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스크랩] 청화큰스님 법문 모음 1

주혜1 2008. 7. 30. 10:36

청화큰스님 법문 모음 1

 

부처님 오신 날

 

천상과 천하 온 누리에서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날은 부처님 오신날 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셨기에 인간은 비로소 억겹으로 쌓인 무명(無明)과 번뇌를 벗어나서 참다운 인간이 되는 길을 알았으며, 생로병사를 비롯한 모든 인생고를 여의고 진정한 자유와, 평화롭고 안온한 영생의 고향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본래 나와 남이 없고 천지와 더불어 하나의 생명인 부처님이 되는 길이니, 서로 다투고 겨룰 상대가 없고, 탐욕과 분노가 일어날 까닭이 없으니, 이르는 곳마다 훈훈한 봄바람 부는 평화로운 행복의 낙토(樂土)아닌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아집(我執)과 편견의 사슬에 얽매인 현대인들은 탐착(貪着)과 반목과 싸움의 불구덩이 속에서 다만 찰나의 휴식도, 한 생각의 진정한 행복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온 누리의 스승이시며 고해 중생의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어버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은 2,500여년 전에 일체중생을 구제할 큰 서원을 세우고 갖은 난행고행 끝에 마침내 인도 마가타국 보리수 아래서 위 없는 깨달음을 얻어, 바로 천지(天地)의 스승이요 진리 자체인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그때, 부처님이 되셨을 때 첫 말씀이

"참으로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일체중생과 산하대지가 한결같이 모든 지혜 공덕을 원만히 갖춘 부처님 아님이 없도다" 라고 찬탄하셧습니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우리 중생이 집착과 편견을 여의고 인생과 우주의 실상을 바로 보는 정견(正見)만 얻을 수 있다면 이생과 우주만유는 그대로 부사의한 일체 공덕을 갖춘 일미평등(一味平等)한 법신(法身)부처님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미 깨달은 화신(化身)부처님이요, 우리 중생들은 장차 깨달을 화신부처님입니다.

이렇듯, 부처님에게는 영원히 변치않는 불변(不變)하는 법신과 인연따라 일체만유로 전변(轉變)하는 화신의 양면을 갖추고 있어서, 천상과 천하 온 누리는 오직 부처님뿐이며,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탄생하실 때 사자후(獅子吼)로 외치신 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부처님이 되는 행복한 생명의 길을 저버리고 물량(物量)의 노예가 된 중생들의 가슴은 나날이 멍들어 가고, 가정과 학원과 사회는 서로 불신하고 반목하여, 사나운 아귀다툼과 처참한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참극은 바야흐로 인류파멸의 위기에 절박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가파른 고난과 끝없는 시련은 흡사, 굴러내린 무거운 돌을 간신히 언덕 위에 올려놓으면이내 다시 굴러내리고 안간힘을 써서 올려 놓으면 이내 다시 굴러 내리곤 하는 '시쉬포스(Sisyphus)의 영원한 형벌' 과도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등지는 한, 중생계의 처참한 참극은 그 파멸의 날까지 벗어날 기약이 없는 인과(因果)의 형벌인 것입니다.

이러한 고질적 병폐는 공산주의와 같이 인간의 고귀한 자유와 존엄성을 유린하고 온 세계를 살벌한 수라장으로 만드는 사나운 무리들이 구제 할 수는 없으며, 그렇다고 이성적인 도덕적 자제도 없이 관능의 자유와 해방을 부르짖는 물질문명의 병자들에게 우리들의 운명을 맡길 수도 없습니다.

또한, 인생과 우주의 실상도 모르고 다만 외곬으로 자기네 종교만이 절대유일의 진리이고 다른 가르침은 모조리 사마외도(邪魔外道)라고 훼방하여 갖은 술수로 온 인류를 옹졸한 자기네 울안으로 몰아세우는 그네들 편에 끼어, 가뜩이나 시달린 인생을 더욱 옹색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 곧 부처님이 되는 길, 오직 그 한길만이 인간성의 본질과 우주의 실상을 깨닫는 길이요, 영원히 자유롭고 평화로운 끝없는 지평선으로 통하는 대도(大道)이며, 우리 인류가 무궁한 번영을 누리는 탄탄하고 번뇌에 물들지 않는 청정백도(淸淨白道) 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비장한 결단으로 이 대도에 들어설 때, 비로소 너와 나, 우주만유와 내가 본래 하나의 생명이라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진정한 사랑이 우러나오는 것이며, 그리고 이러한 가장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인생관과 그에 따른 순수한 도덕적 행위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평온한 가정과 예지에 빛나는 학원과 정의롭고 평화로운 복지사회의 이상향을 이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법화경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에 보면, 과거 무량겁이전 위음왕(威音王) 부처님이 계셨을 당시, 교만하고 사나운 무리들이 마치 현대와 같이 들끓고 있을 때 상불경보살이란 비구스님이 있었는데, 이 스님은 어느 누구를 보든 가리지 않고 만날적마다 절을 하고는 "내가 당신을 공경하고 감히 가벼이 여기지 않노니, 당신은 마땅히 보살도를 실천하여 반드시 부처님이 되리라"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은 경전도 읽지 않고 오로지 사람들을 예배만을 하였으며, 사람들이 멀리 있을 적에는 일부러 달려가서 먼저와 같이 예배 찬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도리어 성을 내어 "이 무식한 중이 터무니없이 날더러 부처가 되리라고 허망한 예언을 하나, 나는 그 따위 황당한 군소리를 곧이 듣지 않는다" 고 쏘아대곤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해를 거듭하여 갖은 조롱과 훼방을 받았으나, 그 스님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여전히 사람들을 예배 찬탄 하였으며, 장난이 지나쳐 막대기나 돌멩이로 때릴 적에는 피해 도망가면서도 더욱 큰소리로 이전과 같이 예배하고 찬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이 임종할 때에는 허공 중에서 위음왕 부처님의 위없는 설법을 듣고 진리를 확연히 깨달아서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감로수같은 은혜로운 설법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전에 짓궂게 비아냥거리던 무리들도 모두 다 상불경보살을 혼연히 예배 공경하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귀중한 설화가 있습니다.

오늘날, 치우치게 발달한 물질문명에 메마르고, 어줍잖은 지식의 축적과 편견으로 교만해진 현대인들에게는 가장 슬기롭고 너무나 인간적인 상불경보살의 거룩한 행지(行持)는 파멸의 기로에 서성대는 인류가 살아 남기 위한 최선의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아! 부처님이 오신 날, 만중생이 저마다 진리로 태어난 지혜의 날,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고도 호리 회한이 없는 대자대비로 태어난 사랑과 봉사의 날, 이날은 바로 인간의 진정한 존엄성을 찾은 천부적인 인권의 날이며, 모든 불행의 씨앗인 억겁으로 쌓인 번뇌를 모조리 해탈하는 자유의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슴마다에 자비와 지혜로 아롱진 등불을 켜들고, 온 누리의 구석구석을 찬란하게 비추며 환희용약하는 영원히 행복한 광명의 축제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오늘의 지혜

 

 

우리 인류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을 겪어 왔으나, 오늘날과 같이 위험하고 어지러운 시대는 일찌기 없었습니다.

그것은, 과학기술과 산업발전에 따른 놀랄만한 물질적 번영을 자랑하고는 있으나, 그 반면에 전통적 가치관의 상실에서 오는 윤리도덕의 퇴폐와 인간의 소외 풍조와 그리고 빈부 격차로 인한 계층간의 갈등과 자연파괴와 환경의 오염이며, 국가간의 분쟁 등이 세계 도처에서 요원(燎原)의 불과 같이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 사회는 남북분단으로 말미암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양대 이데올로기가 치열하게 각축하는 최첨단에 있기 때문에 가치관의 혼란은 한결 심각하여, 근래에 와서는 학원가를 중심한 사회 일각에서 반체제의 거센 물결이 소용돌이치고 있으니, 우리 모두 깊은 우려와 불안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역사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여 저마다 절규하는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비롯하여, 이들을 절충한 사회민주주의와, 네오 마르크스주의(Neo-Maxism), 유로 코뮤니즘(Euro Communism), 그리고 해방신학(解放神學) 등의 착잡한 이데올로기(Ideologie)들이 서로 견제하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 등은 그 모두가 일체만유의 근원은 오직 물질이며, 따라서 보다 많은 물질의 생산과 분배의 균등만 달성하면 인류의 이상향이 이루어 진다고 하는 유물주의자들의 독단적인 편견으로서, 그것은 그네들의 뒤바뀐 천박한 가치관에서 오는 환상일 뿐, 인간사회의 병폐는 보다 근원적인 인간스스로의 번뇌에 그 본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성과 우주만유의 본질은 단순한 물질이나 허무한 공(空)이 아니며, 일찌기 수많은 성현들이 소상히 밝히신 바 일체공덕을 원만히 갖춘 진여법성(眞如法性) 곧 불성(佛性 : 신성(神性) 또는 태극(太極)으로도 표현함)으로서 이를 인격적으로 신앙하면 부처님이요 하나님이니, 그러기에 일체만유는 생명의 광명인 불성으로 이루어진 장엄한 대만다라(大曼茶羅)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무지무명(無智無明)에 가리어 일여평등(一如平等)한 불성을 외면하고, 다만 전변무상(轉變無常)한 현상만을 실상(實相)으로 착각하고 이를 집착할 때, 너와 나의 한계가 생기고, 나의 소유라는 집요한 탐착(貪着)이 싹트는 것이며, 그래서 욕구불만에서 오는 분노가 치밀게 되는 것이니, 그리하여 온 누리는 탐, 진, 치(貪, 瞋, 痴)삼독(三毒)의 탁류가 넘실거리는 화택고해(火宅苦海)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래 청정한 불성을 오염하고 있는 어리석은 사견(邪見)을 여의고, 탐욕과 분노를 절제하는 도덕적 실천이 없이는 인간사외의 뿌리깊은 고질적 병폐를 치유할 길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나라 정권을 담당한 인사(人士)들은 모름지기 투철한 인도주의(人道主義)에 입각한 민족의 전통성을 계승한다는 확고한 사명의식을 견지하고 청렴결백한 구도자적 자세로써, 보편적인 진리의 조명 아래, 보다 폭넓게 국민의 기본인권을 확대하고 기업인들을 설득 독려하여, 산업소득의 균등한 분배를 비롯한 제반 복지정책의 확충을 위하여, 보다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만, 이미 의식화된 노동계층과 과격한 학생들의 볼맨 목소리와 물불 가리지 않는 무분별한 폭력을 막을수가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운동권의 과격 학생들도 그대들의 지식과 경험이 아직 절대적이 아닌 미숙한 학도임을 겸허하게 반성하고, 그대들이 정작이 땅에다 이북과 동일한 공산정권의 수립을 획책 한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는다면 착잡하기 이를데없는 현실정치는 미흡하더라도 기성의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민족의 피땀으로 이룩된 신성한 상아탑에 들어박혀, 소신껏 학문과 인격의 수련에 정진하여 민족의 장래를 걸머질 채비를 갖추는 것이, 그대들 스스로를 위해서나 사랑하는 부보형제를 위해서나, 다난(多難)한 우리 조국의 전정(前程)을 위하여 가장 현명하고 애국적인 행동임을 사뭇 뼈저리게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딴은, 막스주의의 이론체계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분석하고 척결하는데 이로(理路) 정연하여, 단순결백한 젊은이들에게는 그럴듯하게 느껴지기도 하겠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물변증법에 입각한 편견에 지나지 않음은, 그 구체적인 실험장인 공산사회의 숨막히는 통제현상과 인권유린에서 이를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현명한 지성(知性)들에게는 이미 낡아버린 탐탁잖은 교조주의에 불과한데, 우리의 소중한 젊은이들이 슬기로운 비판없이 막스주의의 혁명이론을 금과옥조로 신봉하여 학도의 본분을 어기며, 두번 다시없는 생명의 황금시절을 불사르는 만용은 결코 영웅적인 행동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대들의 부모를 비롯한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을 염원하는 대다수 국민들이 아예 용납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또한, 야당의 입장에서 정치하는 이들도 자고로 유능승강(柔能勝强)이라 하여, 유연한 행위가 도리어 거센 것을 이긴다고 하였으니, 애써 화안애어(和顔愛語), 곧 부드러운 표정과 은근한 말씨로 사심없이 정적(政敵)을 상대해야만 보다 효과적인 설득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은 인간 심리의 공통된 기미(機微)일 것이며, 비록 반체제의 과격한 목소리들이 자기편에 유리하게 여겨지는 경우일지라도 그네들을 두둔하여 영웅시하고 자극하는 언동은 사려깊은 지도자가 취할 바 대인(大人)의 행위는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욕속(欲速)이면 부달(不達)이라 하였으니 너무 성급하게 정권탈취를 서둘지 않더라도 의연한 자세로 진지하고 겸허하게 오직 이웃만을 위한 선구적인 역할을 다 한다면 인심과 천심(天心)이 감동하여 인과필연으로 보다 확실하게 숙원(宿願)하는 목적을 이룰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마경불국품(維摩經佛國品)에 이르기를 "만약 보살이 진정한 이상국토를 이룩하고자 하면 마땅히 자기 마음을 정화할지니, 마음이 정화됨에 따라 국토도 정화 되느니라" 하였듯이, 우리 인간은 남을 지도하고 사회를 정화하며 인류를 구제 한다고 자부하고 훤전(喧傳) 하기에 앞서, 자기 스스로를 보다 궁극적이며 보편적인 가치관으로 장엄하고, 인연에 따른 각기 처지에서 최선의 도덕적 생활을 영위 한다면, 요란한 사회는 저절로 잔잔한 평화의 복지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허심탄회하게, 참된 삶의 목적은 대체로 무엇이며, 짖궂은 인생고(苦)의 원인은 무엇이고, 그 인생고를 소멸하는 방법 또한 무엇인가를 성실하게 추구할 때, 유구한 인류역사를 통하여 인생을 가장 바르게 살며, 철두철미하게 이웃만을 위하여 생명의 존엄을 변증(辨證)한 수많은 철인들과 성현들의 가르침을 만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석존(釋尊)의 가르침은 가장 철저하게 인생과 우주의 실상을 확연히 밝혔으며, 이러한 최상의 진리가 1,600여 년 동안이나 우리 민족사회에 불멸의 등불이 되어 왔음은, 우리 나라 문화유산의 80%가 넘는 귀중한 불교문화재가 이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지도자들이나 지성들은 화려한 과학문명의 의상으로 치장한 서구사상에 도취한 나머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민족의 뿌리요 숭고한 한배의 얼이 담긴 불교문화를 송두리째 내던지고, 어줍잖은 서구문화의 기와조각을 줏어모아 오늘날의 혼란한 사회상을 스스로 불러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자유진영의 관능적(官能的) 유물주의나, 공산세계의 기계적 유물주의에서 발생한 인간사회의 누적된 병폐를 벗어나서, 민족과 인류가 살아남을 오직 하나의 길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가장 바르고 지혜있는 이들의 예지와 경책을 따르는 도리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분들의 가르침을 따라 인생의 실상을 바로 볼 때, 우주만유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동일한 생명체인 진여실상(眞如實相)이니, 너와 나의 대립이 사라져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사랑이 절로 우러나지 않을 수 없으며, 일체 물질현상은 한결같이 허망무상한 몽환포영(夢幻泡影)과 같은 연기(緣起)의 가상(假象)에 지나지 않으니, 분수없이 집착하여 탐람하고 분노할 까닭이 없습니다.

위에서 밝혀온 바, 인류사회를 위협하는 험악한 혼란과 분쟁은 그 모두가 신뢰하고 의지할 보편적인 가치관의 상실에서 오는 것이니, 인생과 우주만유의 가장 궁극적이고 보편적 생명인 불성(佛性)을 등불로 삼고, 불성의 원리인 진리를 등불로삼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들의 보금자리인 조국과 지구촌(地球村)을 뒤덮은 암울하고 험악한 전운(戰雲)은 말끔히 걷히고 평화로운 정토(淨土)의 청명(淸明)한 여명이 찬란하게 밝아올 것 입니다.

이러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반야(般若)지혜는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최상의 바른 지혜요, 내일의 행복을 기약하는 밝은 지혜며, 영원히 변치 않는 진여연기(眞如緣起)의 반야바라밀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부처님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인간을 비롯한 우주만유의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 그 인연에 따른 목적이 있고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최상의 성인이시며 사생(四生 : 태(胎), 란(卵), 습(濕), 화(化))의 어버이시고 삼계(三界: 욕계, 색계, 무색계)의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서원(誓願)과 목적은 크고 깊어서 이루 헤아릴수 없으나, 그것을 한 말로 요약하여 "일대사인연" 이라고 합니다.

정작,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인생의 고난을 벗어나서 해탈의 바다에 노닐게 하시기 위하여, 짐짓 고생바다인(苦海) 사바세계에 화신(化身)의 몸을 나투신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49년(45년 설도 있음)동안 설법하신 가르침, 곧 일대시교(一代時敎)는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신 이른바 8만 4천 법문인데, 이를 세가지 시기로 나누어 삼시교판(三時敎判)이라 합니다.

그 중에 제1시교(時敎)란, 이를 유교(有敎)라 하여 나(我)와 너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는 범부(凡夫)중생의 뒤바뀐 생각을 깨우치기 위하여, 우리 인간이란, 물질인 사대(四大: 地, 水, 火, 風)와 마음 작용인 사온(四蘊 : 受, 想, 行, 識)이 인연따라 잠시간 화합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필경 나와 너의 인간존재는 무상하고 허무하여 다만 사대와 오온(五蘊 : 色, 受, 相, 行, 識)등의 법만이 실재한다는 가르침으로서, 이는 근기 낮은 중생들을 일깨우는 소승교(小乘敎)라고도 합니다.

제2시교란, 이를 공교(空敎)라 하여 물질과 마음의 온갖 현상을 만드는 사대 오온의 법이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는 소승들의 소견에 대하여, 일체 만법이 모두 공(空)하다고 부정하는 제법공(諸法空)의 가르침으로서, 반야심경이나 금강경 등의 요지인 반야사상을 의미합니다.

제3시교란, 바로 중도교(中道敎)로서 제1시교와 같은 너와 나의 실재를 고집하는 편견과, 제2시교에서 말하는 바, 일체만법이 다만 허망무상 하다고 하는 공(空)의 한편만을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를 다시 부정하여, 인생과 우주의 참다운 실상은 유(有)의 개념과 공(空)의 개념을 초극한 중도의 묘한 이치 곧,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불성(佛性)경계를 말씀하신 가르침 입니다.

오랜 인류 역사를 통하여 가지가지의 고난과 갈등과 불안의 어두운 그림자는 다만 한시도 개일 날이 없었으나, 그것은 마치 물에 비친 달(月)이나 거울에 나타난 현상이 실상이 아님을 모르고 실재한 사실로 착각하는 것과 같은 무명(無明)과 번뇌의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무(有無)의 집착을 여의고 중도의 진여실상(眞如實相)을 깨달은 성자의 경계에는, 우리 인생의 모든 고난과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한계 상황마저도 한결같이 꿈과 거품같고 허깨비같고 그림자같이 허망하고 무상하여, 그 어떠한 현실적 시련도 마음을 얽매는 밧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일찌기 중국의 승조(僧肇: 383∼414) 대사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31세의 젊은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 그 마지막 게송(偈頌: 찬탄하는 노래)에서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몸은 원래 주인이 없고, 의식이 작용인 오온(五蘊) 또한 본래 비었(空)거니, 이제 퍼런 서슬 아래 목을 내미니, 봄 바람 베는 듯 무심하여라" 라고 초연한 자세로 애꿎은 죽음의 인연을 흔연히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범신론(汎神論)의 위대한 철인으로서 신(神)에 도취 하였다고 까지 일컬어지는 스피노자(Spinoza:1632∼1679)는 말하기를 "영원한 상념(想念)으로 현실을 관찰하라,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그때 그때 영원에 참여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우리들이 허망한 상대적 현실에 집착하는 편견을 떠나서 매양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바른 인생관으로 현실을 살아갈 때, 정치적 경제적으로 사뭇 술렁거리는 삶의 현장에서도 오히려 순간순간 영생의 삶을 창조해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실한 깨달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자기 마음과 우주만유가 본래 진선미(眞善美)를 원만히 갖춘 동일한 불성(佛性)임을 굳게 신인(信認)하고, 우주적 대아(大我)인 불성에 걸맞는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의 생활을 애써 지속할 때, 편견과 집착으로 굳어진 업장의 응어리는 무너지고, 인생과 우주의 본래 고장인 장엄한 연화장(蓮華藏)세계 곧 극락세계의 영원한 지평이 거침없이 열리게 되는 것 입니다.

그와 같이 영생불멸한 진여자성(眞如自性) 곧 부처님을 순간 찰나에도 여의지 않는 생활은 그것이 바로 순수한 참선 생활이요, 진정한 염불 생활이며, 거기에 우리 종교인의 숭고한 자랑과 솟음치는 환희와 초인적인 강인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의상조사 법성게의 끝 부분에 "중도실상의 도리를 사무쳐 깨달음이 영원히 변치 않는 부처님 경계로다." 라고 원만한 깨달음의 경지를 찬탄하였습니다.

그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고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지혜와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두루 갖춘 영원히 변치 않는 중도실상의 법성의 지혜 곧, 부처님의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나와 남이 다 함께 깨닫게 하는 "일대사인연" 이야말로 바로 우주 자체의 목적이요, 삼세 모든 부처님이 출현하신 인연이며, 우리 삶의 가장 순수하고 고귀한 구경(究竟) 목적 이기도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부처님의 마지막설법

 

부처님께서는 열반(涅槃:소승에게는 죽음을 의미하고, 대승에서는 번뇌의 속박을 벗어난 영생의 경계)에 들으시기 위하여, 구시나가라(Kusinagara)성 밖에 있는 발제하(跋提河:Ajitavati)의 맑은 시냇물이 속절없이 흐르는 강 언덕에 우거진 사라수나무 숲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난으로 하여금 사라쌍수나무 사이에 베개를 북쪽으로 향해서 자리를 잡도록 하시고, 머언 여행길에 피곤하신 몸을 오른쪽으로 두발을 포개고 누우셨습니다.

그때에 사라쌍수나무는 때아닌 하얀 꽃이 피고 꽃잎이 떨어져, 부처님의 몸 위에 눈갈이 쌓이고, 허공에서는 만다라화, 만수사화의 하늘나라 꽃들이 부처님의 몸에 비오듯이 내리며, 애틋하고 평온한 하늘 음악이 은은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이러한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아난은 부처님의 침상을 등지고 하염없이 흐느끼며 슬픈 상념에 잠겼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빨리 열반에 드신단 말인가, 나는 누구보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듣고 배우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는 아직도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몸이니, 부처님께서 열반하신다면 장차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것인가, 아아! 참으로 애달픈 일이로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아난아, 내 곁으로 오너라"고 부르시어 아난을 위로하셨습니다.

"아난아, 그렇게 한탄하고 슬퍼하지 말아라. 사람은 누구나 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지 않을 수 없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결같이 인연따라 이루어진 허깨비같이 허무한 가상(假相)에 지나지 않으니, 필경 허물어지고 만다고 일러주지 아니하였더냐.

아난아, 너는 나를 섬긴지 20여년 동안 지극한 정성으로 여래(如來:부처님)인 나를 보살펴준 공덕이 그지없으니, 부디 게을리 하지말고 공부에 진력하여라. 그러기만 하면 머지않아서 번뇌의 습기(習氣)를 없애고 반드시 해탈을 얻으리라."

아난은 가까스로 마음을 수습하여 바른편 무릎을 꿇고 왼편무릎을 세워 합장하여 여쭙기를,

"부처님께서 생존해 계실 때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아왔으나, 열반하신 뒤에는 누구를 스승으로 삼으오리까"

"아난과 여러 제자들은 잘 듣거라, 내가 열반에 든 뒤에는 이미 설법한 교법(敎法)과 계율을 스승으로 삼도록 하여라"

"부처님이시여, 저희들은 앞으로 공부하는 수행방법을 어떻게 하오리까"

"그대들은 다 함께 깊이 새겨들어라. 그대들이 의지 할 수행법은 주로 사념처관(四念處觀)을 닦도록 하여라.

그것은 첫째로 신념처(身念處)로서, 이 육신은 살과 뼈와 피와 고름 등 여러 더러운 것들이 인연 따라 잠시 모인 것이니, 부정(不淨)하다고 관찰하고,

둘째는 수념처(受念處)로서, 중생들이 낙(樂)이라고 여기고 집착하는 재물이나 음행이나 권속이나 권세 등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고, 필경 고통의 결과를 맺는 근원으로 관찰하고,

셋째는 심념처(心念處)로서, 인간의 마음은 잠시도 쉬지않고 항시 전변(轉變)하여 마지 않는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관찰하며,

넷째는 법념처(法念處)로서, 일체 모든 것은 허망하고 무상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實體)가 없고 자재(自在)로운 것도 아니니, 나(我)라고 할 것이 없는 무아(無我)이며, 나의 소유란 아예 없는 무소유(無所有)임을 관찰하도록 하여라"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저 난폭한 육군비구(六群比丘)들이 번번히 나쁜 짓을 저지르면, 그들을 어떻게 징계하고 대처 해야 하옵니까"

"그러한 사나운 무리들이 아무리 충고하여도 뉘우치지 않고 그 버릇을 고치지 않을 때에는, 그대들은 그네들과 절교하고 모든 일에 상대하지않으면 종단에는 뉘우칠 것이니, 이른바 침묵으로 다스리는 묵빈대치를하도록 하여라"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교법을 모아서 정리하여야 하겠사온데, 그 경전 첫머리와 끝말에 무슨 말로써 적으오리까"

"「이와 같이 내가 들었었다(如是我聞), 어느 때 부처님이 어느 곳에서 설법할 적에 모여든 대중들은 누구누구임」을 밝힐 것이며, 끝말에는 「여러 대중이 환회심으로 법문을 듣고, 믿고 받들어 수행할 것을 다짐하고 물러 갔느니라」고 적도록 하여라"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간곡하신 마지막 설법은, 인간과 천상등 모든 제자들의 흐느끼는 오열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는 이날 2월 15일, 숲 속의 보름달도 비창(悲愴)한 눈물에 어리고, 엄숙하고 처량하게 슬픈 침묵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차례대로 사선정(四禪定)을 거쳐 멸진정(滅盡定)에 드시어, 영영 대반열반(大般涅槃: 화신인 몸을 버리고 법신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것)에 들어가시고 말았습니다.

이때, 애끓는 슬픔을 참고 참았던 모든 제자들은 땅을 치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여 마지 않았습니다.

진여법성(眞如法性)의 바다, 해탈의 고향에서 화신(化身)을 나투신 석가모니 부처님! 그 님은 가셨습니다.

그러나, 가고 옴이 없고 생사가 없는 법신(法身)부처님은 어느 때 어느 곳에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살아있는 생명의 실상(實相)이며, 바로 우리 인간의 참다운 자아(自我)입니다.

이제, 사뭇 술렁거리는 위험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타일러 주신 사념처관(四念處觀)의 바른 인생관으로 우리들의 착잡한 현실을 통찰할 때, 역사적 사회에 전개되는 그 모든 것은 다 한결같이 무상하고 허무하여 나(我)라고 고집할 실체가 없고, 내 것(我所有)이라고 우겨댈 엉터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너와 나의 분별망상으로 꾸며낸 얼키고 설킨 주의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싹틀 터무니가 없으며, 야당과 여당의 적대하고 질시하는 반목과 자본가와 노동자의 살벌한 시비가 생겨날 겨를이 없을 것이며, 낡고 젊은 세대간의 생흔이 일어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진정한 자아인 부처를 성취하고 고해에 해매는 이웃들을 또한 부처님이 되게 하는 가장 공변되고 보편타당한 영원히 행복한 길, 그 길을 가는 일보다 더 급박하고 더 소중한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장녕, 부처님이 되는 길이 아닌 그 어느 길도, 오직 한 번 살다 가는 우리 생명을 낭비하고 불태울 만한 값어치는 없는 것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안심법문(安心法門)

 

벌써 가을입니다.

북녘에서 자란 호마(胡馬)는 북풍이 불 때마다 고향을 그리워한다고 하였는데, 이제 선들바람이 가슴에 스며올 때 잊어버린 마음의 고향을 그리는 근원적인 향수(鄕愁)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일찌기 달마(Bodhidharma:?∼528)대사는 인도의 향지국 왕자였는데, 제27조(祖)인 반야다라(Prajnatara:?∼457)존자를 스승으로하여 진리를 깨닫고, 바른 불법(佛法)을 중국에 펴기 위하여 천신만고 끝에 중국 광주땅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때, 중국불교는 경론(經論)의 교리에만 집착하고 정작 마음공부는 소홀히 하여 달마 대사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사는 숭산 소림사 뒷산에 있는 석굴에 들어 앉아 걸식하러 나가는 외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벽을 향하여 바위덩이처럼 깊은 선정(禪定)에 잠겼습니다.

이러구러 9년 세월동안 말 한마디 없는 벙어리로 일관하였습니다.

이때, 신광(神光)이라는 젊은 스님이 달마 대사의 위대함을 전해 듣고 눈보라를 무릅쓰고 소림석굴을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신광은 달마 대사의 등뒤 석굴 어귀에 꿇어앉아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한 밤을 지새웠습니다.

눈발이 무릎을 덮고 온 몸이 얼어붙어 사뭇 저려왔으나, 죽음을 각오한 신광의 뜨거운 구도의 열기는 추호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호젓한 침묵 가운데 하루 해가 지나자, 그토록 목석마냥 앉아만 있었던 달마 대사는 넌지시 돌아앉아 신광을 굽어 보았습니다.

신광은 반색하여 큰절을 올리고 나서, "스승님, 이 어리석은 제자가 법을 구하고자 왔습니다. 불쌍히 여기시어 거두어 주옵소서"

달마 대사는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위없는 대도(大道)는 엷은 지혜나 가벼운 덕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 이니라"

이에 신광은 비장한 마음으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단숨에 왼팔을 잘라서 달마 대사께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솟음치는 선혈(鮮血)로 하얀 눈은 붉게 물들고 이내, 상처에서 희부연 젖이 솟아나와 상처를 아물게 하였습니다.

이때 사납게 울부짖던 눈보라도 숨을 죽이고, 달마 대사의 엄숙한 표정에도 깊은 감동의 빛이 역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광의 지극한 구도의 정성은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신광의 마음은 좀체로 안정을 얻을 수가 없어서 스승앞에 나아가 "스승님, 저의 마음은 아직도 편안하지 않사옵니다. 자비를 베푸시어 제 마음을 다스려 주옵소서"

"그러면 편안치 못한 그대 마음을 가져 오너라, 내가 편안케 하여 주리라"

그러자 신광의 마음은 당혹하여 어리둥절하였습니다. "본시 마음이란 형체가 없거니, 불안한 마음이나 흐뭇한 마음이나 간에, 마음이란 아예 형상화 시킬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스승님, 마음이란 모양이 없사옵기 드러내보일 수도 얻을수도 없지 않사옵니까"

"그렇다, 마음이란 필경 더위잡을 자취가 없는 것이니라. 그것을 분명히 깨달았으면 그대 마음은 이미 편안해졌느니라"

이리하여, 어두운 무명(無明)에 갇힌 신광의 불안한 마음은 활짝 열리고, 맑은 하늘같은 훤칠한 마음으로 정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대도를 성취하여 제2조(祖) 혜가(慧可:487∼593)대사가 되었습니다.

그 뒤에, 혜가 대사의 회상(會上)에서 오랜 병마에 찌들어 몹시도 초췌한 젊은 수행자가 찾아와서 여쭙기를, "스승님, 저는 죄업이 무거워서 불치의 풍병으로 여러 해를 앓는 몸입니다. 아무쪼록 불쌍히 여기시어 저의 죄업을 소멸하여 주시고, 가엾은 목숨을 구제하여 주옵소서"

"정작 그렇다면 그대의 죄업을 이리 내놔 보게, 내가 바로 소멸시켜 줄터이니"

이에, 말문이 막힌 젊은이는 이윽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마음이란 본래 허공과 같이 텅 빈 것, 이미 마음이 그 자취가 없거니, 죄업인들 어디 흔적이나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젊은이는 여쭙기를 "죄업을 아무리 찾으려 하여도 도무지 그 형상이 없사옵니다"

"진정, 그러하니라. 마음이란 본래 공(空)하여 형체가 없고 이름 붙일수도 없는 것이니, 그대를 괴롭히는 죄업 또한 그 뿌리가 없느니라. 그대가 정녕, 그러한 도리를 깨달았으면 이미 그대는 죄업을 참회하여 소멸해 버렸느니라"

이 말씀에 총명한 젊은이의 마음은 활연히 열렸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혜가 대사에게 "스승님, 저는 앞으로 스승님을 섬기려 하옵니다."

"그대같은 풍병환자가 나를 따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젊은이는 말하기를 "몸은 비록 병이 있사오나, 제 마음은 스승님의 마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사옵니다"

그래서 혜가 대사는 그를 대견하게 받아들이니, 젊은이는 차차 건강도 회복하고 더욱 정진에 노력하여 드디어 제3조 승찬(僧璨:?∼606)대사가 되었습니다.

몇 십년의 세월이 흘러 승찬 대사가 환공산(晥公山)에 머무를 때, 아직 13세의 영특한 사미(沙彌)동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큰절을 하고 대뜸 여쭙는 말이, "스승님, 자비를 베푸시어 저에게 번뇌를 해탈하는 길을 일러 주옵소서"

승찬 대사는 기특하게 여긴 나머지 "누가 너를 속박하였기에 풀어달라고 하는 것이냐"

동자는 불현듯 가슴이 막혀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참으로 생각해 보니 스승님의 말씀대로 그 누가, 그 무엇이 내 마음을 구속했단 말인가? 그저 마음 안에서 공연스레 일고 스러지는 번뇌망상이 아닌가? 마음 자체가 형상이 없고 가뭇 없으니, 대체 번뇌망상이 그 어디에 존재 할 수 있단 말인가?"

"스승님, 아무 것도 제 마음을 속박하는 것이 없사옵니다"

"속박하는 것이 없다면 다시 무슨 해탈을 구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 한마디에 갸륵한 동자는 문득, 본래 비어있는 허공 같이 장애 없는 마음자리를 훤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동자가 장차 대도를 성취하고 제4조 도신(道信:580∼651) 대사가 되었습니다.

도신대사는 출가하여 60여 년 동안이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여, 아예 자리에 눕는 일이 없었습니다. 평소에 눈을 감은 듯 지냈으나 눈을 바로 뜨고 사람을 바라보면 그 위엄있는 촉기에 사람들이 움츠려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깊은 삼매에서 우러나온 초인적인 도력(道力)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정통법맥(法脈)은 끊임없이 이어져 제5조 홍인(弘忍: 602∼675)대사를 거쳐 제6조 혜능(慧能: 638∼713)대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달마 대사로부터 혜능 대사까지는 오로지 순수하게 마음의 해탈만을 문제시 하였다고 하여 순선(純禪)시대라 하고, 그 무렵에 주로 제창(提唱)한 법문을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마음이란 허공과 같이 광대무변하고 무장무애(無障無碍)하여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고, 아무런 자취도 없는 것인데, 그렇다고 다만 허무하게 비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상(實相)은 무한한 능력을 원만히 갖춘 생명의 광명으로서, 바로 불성(佛性) 곧 부천님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경전에 이르신 바, "마음이 바로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心則是佛佛則是心)" 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비롯한 일체만유는 모두 한결같이 불성의 광명으로 이루어진 화신(化身)부처님이며, 우주의 실상은 바로 장엄 찬란한 연화장(蓮華藏)세계요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두운 번뇌에 가리운 중생들이 그러한 자기 근원을 모르고 만유의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잠시 인연따라 이루어진 전변무상(轉變無常)한 가상(假象)만을 집착하여 너요 나요 내 것이요 하며 탐착하고 분노하고 아귀다툼하면서, 파멸의 구렁으로 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온 누리에 넘실거리는 역사적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근원적이고 유일한 길은, 이미 부처님과 정통조사(正統祖師)들이 순선(純禪)시대에서도 극명(克明)히 밝히신바, 중생 차원에서 인식하는 일체만법은 바로 그대로 비어있는 공(空)한 도리 곧, 제법공상(諸法空相)을 번연히 깨달아서 우선 불안한 마음을 여의고 안심입명(安心立命)을 확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만 공(空)만이 아닌, 그 공의 근본 성품인 부처님을 성취하기 위하여 공(空)의 도리에 걸맞는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의 생활에 안간힘을 쓰고 최선을 다 하는 것만이, 인류의 파멸을 면하고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약속하는 오직 하나의 청정한 백도(白道)인 것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무량광불(無量光佛)

 

소슬한 금풍(金風)이 산란한 푸념을 필경 돌아가야 할 머나먼 고향으로 실어 보내는 천혜(天惠)의 계절입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부처님께서 이르시기를 "법신(法身) 부처님은 법계(法界:온 누리)를 몸으로 하는 것이니, 일체 중생의 마음 가운데 들어 계시느니라" 하였듯이 우주만유가 그대로 부처님 자신의 몸이며, 나고 죽고 변천하는 일체만상 또한 부처님 자신 의 심심미묘한 활동 양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중생들은 자기자신이 우주의 실상인 부처님과 하나임을 깨닫지 못하는 한,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과 갈등은 영구히 해소할 길 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주의 목적의지(意志)를 불교의 표현으로는 부처님의 서원(誓願)이라 하는데, 이를 간추리면 사홍서원(四弘誓願:중생무변서원도 등..)이라 하고, 보다 구체화하면 아미타불의 48서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다 한결같이 모든 중생을 본래 자기 성품(自性)인 부처(부처님)가 되게 하는 광대무변한 원력(願力)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특히 그 제3서원에서 "온 세계 중생들의 몸이 모조리 진정한 금색광명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으리라"하였고, 제11서원에서는 "온 세계 중생들이 필경에 부처가 되지 못한다면, 나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으리라" 하였으며, 제12서원에서는 "내 광명이 무량무변하여 헤아릴 수 없는 모든 국토를 비출 수가 없다면, 나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으리라" 하였고, 제18서원에서는 "내 나라인 극락세계에 태어나고자 하여 환희심을 내어, 내 이름(아미 타불이나 관세옴 보살)을 지성으로 다만 열번만 외우거나 불러도,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다면, 나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으리라" 하였습니다.

이와 비슷한 법문들이 여러 경전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상징적인 의미를 풀이한다면, 진실한 부처님 곧 법신부처님은 바로 우주 자체임을 설파하였으며, 그리고 그것은 온 누리에 충만한 부사의한 생명의 광명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을 비롯한 일체만유 또한, 깨닫고 깨닫지 못하는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두가 동일한 생명인 불성(佛性)의 광명으로 이루어진 화신(化身)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물리학의 량자역학(量子力學)에서도 밝히고 있는 바, 일체존재를 구성하는 근본요소인 양자(陽子), 전자(電子), 중성자(中性子) 등의 소립자(素粒子)란, 우주에 충만한 장(場)에너지(Energy of Field)인 광명의 파동(光波)으로부터 인연 따라 이루어진 광명의 입자(光粒子)임을 증명하고 있으니, 일체물질 현상은 그대로 광명의 형상화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일찌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큰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많은 사람들을 제도하시다가, 아버지인 정반왕의 간청으로 가비라성을 떠난지 12년만에 귀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허공으로 솟아올라 자재롭게 거니시며 상서로운 광명을 말하시어 정반왕을 비롯한 모든 대중들을 환희에 넘치게 하셨습 니다.

그리고 이내 좌정하시어, "일체만법이란 인연따라 잠시 모였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지 않을 수 없는 덧없고 허무한 것이니, 이를 집착하지 말고 오직 번뇌를 여의고 해탈을 구함이 인생의 정도(正道)라"는 해탈법문을 설(說)하시어, 모든 이에게 보리심(菩提心:위없는 진리를 깨닫고 만 중생을 제도하려 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셨습니다.

이때, 정반왕이 부처님을 향하여 "세존(부처님의 다른 이름)이 부처님이 되시어, 그 광명이 이렇듯 형언할 수 없이 장엄 하거니와,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에 말세 중생들은 어떻게 부처님의 한량없는 광명을 알수가 있으리요, 원컨대 세존께서는 나와 여러 중생들을 위하여 자세히 말씀하여 주소서" 그때 부처님께서 온 누리에 광명을 충만케 하는 삼매(遍色身三昧)에 드시니, 홀연히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청정미묘한 5색광명이 나와서 온 세계를 두루하고, 다시 부처님의 정수리로 거두어 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가비라성의 넓은 정원에 난데없이 금빛 찬란한 카다란 연꽃이 솟아오르니, 그 꽃잎이 1천(千) 잎사귀며, 그 천 잎으로부터 천갈래의 광명이 일어나고, 그 광명 가운데 천(千)분의 화신부처님이 나투시어, 각기 부처님은 천 분의 시자(侍者)와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이때 부처님께서 정반왕에게 여쭈시기를 "부처가 열반에 든후에, 중생들이 애써 죄악을 멀리하고 생각을 오롯이하여 한량없는 부처의 광명을 생각한다면, 부처가 생존해 있지 않더라도 부처를 보는것이 될 것이며, 필경에는 반드시 위없는 진리를 깨닫 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번뇌를 여읜 성자의 청정한 안목에는 유정무정 천차만별의 모든 존재들이 다 한결같이 청정미묘하고 영생불멸하는 생명의 광명 아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량수경(無量壽經)에도 부처님의 광명을 12광불(光佛)로 찬탄하셨는데 부처님의 광명이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 하여 무량수(無量壽) 불이요, 그 광명이 온 누리에 충만하다고 하여 무량광(無量光) 불이며, 그 무엇에도 걸리지 않는다 하여 무애광(無碍光) 불, 우주만유가 오직 다만 생명의 광명뿐이기에 무대광(無對光) 불, 훨훨 타오르는 불꽃같이 빛 난다 하여 염왕광(琰王光) 불, 미묘청정한 광명이니 청정광(淸淨光) 불, 모든 지혜공덕이 원만히 갖추어 있어서 지혜광(智慧光) 불, 끊임없이 언제나 빛나기에 부단광(不斷光) 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부사의 한 광명이 니난사광(難思光)불, 해와 달빛으로 비교할 수 없는 영롤한 광명이어서 초일월광(超日月光) 불, 그래서 부처님의 광명은 바로 영원한 행복 자체이기에 환희광(歡喜光) 불이라 찬탄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을 비롯하여 일체 생명의 실상(實相)인 불성(佛性:인격적으로는 부처님)은, 모든 공덕을 갖추고 온 누리에 충만하여 영원히 멸하지 많는 청정미묘한 광명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림자같고 메아리같이 허망한 현상세계에 집착하는 번뇌만 소멸하면 우리 스스로 생명의 본질인 광명 자체 바로 부처님이 되어, 광명세계 곧 극락세계의 영생의 복락(福樂)을 온전히 보고 느끼고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과 정신, 유(有)와 무(無), 너와 나 등 일체 상대적 대립을 초극한 생명의 실상인 광명세계의 상념(想念)을 굳게 지니고 올바른 도덕적 생활을 기조로하여, 제각기 인연에 따라 주문을 외우든, 염불을 하든, 화두를 참구(參究)하든, 또한 명상이나 기도(祈禱)를 하든지 간에 모두가 다 한결같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지름길인 선(禪)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참선 곧 선(禪:Dhyana)이란, 우리 마음을 중도실상(中道實相)인 생명의 본질에 머물게 하여 산란하지 않게 하는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수행법(修行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실한 수행을 간단없이 지속할 때, 마치 흐린 물이 쉴새 없이 흘러가노라면, 그 자정작용(自淨作用)에 의하여 저절로 맑아 지듯, 어두운 번뇌의 그림자는 가뭇없이 스러지고, 날로 생명의 광명인 부처님과 가까워지며, 필경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생명의 근본목적을 달 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일체 존재의 동일한 성품인 불성(佛性)을 자각하고, 그 불성에 입각한 보편적인 예지와 자비에 의해서만, 비로소 유물(唯物)주의에 멍든 갈등과 분열의 역사적 위기는 극복되고 인류의 사무친 비원(悲願)인 진정한 자유와 평등과 영생의 행복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마음의 세계

 

우리는 흔히 말하기를 너그럽고 밝아서 트인마음을 하늘같이 넓은 마음이라 찬양하고, 옹졸하고 막막한 마음은 바늘귀만도 못한 마음이라고 꾸짖고 빈축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체 인식작용이나 무의식 등 그 무엇이든 마음을 떠나서는 아예 이루어 질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화엄경에도 '일체 만법이 오직 마음뿐이요, 마음 밖에 따로 아무것도 있을 수 없 거니, 마음과 부처님과 중생의 이 세가지가 차이가 없느니라. (三界唯一心 心外無別法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비단 사람뿐 아니라, 일월성수(日月星宿)나 삼라만상 일체 존재가 마치 바람따라 물 위에 맺혀지는 거품과도 같이 마음 위에 이루어진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경(經)에도 우주만유는 오직 마음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여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무지와 무명(無明)에 가리어 일체만유의 실상(實 相)인 마음 곧 불성(佛性)을 깨닫지 못하고 그 현상인 상대적인 물질세계만이 실재(實在)한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한량없는 번뇌망상을 일으켜, 현대와 같이 불안하고 혼란한 사회현상을 자아내게 되는것 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중생들이 생활하는 경계를 법화경에서는 그 번뇌의 정도에 따라서 십법계(十法界)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우선, 번뇌와 업장이 가장 무거운 지옥세계로부터 일반 동물인 축생세계, 매양 굶주리고 헤매는 귀신세계, 힘이 세고 싸움만을 일삼는 아수라(阿修羅)세계, 그리고 선악(善惡)이 거의 상반되고 사뭇 분별이 많은 우리 인간세계, 선량하고 안락한 천신(天神)들의 천상세계 등 아직 마음의 진리에 어두운 여섯갈래(六道)의 범부세계와, 마음의 실상을 깨달은 성자(聖者)의 세계로서, 스승에 의지하여 깨달은 성문(聲聞)세계, 스스로 명상을 통하여 깨달은 연각(緣覺)세계, 자기 뿐 아니라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육바라밀(六波羅蜜: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을 닦는 보살세계, 그리고 지혜와 자비 등 일체공덕을 원만히 갖춘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 자체인 부처님 세계들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구분은 우리 인간의 차원에서 분별한 방편적인 구분에 지나지 않으며, 마음의 본성인 불성(佛性) 곧 우리의 본래 면목을 깨달은 성자의 청정한 안목에는, 위에서 열거한 지옥에서부터 부처님의 세계까지가, 다 한결같이 미묘 청정한 불성으로 이루어진 불국토(佛國土) 아닌데가 없습니다.

그것은, 일체물질의 근본요소인 전자(電子)나 양자(陽子)나 중성자(中性子) 등과 소립자(素粒子)로부터 동물과 식물과 광물 그리고 하늘의 뭇별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결같이 마음이라 하는 가장 순수한 생명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일체존재의 근본에 통달한 대아(大我:성자)의 경계에서는 천지만물이 오직 마음뿐이요,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님(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이기도 함)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법화경 비유품에 이르기를 '어떤 가난한 사람이 부자인 친구집에 가서 술에 취하여 잠이 들었는데, 주인 친구는 요긴한 일이 생겨 외출하게 되자, 그는 친구의 옷속에 보배를 매어주고 떠나게 되었다. 이윽고 잠을 깬 가난한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르고 하릴없이 유랑하면서 간신히 세월을 보내다가 얼마 후에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나게 되어 그 말을 듣고, 그 보배의 덕택으로 단번에 빈궁한 신세를 벗어나 행복하게 되었다' 는 법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인간이 무지와 번뇌에 사로잡혀 그지없이 헤매다가 다행히 성자의 가르침을 만나서 자기가 본래부터 갖추어 있는 불성을 깨닫고 애꿎은 인생고(苦)를 벗어나 영생의 안락을 얻게되는 간곡한 비유담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의 본성은 완전 무결한 불성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본래 성품인 불성을 등지고, 현상적인 물질만을 집착하여 탐내고 증오하는 생활을 되풀이하는 한, 마치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사뭇 허기진 탄타로스(Tantalos)의 사무친 기갈과도 같이 인간존재의 처참한 고난의 형벌은 영구히 가실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인류사회가 당면한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고질적인 병폐와 역사적 위기를 극복하는 오직 하나의 확실한 대도(大道)는, 일찌기 수많은 성자들이 밝히신 바, 우주와 인생의 근본 생명인 불성 곧 부처님을 굳게 믿고, 스스로 부처님이 되기 위하여 마음에 순간 찰나도 부처님을 여의지 않으면서 공변된 도덕적 생활에 최선을 다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원히 행복한 길, 그 길을 위하여 무수한 성자들과 순교자들 이 난행고행(難行苦行)을 거듭하고 생명을 바쳐서 개척한 영생불멸의 고향으로 통하는 광명의 길, 유물주의(唯物主義)의 탁류에 허덕이는 현대 인들이 살아남을 오직 한 줄기 이 구원의 길을 우리들이 마다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금륜(金輪)의 첫걸음

 

비록 몽매에 사무친 그리운 귀향의 길이라 할지라도 고달픈 나그네에 게는 가파른 산넘어 아득한 마을 일것이며, 번뇌의 해탈과 영생의 행복을 지향하는 위없는 정도(正道) 일지라도 삼독심(탐욕, 분노, 어리석음)에 얽매인 중생들에게는 천리만리 머나먼 꿈나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하여 인생과 우주의 실상(實相)을 여실히 깨닫고 참다운 자아(自我)를 성취한 거룩한 성자들에게는 마치 닿기만 하면 황금빛으로 변한다는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헤르매스(Hermes)의 지팡이와도 같이, 영원히 행복한 금빛 찬란 극락의 정토(淨土)아닌 데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는 바로 행복 자체인 부처님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가 그대로 극락세계인데, 인생의 모든 불행과 갈등은 참다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중생들의 자업자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똑같은 하나의 사건도 역사적 사회적으로 그 처지와 경우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각기 동일한 견해일 수는 없으며, 또한 차원을 달리하여 일체 욕망을 초월한 색계(色界)중생이나, 의식만이 존재한 무색계(無色界) 중생들의 견해 또한 저마다 지은바 행업(行業)에 따라서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중생들의 상호불신과 갈등과 불행은 필연적인 인과응보의 죄과(罪果)인 것입니다.

그리기에, 우리 중생의 참생명이요 근본 고향인 부처님이 되지 못하는 한, 하염없는 인생의 불안과 짖궂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멍에는 영구히 벗어날 기약이 없습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은 과거 전생에 살타왕자로 태어났을 적에는, 부처님 되기를 서원하여 굶주린 범에게 한 생각의 회한도 없이 자기 몸을 보시하였으며, 또는 설산동자로서 히말라야 산중에서 수행(修行) 할 때에는, 추호의 주저함이 없이 악마에게 몸을 던졌고, 또한 헤매는 중생을 연민하는 마음이 사무쳐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는 상제(常啼) 보살이었을 적에는, 해탈의 지혜인 반야(般若)를 얻기 위하여 혼연히 뼈를 부수어 골수를 꺼내서 팔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렇듯, 갖은 난행고행(難行苦行)의 시련 끝에 깨달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법(佛法)은 심심미묘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으나, 이를 요약하면 바로 육바라밀(六波羅蜜)로서 곧, 마음에 집착없이 베푸는 보시(布施)와, 행동과 언어를 바르게 하는 계율을 지니는 지계(持戒)와, 마음에 거스릴때 강인하게 참고 견디는 인욕(忍辱)과, 모든 선행(善行)을 한사코 끊임없이 닦아나가는 정진(精進)과, 애써 들뜬 마음을 거두어 근본 마음자리인 청정한 불심(佛心)에 고요히 잠기는 선정(禪定)과, 우주만유의 실상은 일체 지혜공덕을 원만히 갖춘 바로 부처님이라는 생각을 여의지 않는 지혜(智蕙) 등 위없는 최상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 육바라밀을 더욱 간략하게 표현하면, 몸과 입으로는 올바른 계율지키며, 다만 순간 찰나도 생명의 실상인 부처님을 여의지 않는 가르침으로서, 참으로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성불(成佛)의 지름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교법이 구르고 굴러 모든 삿된 견해를 모조리 무너뜨리므로 법륜(法輪)이라 하며, 바로 진리 자체이기에 진여(眞如)라 하고, 일체 번뇌를 소멸한 영생의 고향이므로 열반(涅槃)이며, 인생과 우주의 본래 면목이기에 주인공(主人公)이요, 모든 불안과 갈등이 없는 영생 안온한 이상향이기에 극락(極樂)이며,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지혜 공덕을원만히 갖추고도 오히려 영겁토록 파괴되지 않는 영생불멸의 실체이기 때문에 금강륜(金剛輪) 곧 금륜(金輪)이라 합니다.

이제, 우리 인류의 오랜 역사적 시련을 극복하고 진정한 자아인 부처님이 되고, 최선의 이상향인 극락세계를 이룩할 시절과 인연이 성숙하였습니다.

그래서, 삼천년만에 오직 한번 피어오르는 찬란한 우담발라화 꽃과도 같이 우리 금륜회보(會報)가 바야흐로 어기센 첫 걸음을 내닫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고해(苦海)중생을 태우고 필경 돌아가야 할 성불의 고향으로 인도하는 세찬 금륜의 수레바퀴는 오직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여읜 육바라밀의 순수한 기름에 의하여서만, 장엄한 금바라화(金波羅華)꽃이 만발한 해탈의 가향(家鄕)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금륜도(金輪圖) 해설

 

천상천하 온 누리에서 가장 귀중한 보배는 부처님(佛)과 불법(佛法)과 불제자(僧) 곧 불법승 삼보(三寶) 입니다.

그리고 삼보의 구체적인 체성이 바로 금강륜(金剛輪) 곧 금륜(金輪) 입니다.

따라서, 금륜은 일체만유의 근본 바탕이 되는 단단한 기운인 지(地:□)와 물 기운인 수(水:O)와 불 기운인 화(火:△)와 움직이는 기운인 풍(風:모양이 없어서 설명으로. 모양은 반원, 둥근부분이 위로...)과 장애없는 기운인 공(空:모양은 물방울 모양...)등 5대(大) 곧, 5륜(輪)의 본질로서, 정신과 물질이 원융하게 융합된 형이상학적인 존재 자체이며, 물리적으로 표현하면 가장 순수한 에네르기(Energie) 입니다.

그래서, 경(經)에는 천하를 다스리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등장할 때는 먼저 이 금륜을 감득하고 금륜을 굴려서 4천하를 다스린다고 상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범부 중생이 모든 번뇌를 소멸하고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들게되면 금강륜을 현전에 보고 증험하여 범부를 여의고 성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금륜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영원히 소멸되지않고 온 누리에 털끝만한 빈틈도 없이 두루 존재한 우주의 실상이니, 일체 만유는 바로 금륜으로 이루어진 찬란한 광명세계 입니다.

비록, 우주가 생성하여 생물이 발생하고 또한 파괴되어 드디어는 허무가 되어버리는, 이른바 성주괴공(成住壞空) 4겁(劫)을 되풀이하고, 일체존재가 생주이멸(生住異滅)과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영겁이 거듭한다 할지라도 근본 바탕인 금륜은 호리도 변함이 없는 영원한 실체 입니다.

이러한, 금륜의 상징이 바로 금륜도(金輪圖)인데, 이는 지대(地大)의 (□), 수대(水大)의 (O), 화대(火大)의 (△), 풍대(風大)의 (원이 위를 향한 반원모양), 공대(空大)의 (물방울모양) 등의 5대(大) 곧 5륜(輪)을 종합한 도식으로서, 우리의 근본 자성인 불심(佛心)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불심인(佛心印)이요, 또한 부처님의 일체 지혜 공덕인 5지(智)를 관찰하여 자신이 바로 5지여래(智如來)되는 5지 총관도(總觀圖), 또는 5륜관도(輪觀圖)라고도 하며, 일체만덕을 갖춘 卍(만)자를 비롯하여 우리 한글이나 동서 모든 문자의 근본 골격이 되므로 자륜(字輪)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밀교(密敎) 계통의 절에서는 대일여래(大日如來) 곧 법신(法身) 부처님의 상징으로 5륜탑(輪塔)을 조성하여 숭앙하기도 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광주 금륜회관 개관 축하 법어

 

오늘 금륜회관의 개관 경찬(慶讚)법회는 싸늘한 초겨울 날씨와 착잡한 사회생활 속에서 피곤한 우리 사부대중의 스산한 마음을 훈훈하게 어루만져 주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러한 축복된 개관 법회를 봉행하게 된 것은 오로지 존경하는 금륜회 법우 여러분들의 지극하신 신심과 투철하신 보살행의 결정으로서 산승이 외람히 출가 사문을 대표하여 충심으로 수희(隨喜) 찬탄과 존경과 치하의 합장을 드리는 바입니다.

아직 불연(佛緣)이 성숙하지 못하여, 대 광주직할시에 불교회관 하나도 없음을 못내 섭섭하게 생각 하였는데, 이제 순수한 재가불자님들의 발보리심의 정화(精華)로써 여법한 금륜법당이 이루어지게 된 것을 거듭 경하 축복하여 마지않습니다.

오늘날, 어느 계층이나 유무식을 불문하고 갈등과 혼란을 거듭하는 현대사회의 위기현상에 대하여 심각한 불안과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더욱 답답하고 우울한 것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인간의 고질적 병페인 탐욕과 분노를 정화하는 명쾌한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갈수록 파멸의 낭떠러지로 치닫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 사회를 막론하고 모든 혼란과 불행의 근원은, 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의 상실에서 오는 것임은 췌언(贅言)할 필요도 없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현대와 같이 각종의 이데올로기가 얼키고 설켜서, 그 매듭을 풀 수가 없고 가장 정당하고 평화로와야 할 종교마저도 수 많은 교파와 종파 또는 문파 등으로 난립하여, 자기들의 교리와 주장만이 최상 유일이라고 우겨대는 다종교의 혼란상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행한 현상을 극복하는 오직 하나의 길은, 우리 불교와 같이, 일체 만유의 근본 실상을 확연히 밝히고, 참다운 자기를 발견하고 영원한 이상세계인 불국정토를 이룩하는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아예 찾아볼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불교라 할지라도 편협하게 어느 종파나 문중등에 집착하여, 원융무애한 중도사상인 정통불법을 외면하고서는 소용돌이치는 현대사회의 혼탁한 물결을 맑힐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소상히 밝히신 바, 우주의 일체 만유는, 바로 진리자체인 진여불성이 스스로의 인연 따라 생성하고, 또한 인연따라 소멸하는 이른바 연기법의 영원한 일대행상(一大行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불교의 연기법의 도리는 가장 근원적이고 철저하게 인과의 도리를 밝힌 진정한 과학이며, 물질과 정신의 근본실상과 그 존엄성을 여실하게 도파(道破)한 가장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철학이며, 영원한 행복을 원만하게 성취하는 진정한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불교는 종교인 동시에 철학이요 과학이기 때문에, 유사이래 동서양의 모든 문화현상은 필경, 인과필연으로 바로 진리자체인 불교로회구하여 돌아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불교인의 자랑과 환희와 피할 수 없는 무거운 역사적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 불교가 서야 할 좌표는 이미 부처님께서 밝히시고 역대 성현들이 극명히 천명하신 바, 원통무애한 정통불법이 아니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교의 구제대상은 어느 특정 계층만이 아닌 모든 국민이며 세계 모든 민족이며 유정무정의 일체 중생인 것입니다.

또한 현대인이 사뭇 절규하여 마지않는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도불교의 근본 진리이자 바로 우주의 대법칙이기도 한 연기법에 입각하여 그에 따른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의 보살행의 실천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근원적인 통찰과 의식의 개혁이 없이 다만 피상적으로 현실사회의 구조적인 모순만을 제거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한, 우리 인간은 혼란과 분열의 수렁에서 영구히 헤어날 기약은 없을것 입니다.

혼탁한 탁류를 맑히려면 먼저 그 근원을 다스려야 하듯이, 우리들이가장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불교 인생관을 확립하고 그에 따른 도덕적 실천에 노력한다면, 인류사회의 모든 병폐와 불행은 그 자취를 감추고 마치 먼동이 터올 때 어둠이 사라지듯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복지사회의 여명이 찬연히 밝아오게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금륜회 법우 여러분!

그리고 동참하신 사부대중 여러분!

영생불멸하는 진여불성인 금강륜 곧 금륜이란 영겁을 통하여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구르고 굴러서 파사현정 하는 진리의 수레바퀴 곧, 삼세모든 부처님의 법륜인 것 입니다.

여러 법우들께서는 금륜회의 명의(名義) 그대로 금강불괴의 평등대비를 견지하시고, 인생고해에 시달리는 모든 중생의 자유와 평등과 상호간의 관용과 타협과 영생의 복락을 위하여, 순교적인 선구자가 되실 것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 축복된 금륜회의 개관법회는 바로 대 광주의 우람하고 장엄한 불교회관의 창립으로 직결될 것을 확신하고 축도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빛나는 고을, 우리 광주가 자비와 지혜 광명을온 누리에 홍포(弘布)하는 거룩한 진리의 도읍이 될 것을 합장기원하며산승의 축사를 가름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1. 참선(參禪)의 바른 길 I

 

● 본원(本願)의 정립(定立)

부처님의 계율 중에서 불성(佛性)에 알맞는 계율, 이것이 불성계(佛性戒)입니다.

보통 계율은 그냥 '이것은 하지 말라. 저것은 해라' 하는 간단한 것인데, 불성계는 불성(佛性: 부처님의 성품) 따라서 그대로 지키는 계율이 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보살계는 불성계에 해당합니다.

보살계 가운데는 적극적인 계율과 소극적인 계율이 있습니다.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 는 계율은 소극적인 계율이고, "무엇을 해야 한다"는 계율은 적극적인 계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적극적인 계율을 불교술어로 작지계(作持戒)라 하고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 하는 소극적인 계는 지지계(止持戒)라 합니다.

이러한 계율 가운데서, 작지계 중의 하나가 "법사(法師)를 만나면 반드시 법문을 청하라" 는 것입니다.

법사를 만나면 반드시 법문을 청해서 법문을 들어야 만, 계율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법사를 만나고도 법문을 청하지 않으면 계율을 파계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법사한데 법문을 청할 때는 반드시 같은 자리에 앉지 말고, 이와 같이 높은 자리를 마련해 놓고서 법문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법사가 소중한 것 보다도 부처님 법이 그만치 소중하고 부처님 법을 대변해서 말을 하는 사람이니까, 법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반드시 높은 자리를 마련해 가지고서 법문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산승(山僧)도 무슨 법문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높은 것도 아니고, 다만 부처님 법(法) 따라서, 부처님 법을 말하기 위해서 이와 같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각기 자기 소원이 있습니다.

작든 크든 소원이 있는 것인데 이러한 우리 소원 가운데서 가장 큰 소원, 모든 소원을 다 합한 소원을 "본원(本願)" 이라 합니다.

지금은 별로 없습니다만 왜정 때 보면 서울에는 본원사(本願寺)라 하는 절이 여러 군데가 있었고, 지방의 작은 도시에도 역시 본원사라는 절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절 이름은 부처님의 본원을 주로 내세운다는 뜻 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성불(成佛) 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우리 원이 크지 않으면 성불의 대도(大道)까지를 잘 못 들어갑니다.

법화경(法華經)에 보면 우리 행위 가운데서 "서원안락행(誓願安樂行)" 이라 서원은 우리가 맹서하고 무엇 무엇을 하겠다하는 것이 서원 아니겠습니까, 서원을 세우면 그냥 우리 마음이나 몸이나 안락스럽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공부할 때에 조금 피로하면 "아, 이거참 내가 너무 무리했구나" 조금 고생스러우면 "고생스럽구나"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서원이 크면 그런 고생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기어코 내가 성불해야 하겠다" 또는 "많은 중생을 제도해야 하겠다" 이러한 큰 서원을 품으면 조그만 고생이나 그런 것이 안중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땅히 성불해야 하는 것 인데 또한, 기왕이면 고행을 떠나서 안락스럽게 해야 할 것인데, 어떻게 하면 안락스럽게 할 것인가 하는 법문 가운데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서원안락행" 이라는 법문입니다.

위대한 서원을 세우면 그때는 안락스럽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서원 가운데서 제일 큰 서원이 아까 말씀마따나 본원(本願)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본원인가?

부처님의 본원(本願) 곧, 부처님은 대체로 어떤 분이고, 부처님은 어떠한 목적 의식이 있는 것인가?

본원을 약사경(藥師經)에 보면 12대원(十二大願)이라, 열두가지 큰 원으로 본원을 풀이했습니다.

또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에 보면 48원(四十八願)이라, 마흔여덟 가지로 본원을 대변했습니다.

또 온통 몰아서 심지관경(心地觀經)에는 사홍서원(四弘誓願)이라, 네 가지 큰 서원으로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간추리면 사홍서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라, 중생이 끝도 갓도 없으나 한사코 다 제도하고,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이라, 한도 끝도 없는 번뇌를 맹세코 다 끊고,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이라, 위없고 한량없는 법문을 기필코 다 배우고,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이라, 더 이상 위없는 무상불도(無上佛道)를 필경에 이루리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장 간추린 근본서원입니다.

이러한 본원을 우리가 확실히 믿어야만 부처님의, 우주를 섭리하는 그런, 목적의식을 알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한다. 그러니까 불교와는 맞지 않다." 이렇게 섣불리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기독교 쪽은 우리 불교보다 조금 더 인격적으로 풀이 했다는 점만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내나야 우주의 근본서원, 우주의 근본 목적의식을 표현한 점은 거의 비슷비슷합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체 인데, 생명체가 어떠한 목적의식이 있는가?

그러한 목적 의식은 아까 말씀 한대로 본원인데, 마흔여덟 가지 서원 또는 열두 가지 서원 또는 네 가지 큰 서원, 이런 것을 다 몰아서 한 말로 풀이하면, "무상불도를 성취하고 무량중생을 제도한다" 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목적의식입니다.

우리는 지금 참선(參禪)하고자 하는 목적 의식을 가지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참선은 이러한 무상불도를 성취하는 즉, 우주의 목적 의식이자 우리 중생의 가장 높은 서원, 제일 거룩한 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가장 가까운 길이요 가장 확실한 길인 것입니다.

요즈음 신문쪽지를 보면, 참선은 비단 불교인 뿐만 아니라 천주교에서도 하나의 명상법(暝想法)이라고 해서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 불교에서 참선에 유능한 분들을 초빙해서 참선법을 묻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런 정도로 인류문화의 최고봉으로, 인류의 수행방법으로는 가장 수승(殊勝)한 법으로 지금 각광(脚光)을 받고 있는 것이 참선법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1. 참선(參禪)의 바른 길 II

 

● 행법(行法)의 간택(簡擇)

대체로 참선(參禪)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시 본원(本願) 즉, 근본서원이 앞서야 합니다.

참선에 대해서 상당히 연구한 분도 정작, 공부할 때는 참선법에 대해서 혼동을 느낍니다.

또, 세간이나 또는 여러 종파에서 수행하는 법에 관해서 하도 말씀들이 많고 정보가 많으니까 혼미를 느껴서 갈팡질팡합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오늘 모이신 분들은 혼미하지 않고서 그 본체를 드러내는, 우주의 목적 의식 즉, 부처님의 본뜻과 우리가 계합(契合)하는 법을 먼저 마음에 간직하셔야 합니다.

그것 무엇인고 하면 실상관(實相觀) 입니다.

보통은 참선하는 법으로 위대한 법사가 어떠한 문제를 제시하면 그 법문을 가지고서 계속 의심을 합니다.

이번에 조선일보에 효봉대선사의 열반상이 나왔습니다만 거기에 보면, 효봉선사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임종 순간 숨을 거둘 때까지 '무, 무, 무' 라고 하셨다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조주무자(趙州無字)라 하는 즉 '무(無)' 라는 화두(話頭)를 의심을 하신 것이지요.

이러한 방법도 훌륭한 방법입니다.

또한 이러한 방법으로 해서 위대한 도인들이 많이 배출 되셨습니다.

그러나, 참선하는 방법은 이러한 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또는 금강경(金剛經)에서 말씀한 오온개공관(五蘊皆空觀)이라, '우리 몸이나 마음이나 또는 일체 중생이 모두가 다 바로 보면은 본래로 텅 비었다' 고 관찰하는 법도 있습니다.

불교를 믿는 분 가운데는 금강경을 하루에 몇 번씩 외우는 분도 있습니다.

그와 같이 하시는 분들은 주로 공관(空觀) 즉, 천지우주가 바로 보면 텅 비었다 하는 제법개공관(諸法皆空觀)이라, 제법이 다 비었다고 관찰하는 법을 취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또한 이것만이 최상의 길은 아닙니다.

또 어떤 법은 부처님을 흠모하고 불성(佛性)을 참구(參究) 할 때에 '저 서산에 지는 해를 봐라' 합니다.

불교말로 하면 일상관(日想觀)이지요.

이런 법도 역시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좋은 관찰방법입니다.

우리 본래 자성(自性)이, 우리 본래 생명이 바로 불성(佛性)이거니, 뉘엿뉘엿 서산에 지는 장엄스러운 태양을 바라보며, 바라고 애쓰고 거기에다 마음을 딱 모으고 닦아 나가면, 원래 마음이 부처거니, 차근차근 산란스러운 마음은 사라지고 불성으로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법문은 '극락세계의 땅을 봐라' 고도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어째서 하필이면 땅을 보라고 했는가 하지만 이것은 보통 우리 눈으로 보는 이런 땅이 아니라, 광명이 빛나고 투명 찬란한 극락세계의 땅 입니다.

이것을 또 애쓰고 보아나가면 우리 번뇌가 차근차근 녹아져서 정작, 찬란스러운 우주와 광명으로 빛나는 극락세계를 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도 역시 우리가 공부하는 한 방법입니다.

또는, 어떠한 문제를 의심하는 즉, '무(無)' 라 하는 화두를 의심하는 공부 또는 '판때기 이빨에 털 나온다' 는 판치생모(板齒生毛)라는 화두를 의심하는 공부와 같은 그런 문제의식 공부도 굉장히 길이 많고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허나 이런 법 모두가 다 성불(成佛)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현대화하는 지극히 어려운 때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는 무슨 문제를 분석적으로 국부적으로 하나만 취하면, 반드시 반정립(反定立)으로 우리한테 어떤 부정적인 것이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는 일체 문화를 종합하는 시대의 추세이기에 수행법도 그런 방식으로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씀입니다마는 이런 것은 앞으로 두고두고 알아두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제가 굳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현대란 사회는 그냥 그렁저렁 공부할 때가 아닙니다.

굉장히 복잡한 학문도 여러 가지로 많이 있고 또 지식의 범람 가운데 있어놔서, 이런 시대에는 가장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행법(行法)을 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공(空)만 보는 것이 옳다' 또는 '화두만 의심하는 것이 옳다' 해서 어떤 특정적인 것으로만 고집하는 방식으로 해서는 잘 안 통합니다.

지금 천주교 신부들이 초빙해간 우리 스님네들이 참선법을 어떻게 지도하는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만일 어떠한 특정적인 하나의 방법만 고집스럽게 지도한다고 하면 문제가 큽니다.

참선의 본질과는 십만팔천리나 어긋나고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1. 참선(參禪)의 바른 길 III

 

● 실 상 관(實 相 觀)

그러니까, 지금 여기 남아서 공부하실 분이나, 집에 돌아가셔서 앞으로 참선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공부하실 분이나 염두에 두실 문제는 무엇이고 하면, 실상관(實相觀) 입니다.

곧 우주의 전모(全貌)를 그냥 한꺼번에 관찰하는 법입니다.

물론 우리는 지금, 범부(凡夫)의 영역에 있으므로 불성(佛性)을 못 봅니다.

부처님의 참다운 생명도 못 보고 부처님의 지혜도 우리는 모릅니다.

또한 부처님의 지혜란 것은 말이나 문자로 표현도 못하고 생각으로 헤아리지도 못합니다.

따라서 어느 개념이나 어떤 말 몇 마디로 부처님의 실상(實相)을 한꺼번에 몰록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진여(眞如) 또는 도(道), 열반(涅槃), 극락(極樂), 법성(法性) 또는 불성(佛性), 실상(實相), 실재(實在), 자성(自性), 청정심(淸淨心) 등 모두가 다 표현만 다르지 내용이나 뜻은 똑같습니다.

그때그때 부처님께서 중생의 근기 따라서 또는 각 경전 따라서 표현만 달리했을 뿐입니다.

이러한 진여는 즉, 말이나 또는 문자로 표현하지 못하는 진리의 당체(當體), 진리 그 자리는 리언진여(離言眞如) 라, 말씀을 여읜 진여라는 말입니다.

말씀을 떠나버린 진여, 진리 자체를 우리 범부들은 못 봅니다.

마치 물질을 분석해 나가서 궁극에 텅 빈 장(場)이 되어버리면 그때는 어떤 소립자(素粒子)도 없이 텅 비어서 어떠한 전자현미경으로도 못 봅니다.

그러나, 도인들은 텅 비어버린 그 자리를 분명히 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로는 다 표현을 못 합니다.

그러한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 자리는 부처님 말씀에도 '아라한도(阿羅漢道)를 성취한, 아라한도는 번뇌가 다한 성자의 높은 자리 아닙니까, 그러한 성자가 몇 천만년을 두고 부처님 공덕을 말해도 다 말할 수 없다' 고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개념적으로는 표현을 못합니다.

따라서 진리당체 자리는 리언진여(離言眞如)라, 말씀을 떠난 진여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도 역시 부처님의 심심미묘(深甚微妙)한 지혜로써 밝혀놓은 의언진여(依言眞如)라, 말씀에 의지한 진여라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나 도인들은 중생이 불쌍하니까 비록 말씀을 가지고서 말로는 다 표현 못하지마는, 그래도 부처님의 심심미묘한 지혜로서 가장 간명하게 진여의 실상(實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실상관(實相觀)입니다.

실상(實相)을 간단히 표현한 것이 어떤 것인고 하면은, 천태지의(天台智의 538∼597) 선사(禪師)의 식으로 표현한다면 '공(空), 가(假), 중 (中), 삼제(三諦)' 라 합니다.

불교철학 가운데서 제일 체계가 잘 선 것이 천태지의 선사의 천태학입니다.

말이 너무나도 전문적으로 들어갑니다만, 거기에 보면 우리가 수행하는 법 가운데서 가장 높은 법이 마하지관(摩訶止觀)인데, 그 법은 어떤 것인고 하면은, 부처님의 실상, 우리마음 실상을 바로 관찰하는 법으로 공(空), 가(假), 중(中) 삼제(三諦) 입니다.

'공(空)' 은 무엇인고 하면, 바로 보면은 우주는 텅 비어있다는 말입니다.

아까 말씀대로, 참구하거나 분석해 보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있지 않고 빈 가운데는 현상적으로는 묘유(妙有)로 충만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거짓 가 자 '가(假)' 입니다.

또한 그러한 공(空)만도 아니고 또한 가(假)만도 아닌 것이기 때문에 '중도(中道)' 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변증법(辯證法)인 셈이지요.

공(空)도 아니고, 또는 가(假)도 아니고 중도(中道)란 즉, 말하자면 정(正)도 아니고 반(反)도 아니고 합(合)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실상을 표현했습니다.

조금 더 간추리면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천지우주는 바로 보면 그저 텅 비어서 물질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사실, 물질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나 현대인들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물질은 본래 없습니다.

다만,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하나의 파동(坡動)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물리학도 그러한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그 무엇의 파동, 그것이 물질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문제를 보다 더 극명(克明)하게 세밀히 풀이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면, 물질은 하나의 염파(念波)에 불과하다 곧, 우리 생각의 파동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어렵게 말하면 '천지우주는 모두가 다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으로 이루어졌다' 는 말입니다.

산(山)이나 내(川)나 천지우주가 사람의 마음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면 처음에는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습니다.

우리 중생의 생각하는 힘인 업력(業力)이 쌓이고 모여서 전자(電子)가 되고 또는 양핵(陽核)이 되어서 천지우주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말씀을 다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은 물리, 화학적으로 증명한 것은 아니지요.

아무튼, 실상경계는 아까 말씀드린 진공묘유(眞空妙有)라, 원래 물질은 텅 비어서 없는 진공(眞空)이고, 다만 텅 비어서 없는 것이 아니나 묘유(妙有)라, 묘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추유(추有) 즉, 거치러운것 밖에는 못 봅니다.

우리 중생은 더러운 것 밖에는 못 봅니다. 참다운 묘유(妙有)는 못 봅니다.

우주의 실상은 진공인 동시에 바로 묘유입니다.

공(空)인 동시에 가(假)요,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기 때문에 중도(中道)입니다.

법신(法身)만도 아니고 보신(報身)만도 아니기 때문에 그야말로 참, 아미타불(阿彌陀佛)인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수행법이 있으나 그와 같은 실상묘법(實相妙法)으로, 비록 지금 내가 못 봤지만 '내 몸뚱이나 내 마음이나 천지우주 생명이나 모두가 다, 진공묘유(眞空妙有)구나' 반야심경식으로 하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구나' 조금 더 변증법적으로 말하면 '공, 가, 중(空假中)이구나' 여기다가 생명을 부여하면 그때는 '법신, 보신, 화신 아미타불이구나' 이렇게 납득하는 것이 우주만유의 본질, 실상을 알고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그 자리를 딱 짚어야 합니다.

그래가지고 참선도 하고 염불을 해야 공부가 가속도로 나아가집니다.

보적경(寶積經)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백천만겁 구습결업(百千萬劫 久習結業) 이실상관 즉개소멸(以實相觀 卽皆消滅)이라' 우리 중생은 누구나가 다 백천만겁 동안 익히고 쌓인 그런 업장이 있습니다.

미워하고 또는 사랑하고 또는 분별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업장들이 실상을 관찰하는 것으로써 즉 시에 다 소멸된다는 말입니다.

앞서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가 반야심경식으로 해서 공(空)을 관찰해도 무방하고, 화두(話頭)를 참구해서 의심해도 무방합니다.

또는 그냥 부처님의 이름만 외워도 무방합니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해도 무방합니다. 다 성불하는 법(法)입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길인 참선(參禪)식으로 하는 법은 우리 마음을 바로 실상(實相)에다 안주(安住)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선(禪)이 됩니다.

어느 특정적이거나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본체(本體)에 다가 마음을 딱 두어야 참선이란 말입니다.

비록 화두를 들고, 또는 공을 관한다 하더라도, 공이나 화두 그것이 실상을 대변하면 좋지마는 그냥 공에 치우치고 또는 상대적인 의심에 치우쳐 그것만이 다라고 하면 그때는 참선이 못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1. 참선(參禪)의 바른 길 IV

 

● 선오후수(先俉後修)

참선이란 선오후수(先梧後修)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것을 잘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선오후수라, 먼저 개념적으로 깨달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실상관(實相觀)이 우리 마음에 확연히 박혀야 합니다.

'다만 내가 업장에 가리워서 모를뿐, 내 본바탕, 천지우주 바탕은 실상묘유(實相妙有)요 진공묘유(眞空妙有)다. 이것은 색즉공(色卽空)이다. 변증적인 표현으로는 공, 가, 중(空假中)이다. 인격적인 표현은 법, 보, 화(法寶化) 삼신(三身) 아미타불이다. 또는 이러한 생명의 활력이 관세음보살이다' 이와 같이 파악을 해버려야 합니다.

그래가지고 공부를 해야 만이 백천만겁구습결업이, 백천만겁 동안 쌓이고 쌓인 그런 업장이라 하더라도 즉시 다 소멸한다는 말입니다.

보조(普照知訥) 1158-1210)국사의 보조법어(普照法語)에도 있는 말씀이고 규봉 종밀(圭峰宗密 780-841) 스님의 저서나 육조단경(六祖壇經)에도 있는 말씀입니다마는 '일상삼매, 일행삼매(一相三昧, 一行三昧)'라, 삼매(三昧)라는 것은 우리 마음을 정심에다가 안주(安住)시키는 것이 삼매인데 일상삼매(一相三昧)는 무엇인고 하면,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상, 오직 절대의 상, 이것이 일상삼매입니다.

천지우주는 오직 하나의 상 뿐이요 둘이지 않습니다.

법성게(法性偈)에서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라' 법성(法性)과 똑같은 뜻입니다.

법성은 다 원융해서 두 상이 없다는 뜻입니다.

천지우주는 오직 진리의 한 덩어리입니다.

다만 중생은 이것을 둘로 보고 셋으로 보고 구분할 뿐입니다.

이러한 법성(法性), 불성(佛性)에다 마음을 안주해 두어야 만이 우리 마음이 불성과 계합(契合)됩니다.

천지우주의 본바탕인 불성이 오직 하나이거니, 우리가 둘이나 셋으로 자꾸만 분별해서 보고, 다만 공(空)도 아니고 의심하는 것만도 아닌데, 공만 들이 보아 쌓고 의심만 들이하면 그때는, 우리 마음이 모든 진리를 다 원만하고 조화롭게 갖추고 있는 불성과 계합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일상삼매란 천지우주를 오로지 하나의 덩어리로 본다는 말입니다.

실상관(實相觀)은 천지우주를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로 보거니 어떻게 내가 있고 네가 있겠습니까, 둘로 볼 때에 벌써 거기에서 죄가 발생합니다.

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천지우주가 하나의 부처인데 둘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열(分裂)입니다.

제아무리 좋은 제도가 생기고, 제아무리 철학적인 어떠한 교설(敎說)이 생긴다 하더라도 진리의 본체를 둘로 보는 한(限)에는, 이런 인류 문화는 참다운 평화를 구가(謳歌)할 수가 없습니다.

본래 하나의 진리인데 둘로 보고 셋으로 보면 어떻게 우리 인류가 평화스럽게 되겠습니까, 일상삼매는 말씀마따나, 모든 존재의 뿌리를, 모든 존재를 하나로 보는 삼매라는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진공묘유(眞空妙有)로 본다는 말입니다.

또는 무량광명(無量光明)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아미타불의 풀이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고 무량수불(無量壽佛)이고 또는 청정광불(淸淨光佛)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로 보는 견해, 천지우주를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그런 견해를 안 끊히고 사뭇 이어가는 것이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천지우주를 한 덩어리로 보는 견해인 일상삼매(一相三昧)를 안 끊히고 사뭇 이어가는 것이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천지우주를 한 덩어리로 보는 그 견해는 일상삼매이고, 이러한 것을 간단(間斷)이 없이 계속하는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앞생각 뒷생각에 딴 잡된 생각이 안 끼이도록까지 사뭇 이어가는 것이 일행삼매입니다.

일상삼매, 일행삼매를 해야 만이 참다운 선(禪)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좀 어렵지만 꼭 일상삼매를 우리 생명과 같이 중요시해서 마음에다가 심어두셔야 합니다.

부처님 법문에 '심불상속고 부득결정신(心不相續故 不得決定信)이라' 우리가 딱 믿어서 후퇴없는 믿음이 필요한데, 그것에 결정신(決定信)인데, 우리가 어째서 결정코 변하지 않는 믿음인 결정신을 못 두는가 하면, 우리 마음이 자꾸만 간단(間斷)하기 때문입니다.

끊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심불상속고라, 마음이 상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일상삼매를 관하는 즉, 천지우주를 하나의 부처로 보는 견해를 계속시키지 못하니까 우리한테 결정신앙심이 안 생긴다는 말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1. 참선(參禪)의 바른 길 V

 

● 수행(修行)의 단계(段階)

수행의 단계로는 어려운 것도 많이 있습니다만 제일 간명(簡明)한 것이 사도(四道)입니다.

맨 처음에는 가행도(加行道)라, 우리는 지금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려고 이렇게 모여 있는 것입니다.

용맹정진의 별명이 가행정진(加行精進)입니다.

평소에 하던 공부를, 우리 수행을 더욱더 가속도로 증장 시킨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가행정진이나 용맹정진은 원래 똑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가행도(加行道)는 평소에 하는 공부에다 조금 더 우리 힘을 가해서 정진력을 더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가행정진을 하게 되는 셈 이지요.

가행도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가행도를 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무간도(無間道)가 옵니다.

가행도를 잘못 하면 무간도가 안 오겠지요.

무간도(無間道)는 무엇인가 하면, '천지우주가 청정미묘한 부처뿐이구나' 하는 생각이 사이없이 쭉 이어간다는 말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분명히 딴 생각은 전혀 안 나오는 무간도가 옵니다.

오직 부처님 생각으로, 천지우주가 하나로 딱 되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내 몸도 비고 천지가 비었다는 공관(空觀)을 억지로 안해도 자기 몸은 텅 비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간도가 되면 자기 몸에는 아무런 부담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몸이 터럭 하나의 무게도 없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오직 가행도를 애쓰고 나가므로써 그런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무간도를 거치면 필연적으로 우리 본자성(本自性)이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그때는 해탈도(解脫道)라, 불성을 견증(見證)하는 것입니다.

찬란스러운 내 본생명의 고장, 내 마음의 고향, 내 생명의 본 주인공을 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해탈도(解脫道)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벌써 업장을 다 벗어버리고 좋다, 궂다, 사랑한다, 밉다하는 것을 다 떠나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견성오도(見性悟道)합니다.

불성을 보고 도를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경지(究竟地) 성불(成佛)은 못됩니다.

비록 우리가 불성을 봤다 하더라도 아직은 습관성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습관성 곧 번뇌의 뿌리, 그것을 뽑으려면 또 승진도(勝進道)라, 해탈도에 입각해서 더욱 더 정진을 한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보임수행(保任修行)을 한다는 말입니다.

부처의 성품을 본 것을 잘 지키면서 또, 함부로 행동하면 안되니까 잘 닦고 닦으면 그때는 드디어 번뇌의 종자가 다, 뿌리가 뽑혀서 완전무결한 성불인 대각(大覺)의 자리가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행도, 무간도, 해탈도, 승진도 이것이 사도(四道)입니다.

우리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상삼매 일행삼매라, 천지우주가 하나의 부처덩어리인 것이요 천지우주는 실은 부처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간격이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여러분들이 공부하다가 자꾸만 되풀이 해야 합니다. 우주는 간격이 없는, 틈이 없는 하나의 부처 뿐입니다. 단지 중생이 잘못 봐서 간격을 세우고 구분을 세우고 차별을 세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일미평등(一味平等)한 불성(佛性)이라, 하나의 맛이고 평등한 불성뿐이라는 말입니다.

무명(無明)이란 무엇인가? 일미평등의 불성 곧 천지우주가 하나의 생명체인 불성임을 잘못 보는 것이 무명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실상(實相)자리, 실상묘유(實相妙有)자리, 우리 마음의 고향자리, 영원의 자기 주인공자리, 이 자리를 지켜서 일행삼매로서 가행정진을 해가지고서, 다시 다른 생각이 끼일 수 없도록까지 무간도(無間道)에 들어가야 합니다.

무간도에 들어가야 정말로 행복을 느낍니다. 무간도만 들어가면 마치저 열반(涅槃)에서 불어오는 맑은 청풍(淸風)이 자기를 엄습하는 그런 상쾌함과 표현할 수 없는 희락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희락지(喜樂地)요 또는 환희지(歡喜地)입니다.

무간도를 거쳐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우리 행복은 더 가증(加增)됩니다. 무간도만 들어가면 그때는 이제 순교(殉敎)나 생사(生死)에 대해서 자재(自在)로 하겠지요.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1. 참선(參禪)의 바른 길 VI

 

● 간절한 구도심(求道心)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과거 전생에 요법(樂法) 바라문이라, 법을 아주 간절히 구하는 바라문이셨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무불(無佛)시대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행복을 느낍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후세에 나와 부처님 법 가운데서 공부를 하니까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과 같은 그런 법이 없다고 하면 그야말로 이와 같이 혼돈무궤도(混沌無軌道)한 때는 참으로 곤혹을 느낄 것입니다.

지금 별것이 다 있지 않습니까, 마인드콘트룰(Mind control)이 있고, 무엇이 있고 해서 굉장히 복잡합니다.

불교 가운데도 여러 가지 행법(行法)이 많이 있습니다.

저번 불교 종교지를 보니까 일본 일련종(日蓮宗)의 한 종파인 창가학회(創價學會)의 교도 수가, 벌써 한국에서 가입되어 있는 것만 50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조직이 강해서 앞으로 더욱 더 교세가 강해지겠지요.

이런 혼돈 가운데서 바로 못 잡으면 우리가 공부도 바로 안되고 또 부처님의 소중한 불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역시 무불시대, 부처님 법이 안 나온 때보다는 훨썩 행복합니다.

그런데 요법(樂法) 바라문은 이제 부처님 법이 없는 무불시대에 나왔단 말입니다.

그러나 요법 바라문이 원래 선근(善根)에 따라서 간절히 도(道)를 구하고 싶었단 말입니다.

진리를 구하고 싶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렇게 오신 분들은 다 과거숙세(宿世) 무수생(無數生)의 선근 때문에 진리를 구하는 마음이 간절한 분들입니다.

그 와 마찬가지로 요법 바라문도 역시, 부처님 법도 없고 참다운 도(道)가 없어서 10년 이상이나 스승을 찾아 해맸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법을 일러주는 사람이 없거든요.

그리고 어느 때나 정도(正道)에는 마구니(魔)가 따릅니다.

깨달아버리면 마구니 역시 정도입니다마는, 깨닫기 전에는 역시 마구니가 따릅니다.

마구니가 이제 바라문으로, 바라문도 역시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마구니가 바라문 모양으로 변화해 가지고 요법 바라문 앞에 가서

"그대가 참말로 진리를 구하는가" 하니까

"그렇다" 고 한단 말입니다.

"그대가 정말로 그대의 신명(身命)을 바치고서 진리를 구하는가?"

"그렇다" 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바라문으로 변한 마구니가,

"그러면은 내가 진리의 한 귀절을 뎐을테니, 그대가 과연 그대의 피부를 벗겨서 종이를 삼고, 그대의 뼈를 분질러서 붓을 삼고, 그대의 피를 뽑아 먹을 삼아서 내가 읊으는 진리의 게송(偈頌)을, 진리의 귀절을 적을 수가 있는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요법 바라문이 "그야 쉽다" 고 말하자마자, 자기 피부를 벗겨서 햇볕에 말리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서는 조금도 주저할 수 없는 간절한 구도정신이 있었겠지요.

경(經)에서 그 대목을 보면, 요법 바라문이 그와 같이 자기 피부를 벗겨서 말리고, 무슨 말이 나오면 곧 적으려고 뼈를 분지르려 하니까, 마즉소멸(摩卽消滅)이라, 마구니는 간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구니라는 것은 우리 마음에 틈이 있어야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구니가 틈을 엿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틈이 없으면 마구니는 모양을 못 나투는 것입니다.

지성(지城)이면 감천(感天)이라, 그때에 저 공중에서 부처님의 낭낭한 음성이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찬란한 오색구름 가운데서 부처님의 낭낭한 음성이 무상대법(無上大法)을 설(說)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법' 바라문은 그 무상대법을 듣고서 대각(大覺)을 성취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상대도를 성취하고 무량중생을 제도한다' 는 서원(誓願)을 가지고 가행도(加行道)를 지나서 무간도(無間道)를 통과하고, 한사코 해탈도(解脫道)에 나아가서 승진도(勝進道)라, 그렇게 해서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시길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산승(山僧)의 법문을 마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2.참선(參禪)의 기초(基礎) I

 

● 선(禪)은 인류문화의 정수(精髓)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능력이 있는 한에는 완전무결한 모든 지혜를 다 알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인생고(人生苦)를 떠나서 완벽한 행복을 바라는 욕망도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자기 행동이나 자기 말이 모두가 다 합법적(合法的)인 즉, 도덕율(道德律)에 맞는 윤리행동을 취하고 싶은 욕망도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적인(眞) 면으로 보나 또는 선(善)으로 보나 또는 아름답다(美) 하는 우리 정서(情緖) 면으로 보나, 어떤 면으로 보나 완전무결한 행복을 취하는 욕구가 누구한테나 있습니다.

이것이 생각하는 동물인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인류의 문화유산 가운데서 최고의 문화유산, 최고의 문화 형태가 바로 선(禪)입니다.

또한 이러한 것을 성취할수 있는 가장 완벽한 가르침이 역시 선(禪)입니다.

그래서, 선(禪)을 문제시하는 셈입니다만, 선(禪)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굉장히 큰 문제입니다.

알고 보면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복잡한 문제는 아니지만, 지금 각 종파는 종파마다 선을 다르게 말하고 또 같은 종파에 속해 있는 스님네도 스님네마다, 자기들 개인 의견 따라 각기 선(禪)을 말하기 때문에 복잡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용맹정진 기간에 하루에 한번씩 해서, 한 열번 정도나 법문을 하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두번째 말씀드립니다만, 선(禪)의 잘못된 형태인 암증선(暗證禪) 곧, 어두운 가운데 암중모색(暗中摸索)하는 선이 될까봐 염려해서 제가 말씀을 한 번 더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역시 암증선을 하면 소득이 전혀 없습니다.

달마(菩提達磨 Bohidharma ?∼528) 스님께서도 인용했습니다만, 마치 모래를 삶아서 밥을 만드는 것과 같이, 모래가 밥이 될 수 있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한테 이익이 전혀 없습니다.

자칫하면 맹선(盲禪)이 된다는 말입니다.

자칫하면 또 야호선(野狐禪)이 됩니다.

자기가 도인도 아니면서 도인인 척합니다.

이래버리면 결국은 큰 탈입니다.

톨스토이(Tolstoi 1828∼1910) 말과 같이, 알고서 남을 지도하면 그것은 병이 안되고 도리어 인류의 복지가 되는 것이며, 모르고서 모르는 척 하는 것도 별로 해(害)는 안되지만,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남을 지도하는 것은 굉장히 큰 피해를 사회에 끼칩니다.

따라서 암증선은 그야말로 자칫하면 없는 것만 같지 못한, 없어야 할, 그러한 해독을 끼칩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염려하는 노파심에서, 제가 선(禪)을 많이 아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그래도 참선(參禪)에 몸을 담고서 근 40년 동안 지냈으니까, 부처님 말씀을 속임없이 그대로 전하고 싶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2.참선(參禪)의 기초(基礎) I I

 

● 선(禪)의 뜻

선(禪)…선나(禪那:Dhyana) 기악(棄惡), 공덕총림(功德叢林), 사유수(思惟修) 정려(靜慮) 또는 삼매(三昧)라고도 풀이함.

 

선(禪)은 인도(印度) 말인 범어(梵語)로 하면 드하나(Dhyana)라고 합니다.

한문으로 음역(音譯)하면 선나(禪那)라 하고, 일본사람들은 '젠나'의 '나'를 생략하여 그냥 '젠' 이라고 합니다.

선에 관한 책이 굉장히 많이 나왔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스님네 뿐만 아니라 스님네 아닌 분들도 선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선을 지도하는 분도 상당히 많습니다.

우리 사부대중들도 곧 한 발 나가서 선에 대해 말씀이 되면 또 여러 가지로 구구한 말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에 대해서 혼미(混迷)를 느끼지 않으시도록 하기 위해서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선(禪)을 뜻으로 풀이하면, 기악(棄惡)이라, 악을 버린다는 말입니다.

선(禪)을 행하면 악을 버리고 나쁜 짓을 자연적으로 안 한다는 말입니다.

선을 닦으면 자연적으로 몸도 마음도 정화되어서 나쁜 짓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 총(叢)은 떨기총으로, 무더기로 많이 있다는 뜻이지요.

공덕이 부지기수로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공덕이 하나 둘이 아니라 마치 숲 모양으로 한도 끝도 없이 많은 것이 공덕총림입니다.

곧, 선을 닦으면 삼명육통(三明六通)이 된다는 말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다 아는 것이고, 자기 번뇌를 다, 마지막 끊어 버리는 신통(神通)도 얻고, 천지우주를 두루 통관하는 안목도 얻고, 우주만유의 모든 음성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청각도 얻고, 또는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통도 얻고 아무튼, 그와 같이 모두를 알 수 있고, 모두를 할 수 있는 그러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이 공덕총림 입니다.

이것이 모두가 선으로부터 나옵니다.

지금 우리같은 수행자들이 그런 신통을 못하는 것은 선을 많이 못 닦아서 입니다.

많이 닦으면 삼명육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나 그 뒤에 위대한 조사(祖師) 스님들이나 정평있는 도인들은 다 하셨습니다.

따라서, 선은 공덕총림이라, 공덕이 수풀같이 많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사유수(思惟修)라, 생각해서 닦는다는 말입니다.

생각을 골똘히 일념(一念)으로 모아서 닦는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정려(靜慮)라, 고요히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선을 닦을 때는 반드시 한거정처(閑居靜處)라, 고요한 곳에서 고요한 분위기를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선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특히 부엌에서 공양를 지으시는 분들은 입선(入禪) 시간만은 벙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자기도 공부가 되고 또한 선방(禪房)에서도 공부를 할 수가 있습니다.

또는,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삼매(三昧 Samadhi) 라고도 합니다.

삼매와 선(禪)을 달리 풀이한 분도 있고 또는 같이 풀이한 분도 있습니다만, 별로 큰 차이는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전문적인 시간이 아니고 상식적인 시간이니까, 제가 같이 쓰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선(禪)은 우리 지혜나 덕성(德性)이나 정서나 모두를 다 조화롭게 성취하는 우리 인격완성의 가장 최고도의 방법인데, 풀이한다면 위와 같은 풀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선을 닦으면 자연적으로 우리 생리(生理)나 심리(心理)가 정화(淨化) 되어서 악을 범(犯)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선을 많이 했다고 하는 분들이 음식도 함부로 먹고 계행을 함부로 파계(破戒)하는 것은 참선을 많이 못한 증거입니다.

참선을 많이 했다 하면 응당, 계행은 지켜야 하고 그때는 또, 저절로 지켜지는 것입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 우리 인간의 인격완성을 하기 위해서 뛰어 넘을 단계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인데, 참선을 많이 했다하면 이런 삼계(三界)를 다 초월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월하는 과정에서 제일 하단계(下段階) 곧, 제일 밑이 욕계(欲界)인데, 욕계란 무엇인가?

욕계는 음식욕(食欲) 또는 이성욕(異性慾) 또는 잠욕(睡眠慾) 등 욕심의 세계이지요.

그런데 참선하는 분들이 욕계번뇌를 미처 못 떼었다 하면 말이 안되지요.

참선할 때는 응당 우리생리나 심리가 정화가 됩니다.

따라서 파계를 할 래야 할 수가 없다는 말 입니다.

이러한 무량공덕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성도하실 때나 또는 열반에 드실 때나, 선(禪)에 들었고 그 뒤의 어떤 도인도 이러한 선(禪)이 없이 견성오도한 분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역시 인격을 완성하고 자기 마음의 고향을 찾아 번뇌를 여의고서 최상의 영생 행복을 얻으려면 꼭 선(禪)을 거쳐야 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2.참선(參禪)의 기초(基礎) I I I

 

● 선(禪)의 종류(種類)

그러면 선에는 어떠한 선이 있는가? 선(禪)의 종류(種類) 문제입니다.

지금 "선" "젠" 이것은 비단 불교에서만 말하지 않습니다.

힌두교(Hi-ndu敎)의 요가법(yoga法)에서도 선을 말했습니다.

또한 불교도 아닌 다른 종교에서도 역시, 말은 좀 달리 한다 하더라도, 선을 말했습니다.

명상법(暝想法)이나, 또는 도교(道敎)에서의 태식법(胎息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선이라 하는 것을 이름은 달리한다 하더라도 거의 비슷비슷한 형태로 해서 다 말씀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종류를 알아야 만이 선 가운데서 가장 최선의 선(禪)인 부처님 정통선(正統禪)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외도선(外道禪)이라, 외도가 닦는 선이라는 말입니다.

외도(外道)는 불도(佛道) 즉 부처님 가르침 외에 다른 가르침이 외도(外道)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외도(外道)와 정도(正道)는 무근 차이가 있는가?

이것을 또 우리가 알아야 하겠지요.

정도(正道)는 일체 만법(萬法)을 다 자기 마음의 소저(所造)로 봅니다.

일체 만법을 다 자기 마음 안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부처나 극락이나 또는 천체 우주 전부를 다 자기 마음 안으로 봅니다.

반대로 외도(外道)는 자기 마음 밖에 법(法)을 두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일체를 일원적(一元的)으로 안 보고서 이원적(二元的)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과 물질이 별도로 있다' 하는 것은 역시 외도입니다.

마음 밖에 물질이 있다면 벌써 외도입니다.

마음 밖에 태양이 있다는 것도, 내 마음 밖에 네가 있다고 하는 것도 외도입니다.

불법은 오직 한마음이요, 한마음 속에 천지우주를 다 넣어 버려야 정도입니다.

마음 밖에 도를 구하면 외도고 일체를 마음 안에서 구하면 정도입니다.

이런 것은 꼭 마음에 다 명심하여야 합니다.

이런 것이 어째서 그러는가? 이제 설명을 좀 하겠습니다.

외도선(外道禪) : 인과(因果)를 불신(不信)하고 유루공덕(有漏功德)을 위하여 닦음

외도선(外道禪)은 인과(因果)를 불신(不信)하는 것입니다.

인과를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선(善)을 행하면 반드시 선(善)의 과보로 해서 락(樂)의 보(報)가 있고, 악(惡)을 행하면 악의 과보로 해서 나쁜 고(苦)가 있고, 또 도업(道業)을 닦으면 그 과보로 성불(成佛)이 있다고 하는 이러한, 인과(因果)를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유루공덕(有漏功德)이라, 루(漏)는 샐 루자로 번뇌나 때라는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따라서 유루라는 것은 번뇌가 있다는 것이지요, 번뇌가 있는 그런 공덕을 위해서 닦는 것입니다.

가사,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다" "남한테 대우를 받고 싶다" 또는 "무슨 재주를 부리고 싶다" "오행에 통해서 무슨 술법을 하고 싶다" 이런 등등의 것이 유루공덕입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면 해탈을 구하지 않고 즉, 자기라는 개성의 망아(忘我), 망령된 나를 버리고 해탈한다 하는 해탈을 구하지 않고서, 무엇인가 자기 이익만을 구하는 공덕, 그것이 유루공덕입니다.

따라서, 가사 우리가 불공(佛供)을 모신다 하더라도, 불공 모시면서 자기 집안의 여러가지 운수도 좋은 방향으로 나가기를 바라지마는, 성불을 바라는 마음이 꼭 깃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유루공덕이 안됩니다.

인과를 믿지 않고서 그러한 때묻은 공덕을 구해서 닦는 것이 외도선 입니다.

범부선(凡夫禪) : 인과(因果)를 신(信)하고 유위공덕(有爲功德)을 위하여 닦음.

그 다음은 범부선(凡夫禪)이라, 범부(凡夫)란 성인(聖人)과 상대해서 하는 말 아닙니까,

우리가 모두 성인이 못되었으면 범부 아닙니까,

인과(因果)를 믿고 불법을 믿는 가운데서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사람이 범부입니다.

범부는 불법을 안 믿는 사람은 제외합니다.

불법을 믿는 가운데서 아직 성도(成道) 즉,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해서 성자가 못된 때가 범부입니다.

범부선은 무엇인고 하면, 인과는 믿지마는, 또 역시 유위공덕(有爲功德)이라, 이것도 유루공덕이나 대략 같은 뜻으로 풀이가 됩니다.

다만 번뇌가 유루에 비해서 약간 적은 그런 음영(陰影) 즉, 소위 말하는 뉘앙스(nuance)가 있겠지요.

인과를 믿지마는 아직은 번뇌를 못 떼어버린 공덕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범부인지라, 다만 번뇌를 못 떼어버린 범부니까 재수 바라고 운수 바라고, 시험에 합격도 바라고 그런 것을 희구하겠지요.

이런것은 아직은 범부선으로 범부가 하는 공부에 불과합니다.

소승선(小乘禪) : 아공(我空)을 신(信)하고 해탈(解脫)을 위하여 닦음.

그 다음은 소승선(小乘禪) 이라, 도인(道人)도 역시 지위가 있는 것입니다.

범부를 넘어서 도인 지위에는 올라갔지만, 대승과 소승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소승선은 아공(我空)을 신(信)하고 즉, '나' 라는 것이 비었다는 것을 믿고, 해탈(解脫)을 위해서 닦는 선입니다.

자기 재수나 운수를 생각하는 정도는 넘어버려서, 벌써 내가 비었다하고, 아상(我相)을 넘으니까 그때는 그런 섣부른, 어중뙨 어떤 것은 바라지 않겠지요.

그러나 이 아공(我空)을 즉, 내가 비었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불교가 들어가기도 어렵지마는 정작 목적을 이루기는 참으로 어렵고 오랜 길입니다.

그러나 참선(參禪)만 바로 닦으면, 그때는 비약적으로 쉬운 길입니다.

왜 내가 비었는가?

우리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임시간 모아진 세포에 불과합니다.

다시 현대적으로 말하면 산소, 수소, 탄소, 질소 등 여러 원소가 그때그때 우리 업(業) 따라서, 업의 에너지(energy) 기운 따라서, 이렇게 임시간 모여있습니다.

즉 불교에서 말하면 인연생(因緣生)이라, 각 원소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여 있다는 말 입니다.

그리고 인연이 다 하면 그때는 흩어지고 맙니다.

텅 빈 들 가운데다 집을 하나 짓는다고 하면, 집을 짓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지요.

집을 지었다가 필요 없어 뜯어버리면 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는 존재가 부모님이 계시기 전에 어디에 있었습니까, 내가 생겨나기 전에는 우리가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모습은 절대로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가 없다가 무수한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런 몸이 되었습니다.

마치 들 가운데다 집 한 채 지었다가 집을 뜯어버리면 아무 것도 없듯이 그와 똑같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이런 모양은 다시 없습니다.

죽어지면 또 다른 모양으로 태어나겠지요.

십 년 뒤에 지금 이런 모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공(我空)을 신(信)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만 꼭 그래야 만이 공부가 됩니다.

나(我)란 사실은 비어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무엇인가?

내 마음은 불교말로 해서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 우리가 감수(感受)하고, 상상(想像)하고, 의욕(意慾)하고, 분별(分別)하고, 이런 부스러기가 모여서 내 마음이 되었습니다.

물론 마음의 본체는 부처이지만, 우선 내가 쓰는 이 마음은 본체인 부처마음에다가 금생에 나와서 감수하고, 상상하고, 의욕하고, 또는 분별시비하고 이런 부스러기가 모여서 내 마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떠나서 내 마음은 없습니다.

내 몸도 각 세포가 잠시간 모여 있고 내 마음도 역시 감수, 상상 또는 의혹, 분별시비 하는 이런 것이 모여 있기 때문에 이것을 떠나서는 내 몸이나 마음이 없습니다.

불교말로 하면 인연가화합고(因緣假和合故)로 즉공(卽空)이라, 인연으로 잠시간 화합하였기 때문에 즉시 공이라는 말입니다.

인연이 잠시간 화합되어서 그때그때 순간순간 변화해 갑니다.

이 몸은 1초 전과 1초 후가 똑같지가 않습니다.

우리 중생은 바로 못 봐서 그런 것이지, 우리 세포는 1초 전과 1초 후가 똑같지가 않습니다.

그냥 변화되어 갑니다.

내 마음도 역시 조금 전의 마음과 지금 마음이 똑같지가 않습니다.

오직 한결 된 마음은 도인이 되어야 비로소 한결 됩니다.

그래야 변치 않는 영생에 안주하여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이, 나란 것이 허망한 것이니까, 내가 공 하다는 것을 믿고서 해탈을 위해서 닦는 것이 소승선(小乘禪)입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벌써 도인(道人) 지위입니다.

내가 없음을 깨달으면 벌써 도인입니다.

우리 번뇌의 종자는 못 끊었다 하더라도 내가 없음을 느끼면 그때는 벌써 도인입니다.

그냥 느낌이 아니라 체험으로 느껴 깨친다는 말입니다.

대승선(大乘禪) : 아공(我空) 및 법공(法空)을 신(信)하고 해탈(解脫)을 위하여 닦음.

그 다음은 대승선(大乘禪)이라, 이것은 아공(我空) 및 법공(法空)을 믿는 것입니다.

내 몸이 나 마음을 구성하는 것도 공(空)이지만, 일체만법(一切萬法) 즉, 산이나 들이나 또는 태양이나 별이나 천체나, 남이나 나나 일체 법이 다 비었다는 법공(法空)을 믿는 것입니다.

소승들은 내가 비어 있는 것을 느낀다 하더라도 일체 법이 비었다는 줄은 모릅니다.

그러나 대승은 일체만법이 비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가현각(永嘉玄覺 647∼713) 스님도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라" 깨달은 뒤에는 삼천대천 세계가 다 텅 비어 있다고 했던 것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아(我)도 공(空)이요 또 일체만법도 공(空)이란 것을 말씀한 법문입니다.

금강경(金剛經) 또한, 나도 공이요 일체만법이 공인 것을 해설한 경전입니다.

불교 공부는 내가 원래 비어 있고 우주 전부가 비었다는 것을 모르면은 잘 안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선도 역시 우리가 화두를 드나 염불을 하나 이와 같이 아공, 법공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망상이 잘 끊어집니다.

망상(妄想)은 무엇인가?

좋다 궂다 하는 그런 망상은 어디서 연원(淵源)되는고 하면, 그런 것은 모두가 '네가 있다 내가 있다 또는 만법(萬法)이 있다' 고 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내가 없고 네가 없어 보십시요.

또 천지 만물이 텅 비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무슨 망상이 나오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번뇌를 녹일 때는 반드시 이와 같이 공(空)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반야심경을 외우는 것이 그런 소이(所以) 아닙니까,

반야심경은 어떤 불사(佛事)에나 외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체만법이 원래 비었기에 그러는 것입니다.

또 번뇌를 녹이기 위해서는 그와 같이 빈 마음으로 다 놓아 버려야 만이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조주(趙州 778∼897) 스님한테 엄양(嚴陽) 스님이란 분이 가서 "한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어떻게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참선에서는 한 물건도 가지지 말라는 것이거든요.

그것은 물질적인 물건보다도 우리 마음으로 시(是)야, 비(非)야, 좋다, 궂다, 이쁘다, 밉다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물으니까 조주 스님께서 말씀이 "놔 버려라, 방하착(放下着)하라" 하니까 그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한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무엇을 놓을 것입니까?" 가지고 있어야 놓을 것인데, 가지고 있는 것이 없는데 무엇을 새삼스럽게 놓을 것입니까?

그러니까 조주 스님께서 "그러면 지고 가거라" 하셨습니다.

선문답(禪問答)은 이같이 아주, 그야말로 참, 절실하고 직절(直截)한 것입니다.

세상에 한 물건도 없는데 말입니다.

조주스님한테 묻는 그 사람은 한 물건도 없다는 거기에 집착했던 것입니다.

있고 없는 그러한 자리를 떠나기 위해서 이런 법문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여러분들이 앞으로 음미해보시면 되겠습니다만, 아무튼, 우리는 먼저 천지우주가 텅텅 비어 있다는 소식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 눈앞에 아무 것도 없지는 않지만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가짜고, 앞서 시간에 말씀한 바와 같이,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중생의 망념으로 보아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괴로워하는 것은 자기가 잘못 보고, 자기의 망념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나쁘고 좋은 것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은 범부의 지위에서, 자기가 잘못 봐서, 잘못 본 그것 가지고 스스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최상승선(最上乘禪) : 이것은 가장 높고 수승 한 참선이라는 말 함.

그 다음 다섯번째는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이것은 가장 높고 수승한 참선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문제로 할 것은 최상승선입니다.

우리가 아직은 저급하고 비록 대승, 소승의 성자(聖者)라 하더라도 아직 부족한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문제시 할 것은 역시 가장 최고의 선, 최상승선을 문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최상승선(最上乘禪) 가지고서 씨름하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인고 하면,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을 말합니다.

어떤 분별하기 좋아하는 분들은 여래선은 밑에 있고 조사선은 위에가 있다고 합니다만 실은, 그렇게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에서 미루어 보나, 그 뒤에 정통 도인 말씀을 미루어 보면 이것은 둘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인 것입니다.

단지 그런 가운데서 지적(知的)인 면은 여래선에 해당하고, 또 리적(理的)인 면, 본체적(本體的)인 체적(體的)인 면은 조사선에 해당한다고 비유해 볼 수 있는 정도입니다.

이런 문제는 전문적인 문제니까 이것을 연구할 분들은 연구하시고 우선은 그러한 줄만 대강 알으시면 됩니다.

따라서, 가장 높은 선은 어떤 것인고 하면, 본래 부처로서, 일체 무루공덕(無漏功德), 번뇌가 없는 공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음을 확실히 믿고서 닦는 선입니다.

우리는 지금 번뇌(煩惱)에 결박(結縛)되어 있습니다마는 부처의 안목에서 본다면 본뇌에 결박된 그대로 부처입니다.

최상승선을 닦는 분들은 그것을 잘 느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못 나고 못 생기고 남도 미워하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번뇌로 묶여있는 채로, 우리가 보면 범부라 하더라고, 부처의 청정한 눈으로 보면 똑같은 부처입니다.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할 때는 짐짓코 일부러 중생의 근(根)을 빌려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려 안 쓰고 부처의 안목 그대로 보면 다 부처뿐 입니다.

그 한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닦은 뒤에 부처가 아니라 번뇌가 구족한, 번뇌가 있는 그대로가 바로 보면 다 부처입니다.

'내가 지금 구박(具縛)되어 있지마는, 번뇌에 묶여 있지마는 바로 본래 부처니까, 나한테는 석가모니나 어떤 부처님이나 도인들이나 그분들과 똑같이 일체 공덕을 다 갖추고 있다' 고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도인이 된 셈 치고 닦아야 합니다.

그래야 최상승선인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무슨 허물이 있다. 내가 잘못했다. 참회해야 하겠다' 그런 것은 마땅히 해야하지만, 그것은 아직은 높은 단계는 못됩니다.

과거는 다 잊어버리고, 오직 나한테 갖추고 있는 불심(佛心)만 문제로 해서 '내가 본래 부처인데' 하고, 아만을 부리면 안됩니다만, 부처가 된 셈치고 닦아야 최상승선인 것입니다.

나도 비고 천지도 비었으니까 역시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기에 있는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우리가 꼭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입각해서 내가 부처임을, 즉 아공, 법공으로 해서 다 비었지만 또 다만 빈 것이 아니라 부처와 똑같이 무량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최상승선을 문제로 하여 닦도록 하십시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2.참선(參禪)의 기초(基礎) IV

 

● 선(禪)의 방법(方法)

1. 공안선(公案禪) 화두선(話頭禪) … 참구적(參究的)

2, 묵조선(默照禪) … 의지적(意志的)

3. 염불선(念佛禪) … 지, 정, 의(知, 情, 意)의 조화적(調和的)

 

선(禪)에는 어떤 방법이 있는가?

선의 방법으로 공안선(公案禪)이라, 공안은 화두(話頭)와 똑같은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드는 "무자(無字)" 화두나 "판때기 이빨에서 털 나온다(板齒生毛)"는 화두나 또는 "뜰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라는 그런 화두나, 또는 "이 뭐꼬?(是甚마)" 라 하는 즉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밝기는 해(日) 보다 밝고 검기는 칠보다 검고 항시 내가 움직이는 가운데 있으되 거두어 얻지 못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有一物 明如日 黑似漆 常在動用中 動用中收不得者 是甚마)" 하는 이러한, 나의 본질을 구하는 화두, 그러한 문제를 우리가 의심하면서 닦는 선법이라는 말입니다.

이것도 역시 최고 상승선, 가장 높은 선에 속합니다.

따라서 이것도 성불에 가까운 길이지요.

그러나 이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이것은 최고 선의 하나의 방법일 뿐입니다.

어떤 분들은, 어느 훌륭한 스님한테 자기 근기에 맞는 화두를 탄다고 합니다.

"나한테는 무슨 화두가 좋습니까" 해서 화두를 탑니다.

그런데, 화두를 주시는 분이 그 사람 근기를 잘 아시는 분 같으면 좋은데, 모르시는 분은 엉뚱한 화두를 주어 놓으면 곤란하겠지요.

부처님 법이란, 어떠한 법이나 끄트머리 궁극은 다 불법인지라, 종단(終端)에는 다 불법에 가는지라, 무슨 법이나 안 쉬고 가면 다 갈 수가 있습니다.

산(山)으로 가는 길은 많아서 동(東)으로 가나 서(西)로 가나 조금 험준한 길이 있다 하더라도 안 쉬고 가면 산 봉우리로 올라가듯이, 부처님 법은 무슨 법이나 안 쉬고 가면 다 성불되고 맙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자기 근기에 안 맞으면 그때는 조금 터덕거립니다.

따라서 우리가 화두를 받을 때는 자기 근기를 알 수 있는 분한테 꼭 알맞는 법을 받아야 만이 자기 인생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안선, 화두선에서 의심하는 것은 오직 근본문제, 우주 근원 문제, 내 본질의 문제, 내 자성의 문제를 의심하겠지만, 의심하는 것은 꽤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 사람의 심리활동 가운데서 믿는 마음은 마음이 편하고 의심하는 마음은 굉장히 괴로운 것입니다.

그 의심도 한번 두번하고 하루 이틀 하면 모르지만, 한달 이나 몇 년 이나 한다고 하면 상당히 괴롭습니다.

특히 우리같이 출가한 사람들은 또 모르거니와 재가불자로서, 집안에 계신 분들로서 사업도 하고 또는 여러 가지 가정적인 일을 보시는 분들이 의심하는 버릇만 자꾸 붙여 놓으면 자칫하면 남도 의심하게 되는 것 입니다.

또 공부란 것은 항시 안 쉬고 해야 할 것인데 의심만 자꾸 하면 자기 사업도 하기가 곤란스럽습니다.

그런 불편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의심하는 이것은 역시 최상승선으로 가장 좋은 선(禪)의 하나의 방법은 되겠지만, 선방에서 오로지 하시는 분들은 하기가 좋아도 일상적인 생활불교로서는 조금 불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처님한테 오로지 바쳐버리는 마음이 의심하는 수행법을 취하면 그때는 조금 감소가 됩니다.

따라서, 지적(知的)인 분들은 참구하는 화두가 무방하다 하더라도, 부처님한테 모두를 의지하는 오로지 신앙적인 분들은 조금 마음에 저항을 느낍니다.

즉 말하자면 우리 정서(情緖)가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 다음은 묵조선(默照禪)이라, 이것은 화두가 없이 그냥 앉아서 자기 마음을 비춰보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도 설정하지 않습니다.

묵조선을 하는 분들은 대체로 단전주(丹田住)라, 아랫배에 힘을 두고서 공부를 합니다.

원불교에 가서 보면, 저도 거기에서 한 철을 공부했습니다만, 아무 문제가 없이 아랫배 단전에다 힘주고서 공부를 합니다.

그러면 원래 부처인지라 결국은 부처가 될 거라고 합니다.

이것도 역시 각 도인들이 한 선법(禪法)입니다.

화두선도 위대한 도인들이 많이 나왔으나 묵조하는 선도 역시 위대한 도인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아무튼, 안 쉬고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볼 때에 성불의 길이 그냥 쉽게 몰록 된다면 쉽지마는, 며칠이나 몇 달에 안되고 또 몇 년에 안되는 경우에는 싫증을 냅니다.

또 우리가 부처까지 올라가는 길은 상당히 먼 길입니다.

"파딱하면 되어 버린다, 당하(當下)에 개오(開悟)라, 말 한 마디에 그냥 다 깨달아버린다"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물론 근기가 상근기가 되는 분들은 말 한마디로 깨달을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보통은 다 오랜 시일과 오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아무 문제가 없이 가만히 앉아서 닦는 선은 공부가 잘 안 나아가 집니다.

물론 호흡법도 하고 잘 되어 가지고서 정화되면 되겠습니다만, 묵조선(默照禪)은 어느 특수인 한테는 상당히 좋은 선법이나 일반적으로 누구나가 하기는 어렵고 싫증을 내기가 쉽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염불선(念佛禪)이라. 우리는 염불선과 그냥 염불과의 구분을 해야 합니다.

구분 잘못 하면 이것도 혼동되어 버립니다.

지금, 어느 큰스님들 말씀도 "염불은 그저 하근기(下根機) 중생이 한다. 염불은 근기 낮은 분이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말씀을 들은 분들은 '염불이 무슨 선(禪)이랴' 이렇게 또 말씀합니다.

그런데서 그냥 일반 염불과 염불선의 한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와 같이 말하는 보통 염불은 부처를 자기 밖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또 극락세계를 자기 밖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성(自性), 자기 마음의 본질이 부처고 또는 우주가 바로 부처요. 우주가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우리 마음이 미혹(迷惑)되면 천지우주가 바로 고생이 충만한 사바세계(娑婆世界)입니다만 우리 마음 깨달으면 사바세계가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누른 안경을 쓰고 보면 다 누렇게 보이듯이 미혹된 범부중생의 눈으로 보면 사바세계요 극락을 볼 수 있는 부처의 안목으로 본다고 하면 그때는 다 극락세계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이라 하는 업장이 가린, 탐, 진, 치(貪瞋痴) 삼독심(三毒心)에 가린 안목으로 보는 것이니까 극락으로 안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를 자기 마음 밖에서 구하고, 극락을 자기 마음 밖의 저만치 십만억 국토 밖에서 구하는 염불은 방편염불(方便念佛)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염불은 방편염불입니다. 진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염불이 바로 염불선(念佛禪)인데, 이것은 "자기 마음의 본바탕이,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다 또한 동시에 우주가 바로 부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는 염불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참선이 무엇인가, 참선은 바로 내 부처를 구합니다.

천지우주 만유가 바로 부처인것을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면서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을 선(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염불은 바로 선(禪)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편적으로 하는 즉, 자기 마음 밖에서 부처와 극락을 구하는 식이 아니고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다. 내 마음의 본바탕이 부처다"고 확실히 느끼고서 "극락 또한 내 마음 속에 있다" 이렇게 느끼고서 하는 염불은 염불선(念佛禪)입니다.

묵조선(默照禪)은 주로 의지적(意志的)이라, 단전주할 때는 의지가 강하지 않으면 못합니다.

따라서 의지가 강한 쪽으로 수승한 선이고, 화두선(話頭禪)은 지적(知的)으로 참구하기 좋아하는 분들에게 적합한 지적으로 수승한 선인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하나의 원리나 이치가 아니가 생명이기 때문에, 일체 공덕을 다 갖춘 생명이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인격이기 때문에, 부처님을 하나의 생명으로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의 영원적인 님도 구하고 또는 사랑도 구하고 하듯이 말입니다.

부처님은 사랑가운데 사랑이요, 님 가운데 님입니다.

일체만유의 님이요, 평생 우리가 닦다가 종국에는 돌아가야 할 필경의 의지처, 이것이 부처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부처님을 참다운 님의 님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만 지적(知的)이나 의적(意的)에 그치지 않고 우리 인간 심리의 모두인 지(知)와 정(情)과 의(意)를 모두 조화적(調和的)으로 구하는 선법이 염불선입니다.

우리 마음으로 만족을 못 취하고 우리 마음이 안심이 못되면 공부를 오래 못합니다.

싫증나서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자기 님의 님으로 구하는 선법, 이것은 벌써 우리 감성이 만족한지라 구하면 구할수록 더 그립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사부대중께서 하는 이런 선법 저런 선법 다 좋습니다.

또 해보면 다 그만치 거기에 따른 재미가 있습니다.

도인들이 제시한 법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이렇게 불안스러운 때, 가정생활로 해서 여러 가지 액난이 많은 때, 또는 항시 어느 때나 누구나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염불선(念佛禪)은 좋습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인지라 사람을 봐도 부처요 개를 봐도 부처입니다.

어떤 때나 부처로 생각해도 손해가 없습니다.

가장 좋은 생각, 가장 좋은 행동, 가장 좋은 말이 부처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손님한테 대해서 부처라고 생각해 보십시요.

인상이 좋아져서 그냥 장사가 흥왕합니다.

부처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가장 옳은 생각이므로 옳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 장사나 무엇이나 어떤 분야나 다 우리가 성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염불선(念佛禪)은 어떤 때나 할 수가 있고 누구나 하기 쉽고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가장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부처님 경전 가운데 200부 이상에서 염불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앞서 말씀한 바와 같이 어느 선법(禪法)으로 하더라도, 이미 힘을 얻은 분들은 좋지요.

그러나 아직 그런 선으로 해서 힘을 얻지 못한 분들은 이런 것을 느껴서 염불선을 하시는 것이 가장 합당합니다.

또 어떤 염불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내 자성(自性)인 동시에 우주의 본체인 부처님의 대명사가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아미타불에 귀의한다고 할 때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입니다.

아미타불이 우리 중생을 구제하는 면에서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입니다.

다 똑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수 보살(文殊菩薩), 보현 보살(菩賢菩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부처님 인데 다만, 중생을 교화하는 공덕(功德) 면에서 이름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중생을 교화하는 면에서 중생을 자비로 제도하는 면에서 관세음보살이고, 또 지혜로운 면에서 문수 보살, 대세지 보살입니다.

우리 영혼을 천도하는 면에서는 지장 보살(地藏菩薩)이고 말입니다.

하지만 모두 다 하나의 부처님입니다.

공부하는 분들은 주문을 외우나 화두를 하나 나름대로 공부가 되면 재미를 느낍니다.

따라서 자기가 하는 공부법 만이 제일 좋다고 합니다.

재미를 봤으니까 말입니다.

그러기에 고집을 부립니다.

그 공부에 대해서 어느 정도 득력(得力)을 좀 해놔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제일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벌써 한 고비를 넘어버리면 하나인지라 상관이 없지만 고비를 넘도록 까지는 어렵습니다.

다시 말하면 희락(喜樂)이라, 희락은 기쁨을 맛보는 것이지요, 우리 중생의 삿된 그러한 고통을 떠나서 영생에서 오는 희락을 맛본 뒤에는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미처 거기까지 이를 때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행법 가운데 희락(喜樂)에 이르기까지 하기 쉬운 것이 곧, 염불선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2.참선(參禪)의 기초(基礎) V

 

● 선(禪)의 자세(姿勢)

일상삼매(一相三昧) … 여묘포서(如猫捕鼠)

일행삼매(一行三昧) … 여계포란(如鷄抱卵)

 

그러면, 참선하는 자세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참선은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로써 해야 합니다.

일상삼매(一相三昧)는 무엇인가?

비유하면 여묘포서(如猫捕鼠)라,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는 한눈을 팔지 않습니다.

쥐란 놈이 하도 재빠르니까 한눈을 팔면 쥐를 놓쳐 버립니다.

따라서 마치 고양이가 한눈도 팔지 않고 쥐를 노려보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이, "내가 부처요, 천지가 바로 부처라" 는 그 마음을 잠시도 놓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고양이가 쥐를 노리듯이 오로지 거기에다 마음을 안주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식이 일상삼매입니다.

일행삼매(一行三昧)는 여계포란(如鷄抱卵)이라. 마치 어미 닭이 계란을 품듯이 하는 것입니다.

어미 닭이 계란을 품으면서 파뜩파뜩 함부로 경망하면 계란이 부화가 되어 닭이 되겠습니까? 어미 닭이 계란을 품을때는 오랫동안 참고서 품어야 만이 닭이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비록 우리가 지금 천지우주를 부처라고 본다고 한다하더라도 우리가 아직 진짜 부처는 다 못된지라, 진짜 부처가 될 려면 "내가 부처요, 천지 우주가 부처인 것" 을 항시 느껴야 합니다.

항시 느끼고 있으면, 그때는 우리 마음 가운데 번뇌가 녹아져서 자연적으로 부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은 마치 닭이 계란을 품듯이 오랫동안 염불하고 염불하고 또는 화두들고 화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일행삼매 입니다. 이렇게 해서 공부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기왕 선(禪)을 시작하신 것이니까 선 가운데 최고 상승선(上乘禪)을 하되 그 가운데, 공안, 화두를 드는 선도 있고 또는 묵조하는 선도 있고 또는 염불하는 선도 있는 것인데, 그 가운데서 우리가 간택(簡擇)하면 됩니다.

화두 드는 선은 참구적으로 좋고, 묵조는 의지 쪽으로 좋고, 염불하는 선은 지와 정과 의가 다 조화된 선이라는 것을 생각 하면서 골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2.참선(參禪)의 기초(基礎) VI

 

● 선정(禪定)의 십종공덕(十種功德)

 

1. 안주의식(安住儀式) 2. 행자경계(行慈境界)

3. 무번뇌(無煩惱) 4. 수호제근(守護諸根)

5. 무식희락(無食喜樂) 6. 원리애욕(遠離愛慾)

7. 수선불공(修禪不空) 8. 해탈마견(解脫魔견)

9. 안주불경(安住佛境) 10. 해탈성숙(解脫成熟)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 七)

 

 

여기에는 돌아가셔서 선을 지도할 만한 선생님도 계시는 모양이니까 선(禪)의 공덕에 대해서 대강 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선이 자기 성취의 최상의 길입니다만 또한 구체화 시켜서 선의 공덕(功德)을 대강 알아야만 선이 좋다는 것을 더욱더 역설할 수가 있겠습니다.

선정(禪定)을 닦음으로 해서 얻어지는 공덕을 열 가지로 말한 것입니다.

선정에는 무량공덕이 있고 종당에는 다 성불이 되겠지마는, 우선 이와 같이 공덕을 나누어서 간추린 것입니다.

한 가지는 안주의식(安住儀式)이라,

이것은 무엇인고 하면 우리가 참선을 닦으면 자연적으로 우리 몸이 정화되고 마음이 안정되어서 우리 행동이 얌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안온한 행동을 취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행자경계(行慈境界)라,

선정을 닦으면 자비심이 많아집니다.

우리 행동이 거치르면 자비심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만 선을 닦으면 우리 생리가 정화되고 마음이 정화되는 관계상 저절로 자비심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자비심을 스스로 내는 경계가 행자경계입니다.

다음은 무번뇌(無煩惱)라,

번뇌가 없다는 말입니다.

탐(貪), 진(瞋), 치(痴) 삼독심(三毒心)은 역시 우리 생리나 마음이 정화가 안되어서 발동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을 하면 저절로 탐심이나 진심이나 치심이 발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번뇌입니다. 번뇌가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수호제근(守護諸根)이라,

참선하면 자연적으로 우리의 6근(根)인 눈, 귀, 코, 입, 몸, 뜻을 보호해서 우리의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감각들을 바른 방향으로 유도한다는 말입니다.

부설(浮雪) 거사(居士) 게송(偈頌)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설거사는 거사로서는 아주 위대한 분 아닙니까, '목무소견무분별(目無所見無分別)이요' 눈으로 무엇을 보아도 분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은 소견(所見)으로 보지 않아 분별이 없고, '이청무성절시비(耳聽無聲切是非)라' 우리 귀로는 소리를 듣는다 하더라도 소리에 대한 시비(是非)를 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선(禪)을 닦으면 자연적으로 시비나 어떤 분별은 내기가 싫은 것입니다.

또 저절로 낼 수가 없게 됩니다.

차근차근 부처가 되어 가니 무슨 시비를 내겠습니까, 눈에는 보이는 소견에 따른 분별이 없고, 또 우리 귀는 무슨 소리를 듣는다 하더라도 좋다 궂다 하는 시비를 안 낸다는 말입니다.

'분별시비도방하(分別是非都放下)하고' 분별이나 시비를 다 놓아버리고서,

'단간심불자귀의(但看心佛自歸依)라' 다만 자기 부처한테 귀의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공부하는 분들은 이래야 합니다.

눈으로 보아도 분별을 안내고, 귀로 들어도 시비를 안 느끼고, 다 놓아버리고서 오직 부처한테만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성불을 합니다.

그런 경계가 수호제근(守護諸根)입니다.

우리 6근(根)을 다 청정한 쪽으로 보호한다는 말입니다.

다음은 무식희락(無食喜樂)이라, 안 먹어도 희락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우리 범부가 생각할 때 사람의 행복은 잘 먹고 의식(衣食)이 좋고 모두 그런 것을 행복으로 느낍니다만 실은 그런 것은 욕계 번뇌가 끼어 있을 때의 말입니다.

번뇌가 떨어 졌을 때는 음식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참선하면 경안(輕安)이라, 자기 몸도 가뿐하고 마음도 가볍습니다.

자기 몸과 마음에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 정도가 되어야 선에서 조금 힘을 얻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득력(得力)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이런 경계가 지나가면 그때는 희락지(喜樂地)라, 기쁨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한없는 환희심을 느낍니다.

그때는 그냥 감사해서 눈물이 주룩주룩 나올 정도로 환희심을 느낍니다.

따라서, 이런 경안을 얻어 몸도 마음도 가뿐하여 아무 부담없이 상쾌하고, 그와 동시에 희락지라, 희락을 느끼면, 그때는 음식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이성(異性), 음식(飮食) 또는 지위(地位)에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 먹어도 희락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원리애욕(遠離愛慾)이라,

이성간의 사랑이나 모든 애욕(愛慾)을 다 떠나버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조금 무미하다고 생각 할려는가 모르지마는 실은 무미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선(禪)을 닦아 얻는 행복은 어디다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곱번째는 수선불공(修禪不空)이라,

비록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느끼고 우리가 공을 닦는다 하더라도, 공관(空觀)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공관에 사무치고 참선에 사무치면 다만 공에 머물지 않고서 참다운 진공묘유(眞空妙有)라, 영원적인 불성(佛性)을 우리가 본다는 말입니다.

공(空)을 말로만, 추상적으로 말할 때는 공에 치우칩니다마는 닦아서 얻은 공은 공에 안 치우칩니다.

바로 진공묘유, 불성을 얻는 것입니다.

바로 닦으면 수선불공이라, 우리가 공에 안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 해탈마견(解脫魔견)이라,

마구니의 그물을 다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좋다 궂다 또는 없다 있다 하는 여러가지 우리의 욕망, 이런저런 번뇌의 얽힘이 마견(魔견)인데, 그런 마견을 다 벗어버린다는 말입니다.

마구니의 걸림을 우리가 다 해탈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안주불경(安住佛境)이라,

부처님의 경계에 편안히 머문다는 말입니다.

번뇌가 없거니 응당 부처님의 경계에 편안히 머물겠지요.

다음은 해탈성숙(解脫成熟)이라,

차근차근 해탈되어서 우리 마음에 있는 마지막 번뇌의 씨까지 다 뽑아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성불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참선 공덕으로 오는 것입니다.

요새 말로 하면 우선 참선하고 있으면 우리가 혈액 순환이 좋아서 이산화탄소 같은 그런 것도 역시 차근차근 다 제거되는 것입니다.

원래 불성(佛性)이란, 무한의 힘이 있고 무한의 공덕이 있는지라, 참선 닦으면 닦을수록 자기가 모르는 영원적인 무한의 힘이 자기한테 오는 것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2.참선(參禪)의 기초(基礎) VII

 

● 염불(念佛)의 십종이익(十種利益)

 

1. 명중호지익(冥衆護持益) 2. 지덕구족익(至德具足益)

3. 전악성선익(轉惡成善益) 4. 제불호념익(諸佛護念益)

5. 제불칭찬익(諸佛稱讚益) 6. 심광조호익(心光照護益)

7. 심다환희익(心多歡喜益) 8. 지구보덕익(知具報德益)

9. 상행대비익(常行大悲益) 10. 입정정취익(入正定聚益)

<정토론(淨土論)>

 

 

그 다음에는 우리가 닦는데 따라서 얻어지는 이익이 화두나 묵조나 다른 공부에도 있습니다만 특히 염불하는 이익을 말하는 것에 염불십종이익이라, 화두나 또는 묵조나 그런 공부에도 거의 비슷비슷하나 특히, 염불하는 분들은 이런 공이 있다는 말입니다.

첫째, 명중호지익(冥衆護持益)이라, 명중(冥衆)은 사람 눈에 안 보이는 귀신이나 신장(神將), 용(龍), 야차(夜叉) 등 그런 존재들을 말하는 것 입니다.

우리 눈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용이나 천상인간이나 귀신이나 그런 신장들이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염불을 하면 이런 분들이 좋아서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눈에 안 보이는 신장이나 그러한 명중(冥衆)이 우리를 지키는 이익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지덕구족익(至德具足益)입니다.

염불하면 우리가 부처 이름을 자꾸 외우고 생각하는지라, 우리가 걸음걸음 부처 이름을 외우면 걸음걸음 부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거니, 내가 부처님을 믿고 부처 이름을 외우는데 어찌 부처가 안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염불하고 있으면 걸음걸음 부처가 되어 가는 관계상 부처한테 갖추어 있는 무량공덕을 우리가 스스로 갖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염불을 많이 한 분들은 후덕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전악성선익(轉惡成善益)이라, 염불하면 우리 심신(心身)이 정화(淨化) 되어서 모든 악(惡)을 능히 다 끊어 버리게 됩니다.

부처님을 생각하고 외우면 오역(五逆), 십악(十惡)등 모든 죄의 업장(業障)을 없애고 말할 수 없이 큰 선근(善根)을 성취하는 이익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음은 제불호념익(諸佛護念益)이라, 부처님은 생명으로 보아야 합니다.

'부처를 불러도 부처는 모른다. 그냥 내 마음만 맑아진다' 이런 것이 아니라, 부처님은 일체 공덕을 갖춘 천지 우주의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한번 부르면 부른만치 다 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을 하면 다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것 우리가 부르는 것 우리가 하는 것을 다 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르면 부를수록 그때는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불(諸佛)이, 일체 부처가 다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이익이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제불칭찬익(諸佛秤讚益)이라, 또한 동시에 모든 부처가 우리를 칭찬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이름이요 제일 높은 이름인 부처 이름을 외우는데 칭찬을 안하시겠습니까?

여섯째 심광조호익(心光照護益)이라, 부처님은 광명(光明)입니다.

부처님의 생명이 광명인지라, 우리가 부르고 외우면 그 광명이 우리한테 와서 우리를 비추고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심다환희익(心多歡喜益)이라, 외우면 외울수록 정화되어서 우리 마음이 환희심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해보신 분들은 알겠지요.

그 다음은 지구보덕익(知具報德益)이라, 그때는 그냥 너무 고마워서 일체 중생에게 덕을 베풀고 부처님 은혜를 보답 할 려고 애쓰게 됩니다.

자기 환희심을 느끼고 자기 행복감에 겨워서 이런 공덕을 남한테 돌리고 부처님한테 그 은덕을 갚는 행동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상행대비익(常行大悲益)이라, 항시 대비(大悲)의 자비심을 내고 자비스런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입정정취익(入正定聚益)이라, 이런 분들은 결정코 성불하고 극락세계에 간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극락에 가고 못 가는 구분으로 삼정취(三定聚)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정취(邪定聚)라, 업장이 아주 무거운 사람들은 극락에 못 가게 되는데 이것이 사정취입니다.

또한, 업장이 별로 안 무거운 사람들, 어정쩡한 그런 분들은 부정취(不定聚)라, 어떤 때는 극락에 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못 가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극락에 가고 못 가는 기로(岐路)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 분들이 부정취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한, 업장이 가볍고 염불이나 화두를 많이 들어서 정화된 분들은 결정코 극락에 가고 성불한다는 말입니다.

그분들이 정정취(正定聚)에 해당합니다.

오늘은 제가 말씀을 너무 많이 드려서 이만 마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출처 : pasng2000
글쓴이 : 파랑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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