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정서 가운데 사랑만큼 마음을 설레게 하는 단어도 없다. 아담과 이브의 사랑에서 보듯 인류 최초의 사건도 사랑이었다. 그렇기에 사랑은 어쩌면 인간이 태어나서 느끼는 감각 가운데 첫 번째 놓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랑은 대상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상이 존재한다. 이기적 사랑과 이타적 사랑이 있는가 하면, 에로스와 아가페적인 사랑도 있다. 또 이런 추상화된 형태 이외에도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스승과 제자 그리고 형제들 사이의 사랑이 있으며, 동료들 사이의 사랑도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 철학적 맥락에서 사유되는 사랑이 있을 수 있고, 존재론적 맥락에서 사유되는 사랑도 있다. 사랑이 이토록 많다는 것은 그것이 삶의 존재방식 가운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감정이나 그 구현의 방식들이 문학의 주요 소재나 주제 혹은 방법임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것은 사랑의 구현방식 등이 문학의 본질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자아와 세계의 거리화된 감각이 문학의 일차적인 존재 조건이다. 거리화된 대상과 서정적 자아의 근접이야말로 문학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대상과의 거리 좁힘이란 서정적 자아에게는 분열된 인식의 통일과 동일한 맥락에 놓이는 감각이다. 따라서 벌어진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는, 혹은 대상과 합일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자아화나 자아의 대상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곧 서정적 동일화인데, 여기에 이르는 길은 은유와 같은 시의 방법적 장치 등에서도 가능하고, 서정적 자아의 정서에 의해서도 가능하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정서의 내적 통일이 중요한데, 사랑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감성이 아닌가 한다. 자아와 세계의 화해할 수 없는 간격을 좁히려는 시적 자아의 열망을 사랑만큼 훌륭하게 채워주는 시적 기제도 없기 때문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궁극적 합일이 사랑충동이라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이 충동이야말로 대상과의 간격을 무화시키는 가장 순일한 정서라 할 수 있다.
사랑은 여러 이질적 감각을 하나로 모으는, 그리하여 내적 질서를 회복시키고 유지하는 총체적 감각이다. 사랑을 보편성이나 영원성의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고, 문학의 가장 일반화된 주제 가운데 하나로 치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며, 또 누구에게나 동일한 호소력을 갖고 있는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담장은 높았다 수세미 같은 해는 쉽게 졌고, 나는 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단 한번 열린 적 없는 대문 앞, 나는 그 앞에서 오래도록 우두커니 기다렸다//세월 지나고 그 여자애도 몇 번이고 지나갔지만 나 바보같이 단 한번 부르지 못했다. 누르려다 도망치고 누르려다 도망치고를 반복하였다 누, 르, 지, 마, 누군가 빗나간 세월처럼 소리라도 치고 나올 성 싶으면 서둘러 도망치기 바빴다 나 자고 일어날 때마다 키가 한치씩 자랐지만 그 집 앞에선 도로 키 작은 민들레가 돼버리곤 했다//담장 너머에선 잊을만하면 감미로운 피아노연주 소리가 들려오곤 하였는데 누가 연주하는 것인지 모를 그 소리를 나는 오래도록 우두커니 서서 들었다 어쩌면 그 여자애와 아무 관계없을지도 모를 그 피아노 소리에 홀려 나는, 사춘기 그 힘든 때를 보내었는지 모른다//한번쯤은 그래 한번쯤은 그 여자애가 나를 보아 줄 거라고 멈춰 서서 내게 말을 걸어 줄 거라고 믿는 사이 전봇대는 몇 번이나 교체되어 갔고 불어 닥친 바람에 나무는 몇 번이고 기우뚱 쓰러졌다 일어서곤 하였다 서둘러 지던 해는 나를 그 집에서 되도록 멀리 등 떠밀어 놓곤 하였지만 나는 언제나 그 집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곤 하였다//이제는 어디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내가 처음 누군가를 막연히 기다리던 거기---몇 년의 시간이 훌쩍 지나고 집이 있던 자리에는 덩그라니 빈 공터 들어서 있지만 가끔 불어온 바람이 기억의 음률들 내게 전해와 우두커니 나를 세워두곤 한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던 거기//그, 집, 앞---
유창성, 「그 집 앞」, ?시와정신? 2009년 가을호
인용시는 사랑의 가장 원초적인 감각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풍기는 정서들은 초등학교 시절 즐겨 불렀던 현제명의 ‘그집앞’의 세계와 닿아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유년의 정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아름다움이라는 감각을 잃지 않는다면, 이 시를 능가하는 작품도 없을 것이다. 이성에 처음 눈뜨는 시기에 인간은 가장 설레이는 감수성을 갖는다고 한다. 이때의 감성을 매우 특별한 정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즉자적이기는 하되 유보적인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런 상반되는 감성의 교묘한 줄타기는 야생적인 것이기에 더더욱 짜릿한 맛이 묻어난다. 첫사랑에 젖어있을 때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다워진다. 심지어 자신에게 가장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조차도 그 애틋함의 아우라 속에 갇혀 빠져나올 줄 모른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를 위해 존재하고 또 나를 축복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는 환각에 젖어든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사물들을 전부 자기화하여 나를 축복해 달라고, 내 속으로 몰려들어서 축가의 나팔, 승리의 행진곡을 불러달라고 외쳐댄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 축제의 장인가.
인용시의 화자 역시 누구나 경험할 수 있었던 것처럼, 어린 시절 누군가를 지독히 짝사랑한 듯싶다. 사랑에의 열정은 강했지만 그러나 그것을 직접 표현할 길은 쉽게 찾지 못한 듯 보인다. 소심함이라든가 순진함이라든가 용기없음 등이 그 앞을 가로 막고 있었던 때문은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아득한 추억이 되어 “그, 집, 앞”이란 표현에서 보듯 회한의 정서로만 현재화되어 있을 뿐이다.
첫사랑은 그 말 자체 속에 이미 실패가 전제되어 있는 것처럼, 당시에 느꼈던 애틋한 감수성들은 성장기를 거치면서 반복되는 학습효과에 의해 서서히 반감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첫 번째의 이 감각이 인간으로부터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첫사랑의 정서만큼 자아와 대상이 통일된 상태도 찾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이미 영원의 감각 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억의 저편 속에 흘러 들어가 이미 하나의 영원한 과거가 된 지 오래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활성의 퇴적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생의 고비마다 계속 환기되어 서정적 자아에게 계속 통일의 정서를 부여할 것이다. 순간순간 환기되는 그 완결성이야말로 분열을 치유하는 신비한 영약으로 계속 되살아 나오게 되는 것이다. 순일한 첫사랑의 정서가 소중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지상의 어딘가에서 막 생성된 듯한 세 개의 손과 혀가/통정을 누르고 있는,//페퍼로 문지른 듯 희미한 셀루리언 블루의 남녀가/입을 맞추고 있었어/눈을 꼭 감고 있는 남자의 오목한 뺨, 뺨 속에/이미 혀가 들어 간 형상이었어/어떤 사랑이 저토록 깊숙이 혀를 불러내었을까/몰입이나 도취?/꿈틀거리는 혀가 생각하기도 전에 여자의 손가락이/남자의 목을 조였어/입 속에 혀를 가둔 절정의 순간이었어//사랑은 절지동물의 꼬리만 가둔 미증유의 감옥,//남자 혹은 여자에게 눈 먼 다른 혀가 있었어/빰과 빰 사이 돋은 혀, 재갈 물린 여자는 고백의 말 대신/눈물로 그 눈을 바라보는 수밖에/생각이 눈이 되는 순간,/남자의 각막이 우물처럼 깊어졌어/남자는 턱을 부드럽게 받쳐 든 여자의 손을 어루만졌지만/여자의 키스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어/텅 빈 우물 같은 남자의 동공,//영원한 미개척지, 혹은 홀로그램?//눈 감거나 눈 먼 남녀의 눈 속에 서로가 빠져 죽었어/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춘 것처럼,//세 개의 손과 세 개의 혀를 가진 에로스는 아가페를 죽였고/아가페는 나를 죽였어//지블라스 백진스키의 그림처럼 편안히,//
강영은, 「제3의 혀」, ?현대시? 10월호
앞에서 사랑의 몰입을 정서의 통일로 설명한 바 있다. 사랑을 장미나 빨간색 등으로 비유할 수 있음은 그것이 열정적이기에 그러한 것이고, 또 이 열정이야말로 감정의 몰입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강영은의 「제3의 혀」는 이런 면에서 의미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매우 괴기적이고, 또 우스꽝스럽기조차 하고 환상적인 분위기 또한 자아낸다. 그렇기에 피카소의 그림이 연상되기도 하고 달리의 그림이 떠올려지기도 한다. 이런 그로테스크한 장면과 사랑이란 과연 어떤 관계망으로 놓여지는 것일까.
강영은의 시에서 사랑은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구현되는데, 무엇보다 눈에 띠는 것은 그것을 구현시키는 기법이다. 우선,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유, 인간의 경계를 초월하는 발랄한 상상력이 매우 참신하다. 세 개의 손과 혀라든가 오목한 뺨 속에 들어간 혀의 모습을 보라. 또한 뺨과 뺨 사이 돋은 혀나 재갈 물린 여자 또한 얼마나 괴기스럽고 우스꽝스러운가. 구분지어진 경계없이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서로가 자유롭게 넘나들며 사랑의 양상을 다양하게 표출시키고 있는 모습은 또 어떠한가. 이렇게 상호간의 경계가 없다는 것은 어떤 몰입의 정서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정서적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시인은 이미지를 돌발적으로 결합시키거나 의식으로부터 차단된 무의식의 저항선을 힘차게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랑에 이르는 방식 혹은 그것의 상태이다. 이 작품에서 사랑은 어떤 기억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사랑은 기억의 심연 어딘가에 박혀 있다가 계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 여기의 감각에서 만들어진다. 이는 그것이 분열의 통일과 같은 치유의 감각과는 거리가 있다는 뜻이 된다. 순간의 몰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포스트모던적이다. 지나온 과거와 다가올 미래가 이 작품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시간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이다. 또한 사랑의 종류 또한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세 개의 손과 세 개의 혀를 가진 에로스는 아가페를 죽였고/아가페는 나를 죽였어”에서 보듯 개체화된 사랑은 별 의미가 없다. 사랑만이 나를, 작품을 압도하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 몰입된 자아는 자립화된 존재가 아니다. 지금 여기의 순간적 감각만이 서정적 자아를 감싸고 있을 따름이다.
사랑에 몰입된 이런 상태는 몽환적 분위기를 통해서 더욱 극단화 되는데, ‘지블라스 백진스키’의 그림과 오버랩시키는 장면이 바로 그러하다. 사랑의 절정이 죽음과 동일시되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지만, 이 작품에서도 그러한 정점은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춘 것처럼” 정지된 그림으로 표상된다. 마치 몽환에 빠져드는 듯한 환상을 그린 백진스키의 그림처럼 말이다. 요컨대, 인용시는 사랑은 간극없는 동일화이며, 그 일체화된 상태를 그로테스크한 그림과 정서로 풀어낸 작품이다. 사랑의 격정과 몰입을 시의 의장이나 정서의 측면에서 이렇게 효과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는 전적으로 작가의 역량에 해당되는 문제이다.
첫사랑의 여자가 있었다 짐승처럼 나만을 사랑해 주었다 어엿한 젊고 잘 생긴 남편이 있는 유부녀인 나의 첫사랑 여자는 부끄러움도 없었다//남편이 밤낮으로 사랑해주는데도 서툴고 미숙했던 내가 해주는 사랑을 남편의 능숙한 사랑보다 더 좋아했으며 순수한 사랑이라고 했다//남편과의 사랑은 껍질만 남아 있다고 속삭였다 남편이 죽으면 따라서 죽을 수는 없어도 내가 죽으면 따라서 죽는다고 약속했었다//첫사랑 여자와 입도 맞추었고 옷을 헤집고 젖도 만지고 밤새도록 안아주어야 잠을 잤다 한 때는 첫사랑 여자가 없으면 나도 죽는다고 다짐했었다//첫사랑 여자보다 젊고 예쁜 여자의 매력을 느낄 줄 알면서부터 나는 첫사랑 여자를 미워했으며 젊고 예쁜 여자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보기도 싫게 늙어만 가는 첫사랑 여자는 병들어 죽어가면서도 나에게 끝까지 집착했었다 그 여자가 첫사랑의 여자 나의 어머니! 어머니이시다!//
허의행, 「첫사랑」, ?현대시학? 10월호
허의행의 「첫사랑」을 읽다보면 언뜻 불륜의 경험을 담고 있는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우 사실적이고 육감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면, 마치 추리소설의 범인이 잡힌 것처럼, 사랑의 대상이 명쾌하게 밝혀진다. 바로 이성이 아니라 어머니이다. 사랑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은 에로스적인 것이긴 하지만 이에 못지않은 것이 모성적인 사랑이다.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것은 어머니에 관한 것이다.
이성간의 사랑과 모성적 사랑 가운데 어느 것이 소중하다든가 하는 경중을 따지거나 선후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사랑의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이 수행하는 역할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서정적 주체에게 사랑은 분열된 인식을 완결해주는 구실을 한다. 심리적인 국면에서 이성적 사랑충동이란 결국 모성적인 것에 다가가려는 결핍된 자아의 영원한 충동과 동일항에 놓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두 사랑은 동일한 것이 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인식의 완결과 같은 어떤 형이상의 주제를 담고 있지는 않다. 그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정도를 표현해내고 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통상의 모성적 상상력을 담아낸 시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작품에서 사랑의 주체는 나가 아니라 어머니이다. 이런 면들은 일반적인 모성 감각과는 거리가 있다. 이 감각은 통상 불구화된 존재, 분열된 존재가 통합의 세계로 회귀하고자 노력하는 것, 대상과의 영원한 합일을 그리워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서정적 자아는 그곳에 기투함으로써 존재론적 고독이나 문명의 세례를 초월하려 한다. 그런데 인용시에서 주로 다룬 것은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자식에 대해서 가질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여기서 그녀는 시적 자아에게 긴장의 자장이나 어떤 흡인력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아니다. 아름답게 미화된 어머니의 초상화가 그를 그리워하는 자식의 얼굴에 잔잔히 비추고 있는 모습, 그것이 이 시의 주제이다. 그런 만큼 치유능력으로서의 모성적 상상력과는 어느 정도 비껴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10 년 전에/누군가, 참 잘 생긴 그놈과 여린 사랑을 할 때/개미 지나가는 소리 같은/붉은 꽃망울 벌어지는 소리 같은/멀리서 별똥별이 길게 쓸려가는 소리 같은/그런 낌새 몰랐다/살갑게, 애틋하게, 서럽게/온 몸 오그라드는 진저리를 몰랐다/그냥 잘 살았다/어쩌다가/늦바람이 나서/눈빛 서늘한 그놈과 눈이 맞아서,/아득한 시공쯤이야 가볍게 뛰어 넘어야/진짜 사랑인 거라고/염문 같은/끈끈한 치정에 목이 졸리고/지독한 투기심에 눈멀고 귀멀어/새카맣게 속이 탄다/세상의 눈치란 눈치 다 보아가며/속절없이 바람난,/부끄러운 사랑을 변명한다/
한보경, 「시, 그놈」, ?애지? 2009년 겨울
속된 말로 세상에는 고칠 수 있는 병이 있는가 하면 고칠 수 없는 병이 있다. 그 난치병 가운데 하나가 소위 문학이라는 병이다. 그런데 이 문학병은 너무 질기고 끈덕져서 쉽게 떨궈내지 못하는 것이 하나의 상식으로 굳어져 왔다. 이 병은 한 시기만의 순간에서 그치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 자아 내부에 잔존하면서 자아를 괴롭힌다. 문학청소년기를 거치고 신춘문예의 시절이 오고, 결국은 등단을 한 뒤에도 이 병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더 좋은 작품을 위한 그 끝없는 싸움을 누가 말릴 것인가.
한보경의 「시, 그놈」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 아니 고칠 수 없는 문학병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병이라 했지만 실상은 문학에 대한 사랑법에 가깝다. 사랑은 이성들 간이나 혹은 인간들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시를 사랑하는 것에서 보듯 비인간적인 영역에서도 그것은 얼마든지 촉발된다. 그럼에도 그것이 갖는 순기능은 다르지 않다. 이성간의 사랑이든 모성에 대한 사랑이든 혹은 시에 대한 사랑이든 간에 그 열정에 있어서는 동일한 까닭이다. 훼손되지 않은 자아에의 일체성이야말로 이런 열정적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시인이 문학에 열정을 갖게 된 것은 적어도 10년쯤은 된 것 같다. “참 잘 생긴 그놈과 여린 사랑을 할 때”가 그때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때의 사랑은 너무 큰 것이어서 “개미 지나가는 소리 같은/붉은 꽃망울 벌어지는 소리 같은/멀리서 별똥별이 길게 쓸려가는 소리 같은/그런 낌새”조차 모를 정도로 정밀하고 강렬한 것이었다. 또한 세상의 모든 눈치를 뒤로 하고 오직 시에 대한 사랑에만 매달렸다. 사랑이란 눈치보기도 아니고 치정에 목이 졸릴 정도로 절대적이어야 했다. 지독한 투기심이 없는 사랑은 그저 가벼운 유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시인은 그렁그렁 적당히 넘어가는 사랑, 곧 그저그런 문학에의 열정만으로는 자신의 문학이 성립될 수 없음을 속된 이성적인 사랑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시에 대한 사랑이 지독한 이성적 사랑과 등가에 놓인다는 표현만큼 문학과 시에 대한 강렬한 사랑법이 또 있을까.
나는 뺄셈이고/너는 덧셈이다/또한, 너는 뺄셈이고/나는 덧셈이다/내가 네게로 흘러간다/네가 내게로 흘러든다/점점이 스민다/너와 나는 도무지 이름할 수 없는 형질이어서/날 받아들인 네 영혼에/널 받아들인 내 영혼에/알레르기 같은 열꽃이 돋는다//만개!//내가 네게로 갈수록/네가 내게로 올수록/우리는 만발하고 시든다/차오르고 비워진다/이 빈번한 삼투압/흘러가는 길은 언제나/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뇌수와 골수 침 땀 눈물이 범벅으로 섞여든/너와 나 낱낱이 해체되어 녹아든/진하고 단, 쓴 피/오늘도 우리는 나누어 마신다/피의 러브 샷
강기원, 「사랑, 혹은 흡혈」, ?시와 경계? 2009년 여름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에 강력하게 빨려드는 흡입력을 갖는다. 그래서 사랑을 흔히 플러스극과 마이너스 극에 비유하여 강력한 자장의 회오리로 설명한다. 그런데 사랑을 뺄셈과 덧셈으로 인유하면서 “내가 네게로 흘러간다/네가 내게로 흘러든다”고 했다. 플러스와 마이너스와 같은 흡인력의 관계가 아니라 뺄셈, 덧셈과 같은 수학적 정식으로 사랑의 오묘한 힘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런 자연과학적 사랑법이란 실상 매우 낯설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사랑에 대한 이 작품의 묘미 역시 이 수학적 계산법의 비밀과 어느 정도 상관있는 것은 아닐까.
우선, 사랑의 뺄셈과 덧셈과 같은 수학적 공식으로 정식화하는 것을 질투나 배태성 정도로 설명하는 것은 어떨까. 질투가 전제되지 않는 사랑은 가짜이고 허위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는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 아닌가. 가령, 유일한 사랑을 위해서는 당파적 결속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이타적 눈돌림이란 불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나를 위한, 그리하여 그 나머지 군상에 대한 실상이나 정서들에 대한 뺄셈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반대로 덧셈 또한 그 기능적 측면에서 뺄셈과 거의 등가의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의 획득을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과대포장 또한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잉충만의 상태가 되어야만 “날 받아들인 네 영혼에/널 받아들인 내 영혼에/알레르기 같은 열꽃이 돋”아서 드디어는 “만개!”하는 형상으로 가지 않겠는가.
다음으로는 사랑의 원리이다. 한번 달아오른 정서가 늘 충만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 그렇지 않은 상태로 있는 사랑 또한 성립하기 어렵다. 채워지고 비워지고, 흘러들어오고 흘러나가는 자연스런 삼투압과정처럼, 건강한 정서라 끊임없이 피드백의 과정을 유지해야 사랑의 공존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깊으면서도 깊지 않은 사랑, 그것이 작별이 잦은 현대 사회에서, 이미 조병화가 체득한 사랑이 공존하는 이유가 아닐까.
「사랑, 혹은 흡혈」은 우리 시대의 또다른 사랑법이다. 그것이 이성간의 애절한 사랑이든, 존재론적 고독을 치유하는 사랑이든, 아니면 역사철학적인 맥락에서 사유되는 사랑이든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사랑이란 자의식의 과잉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충만한 정서의 상태란 항상 덧셈과 뺄셈의 기능적 장치에 더욱더 극적으로 고양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런 면에서 지나치게 극단화되고 한쪽으로 쉽게 치우치는 사랑의 미몽상태를 새롭게 일깨워주는 이 시대의 진정한 사랑법을 제시한 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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