들에게는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의 불로, 그리고 진실을 외쳐야 하는 이들에게는 양심의 불로 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 불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이다. 두려워하며 피할 것인가, 아니면 용기를 내어 자신도 변화의 촉매가 될 것인가. 설령 그것이 분열과 갈등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진리를 위해 일어설 것인가.

그 선택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 선택의 대가로 우리는 '방화범'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는 결국 누가 진정한 방화범이었고, 누가 진정한 변혁가였는지를 판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