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그대의 별 이야기

주혜1 2008. 11. 28. 07:35

 김주혜 시집 『연꽃마을 별똥별』

                                                                                       그대의 별 이야기


 

                                                                                                                                                                  유수화(시인)  

 

시란 무엇인가? 아마도 시인이 자신의 정서적 긴장과 갈등을 변장된 형식, 즉 상징적 형식으로 극화한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시인의 긴장과 갈등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시인의 삶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모습일 게다. 루카치는 삶을 빛과 어두움의 ‘혼돈’으로 본다. 이 ‘혼돈’된 삶의 또다른 모습에는 죽음이 있다. 죽음은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속성에도 빛과 어두움이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김주혜의 시집 『연꽃마을 별똥별』을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체험된 삶의 파편들이 날카롭게 끝을 새운 채 숨죽이며 새벽의 여명을 맞이하기도 하고, 때론 일몰에 날카로움조차 묻어버리고 통곡을 하는 시인 앞에 속수무책으로 서있어야만 했다. 이럴 때에는 그저 귀만 열어놓고 들어주는 이가 되어보는 거다.

제1부의 이야기는 <매생이를 아시는지요>이다. 13편의 이야기는 현재의 시인이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영화의 첫 장면 같이 앞으로 전개 될 이야기의 실꼬리를 보여준다


10년 동안 자리 잡힐 대로 잡힌 봉분을 파헤치기로 했다. 배산임수 좌청룡 우백호 누가 봐도 명당자리에 아버지집을 짓고, 잊을 만하면 술 석 잔 뿌리고 효녀인 양 살다가, 죽을 듯이 삶에 지칠 즈음 아무래도 이 팔자가 꼬인 것은 명당값도 못하는 조상탓인 것 같아 아버지집을 허물기로 했다. 한 삽 한 삽 퍼올리는 동안, 시간의 켜를 허물고 나는 아버지를 따라가겠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10년 동안 아무도 몰래 흘린 눈물로 흠뻑 젖은 채 오들오들 떨고 계신 아버지를 붙들고.

                        ―「억장」 전문


일인칭 화자인 시인은 심정적 상황들이 다소 정리된 기억을 현재 속에 재현한다. 시인은 서두에 덤덤한 목소리로 상황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중반으로 넘어가자 시인의 감정은 과거의 공간으로 빠르게 빨려들어간다. 객관적 자세는 무너진 채 이야기의 말미를 끝내지 못하고 통곡을 하고 만다. 듣는이의 감정이 미처 몰입되기도 전에 화자의 울음소리만이 길게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이처럼 시인이 과거의 공간에서 나오지 못하고 주체할 수 없는 애통의 정서에 빠져 있는 것은 왜일까? “죽을 듯이 삶에 지칠 즈음” 이 말을 하는 순간 시인의 삶 속에 머물고 있는 어둠이 켜켜이 살아난 것이다. 특히 어둠이 죽음의 편에 서 있을 때, 엄습하는 슬픔의 골은 시인의 감정을 격동시켰다. 앞으로 시인은, 삶의 어둠을 얼마나 많은 눈물로 이야기 할 건가. 이 시집의 첫장에 나오는 위의 작품으로 미루어 충분히 짐작을 하며, 제2부 <연꽃마을 별똥별>의 이야기를 듣는다.


보름달이 뜨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작 보름달이 떠오르면 서성이다 놓쳐버린 사람, 보름달이 스러질 때 지구 반대편으로 사라진 사람, 자작나무 숲보다 깊은 가슴을 가진 사람, 해바라기 긴 그림자보다 더 외로운 사람, 어둠 속에 갇힌 나에게 심보르스카의 시를 읽어주며 달빛 천지로 만든 사람, 가끔 꿈속에 빙하가 되어 벌겋게 벗어진 상처를 달래주며 흘러흘러 서쪽으로 사라진 그 사람을 위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부르며 밤마다 바다를 건너갑니다.

                        ―「달맞이꽃」 전문

 

제2부는 시인이 ‘나’의 아픔에 대한 상황을 ‘또 다른 나’에게 말하고 있다. 두런두런 혼잣말을 하고 있다. 듣는이를 의식하지 않고 ‘또 다른 나’의 거울을 마주하고 이야기한다. ‘말을 한다’는 것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가라앉고 잔잔히 흘러가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처럼 ‘그’에 대한 회상을 하는 시간에는 눈물이 아닌 ‘슬픈 노래’이다. 이미 서편으로 떠난 사람인 ‘그’이다. 시인은 ‘꿈’에서만이 볼 수 있는 ‘그’에 대한 상실의 아픔은 이제 그리움으로 남아, ‘밤마다 바다를 건너가는’ ‘ 노래하는 나’를 바라본다. 여기서 시인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는다. 어쩌면 시인에게 죽음은 삶의 또다른 모습이다.

이처럼 죽음과 삶을 동일시하는 시인의 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전기적 상황을 잠시 들어본다.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보는 체험적 상황을 여러 번 겪는다.이 우주 공간과 시간에서 부모와 자식의 인연으로, 남편과 아내의 인연으로 맺어진 끈을 사별로 끊어야 했던 시간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시간들은 시인에게 긴장과 갈등의 정서를 만들고, 그 정서는 삶의 어두움으로 투영되어 시인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있다. 시인의 체험적 시세계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 현실적 삶과 구분되지 못하고, 삶도 죽음의 모습으로 투영되어 어둠 속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제3부의 <에밀리 디킨슨에게>와 제4부의 <어머니별>에서 ‘눈물’ ‘사랑을 잃은’ ‘죽음’ ‘베옷’ ‘일몰’ ‘무덤’ ‘아픔’ ‘토혈’ ‘영정’ ‘어둠’ 등의 시어들이 시인의 삶에 대한 정서적 대응 자세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시인의 삶에 대한 긴장과 갈등의 정서를 언어로 형상화하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말을 한다는 것은 듣는이를 배려해야 한다. 소리치거나 격정을 토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다. 그렇듯이 시를 쓴다는 것도 독자와의 대화이다. 읽는이에 대한 배려가 시의 궁극적인 도달점이다. 시인 김주혜는 독자에게 배려의 말을 하고자 한다. 시인 자신의 체험을 진솔하게 말하고 있다. 때론 통곡하며, 때론 혼잣말로 두런대며 상처를 내보인다. 독자는 이러한 시인의 꾸밈없는 정서의 형상화된 세계로 들어가 마음껏 울어보고 그리워한다. 이는 시인과 독자의 벽이 무너져 정서를 공유하는 것이다. 즉 정서적 카타르시즘을 얻는다.

또한 시인은 독자의 먹먹해진 현실세계를 “지루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 하고 위로한다. 그런가하면, 세상은 살아볼 만하다고 독자의 등을 툭 건드려준다. 사람과의 상처인 ‘이별’은 어쩌면 세상을 살아가는 길에서 길목의 어느 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별’은 ‘만남’이 전제되어야 하고, ‘만남’은 늘 설레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밝음’인 것이다. “매생이국 같은 여자!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건드리면 뜨거운 열정이 활활 살아나는 여자. 멋지다. 내가 그런 여자라니… 내게 데이고 싶은 사람, 어디?”(「매생이를 아시는지요」) 이별은 또다른 만남을 주는 시간이란 회자된 말을 독자에게 장난스럽게 던진다. 통곡의 장으로 손짓하여 불러내고, 소리내어 울게 하고, 울다 지칠 즈음에 배시시 웃음을 짓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시인 김주혜의 계산된 배려이다. 상처는 드러내야 씻어낼 수 있다. 하지만 누구도 선뜻 내어놓지 못하는 상처들을 시인 자신이 먼저 내어 보이므로 해서 독자는 부끄럽지 않게 자신의 상처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시인의 무겁지 않은 이야기에서 웃음을 찾는다. 이것은 ‘삶의 어둠’에서 ‘삶의 밝음’으로 향하는 통로인 것이다.

시인 김주혜의 이러한 시적 행위는 독자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시인이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이별이 아프다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다는 또다른 말이다. ‘죽음’을 말하는 시인은 ‘죽음’까지도 수용하는‘삶’이 아름답다는 역설적 장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대부분은 통곡의 리듬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객관적 서술에 의한 안정된 리듬이다.


눈꽃마다 어머니 얼굴 새겨놓고

눈꽃마다 어머니 음성 배어놓고


“조심해라, 조심해라, 미끄러질라”


어머니, 걱정도 팔자다.

어머니, 걱정도 팔자다.

                        ―「걱정도 팔자」 부분


모습이 닮은 모녀의 얼굴과 눈꽃, 감정이 정화된 ‘고요’ 속에서 죽음과 삶이 어우러져 마치 동양화의 여백을 보는 듯하다. 함박눈이 툭 툭 땅을 덮어가는 공간에서 우리는 삶을 다시금 추슬러본다. 비록 겨울의 시리고 어둔 삶의 시간이 죽음 같지만 그 어둠을 밝히는 눈꽃이 죽음의 경계까지도 지워버리는 순간이다. 시인은 죽음의 상황을 시적 장치로 놓아두고 그곳에서 삶의 희망을 들려준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채워진 공간에서 동양화의 하얀 여백을 보며 정서적 휴식을 취하듯, 시인은 독자에게 배려의 공간을 제시한다. 시인의 시세계에 마련한 장에서 삶의 긴장과 갈등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그러므로 눈꽃은 죽음의 ‘밝은’ 이미지로 죽음에서 오는 갈등의 정서를 씻어낸다. “눈 오는 날이면 엄마에게 달려갔는데/ 갈 곳 없는 날 위해/ 펑,펑,펑/ 가지 끝에 달린 눈꽃이 울어주고 있다”(「눈꽃」) 시인이 죽음의 체험적 세계를 두려움이 아닌 ‘사랑’의 공간으로 인식화한 것이 바로 삶의 어둠에서 살아 갈 수 있는 힘이다. 어머니가 있는 죽음의 공간은 곧 ‘사랑의 공간’이며, 시인이 고통스런 삶의 현실에서 겪는 갈 곳 없는 방황과 외로움을 위로해 주는 공간이다. 그 공간은 ‘죽음의 밝음’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눈꽃’은 이러한 시인의 심상을 형상화한 모습이다. 즉 ‘사랑’의 힘이 시인을 ‘밝은 죽음’ 곧 ‘밝은 삶’을 지향하게 하는 원동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체험적 시세계인 통곡의 장을 시적 장치로 걸어놓고, 시인의 희망적 삶의 메시지를 듣는이에게 전하고자 한다. 삶의 어둠을 지나면 “내 안에 연꽃 향기가 가득 찼다”는 고백을 들려준다.

이제, 가을이 오는 이 시점에서 잠시 바쁜 걸음을 놓아두고, 시인의 별에서 들려오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본다. 삶의 희망으로 별이 총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