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네스테레,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끝,
850킬로미터를 걸어 다다른 길의 끝입니다.
바다의 소리를 듣고 있다가, 문득 당신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오랜만이네요, 당신의 이름을 불러보는 일.
서울에서의 당신의 삶, 흔들림 없는 일상인지요?
이제는 나를 잊고, 다른 이와 웃고 있겠지요.
주말이면 다른 누군가와 산을 오르고, 옛길을 찾아 걷고 있나요?
당신 곁에서 웃는 사람의 마음, 따뜻한가요?
당신에게 그 웃음, 위안이기를 바래봅니다.
나는 잘 지내요.
당신이 내 안부를 물어온다면 이렇게 대답하렵니다.
긴 여행을 나선 후,
당신과 헤어지고 난 이후,
가끔씩,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당신을 불러내 견디기 힘들어지는 날이 찾아오고는 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대할 때면 늘 당신의 부재가 새삼스러워지곤 했지요.
어쩌면 아주 오래 당신의 이름을 품고 있어야 하나보다 체념하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당신을 둘러싼 그 모든 기억들이 조금씩 희미해져 갔습니다.
아픔과 상처도, 웃고 기뻐했던 순간들도, 조금씩 멀어지면서
당신에 대한 모든 추억이 흐릿해져가는 걸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아닌, 누군가가,
당신이 떠난 자리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아야 했습니다.
사랑이 남긴 상처는 사랑만이 치유한다는 진부한 진리를 다시금 제가 겪어내야 했지요.
제가 긴 여행을 떠나던 날, 당신이 주셨던 한 장의 편지.
오래도록 저를 울렸던, 여행 지갑 속에서 낡아가던 편지.
이곳에서 그 편지를 태웁니다.
먼 길을 걸어온 순례자들이 낡은 신발을 태우는 이곳에서
저는 낡은 사랑을 태우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안녕을 고하지만 당신이 남긴 어떤 기억들은 제 남은 삶을 함께 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주셨던 그 모든 행복과 슬픔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당신이 제 삶의 한 자리를 빛나게 해주셨다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저 역시 한때나마 당신의 삶을 빛내던 존재였기를,
당신에게 아픔보다는 기쁨을 더 많이 주었기를 바래봅니다.
올 가을 다시 서울을 찾게 되면,
당신과 함께 걸었던 그 모든 골목들이,
당신과 함께 더운 밥과 뜨거운 차를 나누었던 그 모든 찻집과 밥집들이,
당신과 함께 오르던 북한산 길이 더 이상 아무렇지도 않아지겠지요.
그 아무렇지 않음이 제게는 또 기쁨인 동시에 서러움이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일상, 평안하기를 기원합니다.
2005년 8월 4일 스페인, 피네스테레에서,
당신과 내가 좋아했던 시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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