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몸, 영혼

주혜1 2010. 6. 5. 19:14

* 영혼(영적 요소)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과 다른 근본적인 차이점은 하나님의 특별한 생기를 소유한 영적 존재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생기를 소유함으로써물질적인 부분, 즉 육체가 살아있는 존재로서 그 의미를 나타낸다.
성경은 이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죽음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영혼이 떠난 육체는 단지 흙에 불과하고(욥 3:20), 육체없는 영혼은 온전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욥 3:20)


* 육체(물질적 요소)
창세기 2장 7절에서 ‘사람을 만들고’에서 ‘만들다’는 용어는 ‘재료와는 상관없이 수행했다.’ 즉 ‘무에서 유로의 완전한 신적 창조’라는 의미를 가진 ‘바라’가 아닌 ‘아사’이다. 아사는 이미 창조된 물질을 재료로 하여 어떤 물체를 만들 때 사용한다. 창세기 2장 7절은 이미 창조된 물질이 ‘흙’임을 밝혀준다. 본절에서 사용된 ‘인간’(사람)은 히브리어로 ‘아담’인데 이 용어는 ‘땅’을 의미하는 ‘아다마’와 동일한 어원을 가진다. 이 사실은 인간의 기원이 흙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 즉 인간의 물질적인 부분이 창조의 일반적인 법칙을 따랐음을 암시한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욥 3:25).

 

* 육체의 초월성
육체의 한계성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체에 대한 언약을 통해 극복된다(눅 24:39; 요 11:23,24; 고전 15장). 즉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오시는 그날, 영화로운 육체로 변화된다. 그리고 다시 둘째 사망이 없는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재는 물질적 부분과 비물질적 부분을 분리할 수 없는 전인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고귀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육체는 다른 피조물과 달리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초기의 영지주의(Gnosticism)는 육체를 열등한 것으로 여겨 그리스도의 육적 부활을 거부했다.(「위즈덤 종합 강해」, 기독지혜사, pp.82,93,94에서 발췌 편집함)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 12:2,3).


* 육체 본래의 성품이 가지고 있는 오염이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한 죄가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신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 영혼과 몸은 분리할 수 없는 질서잡힌 통일성을 형성한다. 그러나 인간의 몸에 대한 영혼의 지배는 하나님의 지배의 표현이요 사람의 자기 지배는 하나님의 지배의 유비(類比)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


* 몸은 사람됨의 상황을 표현하며 행동하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것은 인간이 세계를 향해서 열려 있고, 이 몸을 매개로 타인과 주변 세계와의 상호관계의 장을 열며, 이를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설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신약성경에서 몸에 관하여 말할 때마다 그것은 곧 전인(全人)을 뜻한다(롬 12:1; 6:13). 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이 몸이다. 몸은 하나의 객체가 아니라 행동하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가능성이고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고 불순종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도 육체가 살아있을 때 받는 것이다.
“(부자가) 불러 가로되 나사로를 보내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눅 16:24-25).


* 몸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다(그리스도인의 영화).
우리의 자연적인 몸은 자연법칙에 의해 지배를 받지만 장차 영적인 세계에 속한 참된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

몸은  ?이란 글자에서 나왔다. 이것으로 몸은 맘(마음)과 관련이 있는 낱말이며 맘과 떨어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한자로는 신체(身體), 육체(肉體), 또는 형구(形軀)라고 표현하는데, 이것 역시 정신, 영혼 등과 상대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과 몸을 심신(心身), 영육(靈肉)이라고 쓰기도 하여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 영육일치(靈肉一致)등의 말을 사용한다. 이것은 모두 서양철학이 들어온 뒤에 생긴 용어들이다. 동양의 고전에는 신(身), 체(體), 형(形), 구(軀) 등 한 글자로만으로 몸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체는 뜻을 나타내는 뼈(骨)와 음을 나타내는 풍(豊)이 합하여 이루어진 글자이다. 뼈대를 가지고 있는 몸은 이것을 주체로 하여 풍부한 작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체는 용(用)과 함께 체용론(體用論)으로 전개되어 서양철학과 다른 동양철학의 주요 개념을 이룬다. 체용을 한글로 다시 표현하면 몸(體)과 몸짓(用)이 된다. 신(身)은 배 속에 아기를 가진 여자의 모습을 본뜬 글자로 사람의 몸을 나타낸다. 보통 자신(自身), 신분(身分), 수신(修身) 등은 도덕적이며 사회적인 주체를 나타내는 사회적인 몸(social body)을 가리킨다. 그러나 육신(肉身), 신검(身檢), 신공(身貢), 혹은 신역(身役)은 물리적인 몸을 가리킨다. 형은 신(神)과 영(靈)과 반대되는 용어로서 물리적인 몸을 가리킨다. 형(形)과 신(神)은 육체와 정신처럼 서로 짝하면서 반대되는 말이다. 구(軀)는 몸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순수한 물리적인 몸을 가리킨다. 이 말은 구각(軀殼)과 함께 쓰이며 신(神)을 감싸고 있는 껍데기로서의 몸을 나타낸다. 형구(形軀)는 눈에 보이는 몸을 가리킨다. 형구는 생체의 몸을 나타내는 독일어의 ‘Leib' 보다는 몸뚱이, 즉 기관을 나타내는 “Korper”의 의미와 더 가깝다.

 


 

몸은 힘이 작용하는 그릇


 몸은 두 가지 관점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하나는 몸을 밖에서 관찰할 수 있는 객체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몸과 마음을 분리하여 보는 이원론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플라톤과 데카르트가 그 대표적 사상가이다. 다른 하나는 몸을 안에서 보는, 주체적인 체득과 수양을 중시하는 관점이다. 그것은 동양철학과 의학의 기본적 관념이다. 유아사 야스오는 융학파의 신화학자 노이만의 학설에 따라서 몸을 그릇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것을 여성적인 것으로 여긴다고 하면서 ‘여성=몸=그릇’이라는 등식을 인류에게 알려주고 있다고 하였다. 몸을 그릇으로 여기는 것은 여성뿐 아니라 인간의 일반적인 체험이었으며, 한자의 신(身)도 아이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생각한 신화적 사고와 일치한다. 그릇인 몸은 그 안이 어두워 보이지 않는 무의식적인 본능과 충동이 지배하고 있다. 몸의 본능적인 욕구는 눈, 귀, 입, 배꼽, 항문, 생식기 등 그 열린 부분을 통하여 안과 밖이 소통하게 된다. 몸은 그 소통의 장소로서 특수한 두려움과 매력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몸의 철학자 존슨도 우리는 외부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제 몸의 경계를 알게 되며 제 몸을 ‘안’과 ‘밖’으로 구성된 ‘그릇’으로 이해하게 된다고 하였다.

 


 

 주역 계사전에서는 어떤 힘(氣)이 몸(形)을 앞서 있는 것(形而上者)을 도(道)라고 하고 몸에 내려와 있는 것(形而下者)을 그릇(器)이라고 하였다. 도는 어떤 힘이 변화하는 법칙이고, 몸은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는 그릇이다. 사람의 몸도 그 안에서 기가 작용하는 그릇인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역동적인 힘인 기는 동양철학 및 동양의학 고유의 공통적인 사상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기는 힘인 동시에 생명을 유지시키는 숨을 뜻하기도 하다. 우리 몸의 기가 원활하게 흐르지 못하고 막히게 되면 목숨이 위태롭게 될 수도 있다. 동양철학과 의학에서 몸과 마음은 기의 모임(形)과 그 활동(神)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몸과 마음(形神 또는 心身)은 기의 두 측면이기 때문에 서양철학처럼 몸과 마음은 이원화시키지 않는다.


 


 

기계화된 몸과 몸의구조화


 서양은 고대부터 몸과 마음을 분리하여 생각해왔다. 플라톤은 몸은 영혼의 감옥이라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몸은 영혼에 비하여 열등하여 인간의 본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근세 데카르트에 이르러 정신(mind)과 물체(matter)를 각각 독립된 실체로 간주함에 따라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서로 연관이 없어져버렸다. 그가 생각한 몸은 자연관 마찬가지로 자기의식을 하지 못하는 기하학적인 길이(延長)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데카르트 후학들에 의하여 동물-자동기계론으로 이어졌고 라메트리에 의하여 인간기계론으로 전개되어 인간의 몸은 자동적이고 자족적인 기계로 정의되었다. 그 이후 위너가 사이버네틱스에서 생물학적인 몸과 기계적인 몸은 둘 다 통제와 통신을 통하여 스스로 조절하는 체계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인간의 몸과 기계가 연결되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이에 따라 몸의 영원성(不死)을 꿈꾸는 인간과 기계가 혼합된(hybrid) 몸으로서의 사이보그가 탄생하였다. 이것은 약한 인간의 몸과 강한 동물의 몸이 혼합된 반인반수의 신화적 존재(스핑크스 등)의 현대적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첨단 과학 예컨대 생명공학은 몸의 구조를 기계적 원리를 응용하여 연구하고 있으며, 생체공학은 인공지능과 연계시켜 기계가 지능을 구사할 수 있는지 여부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은 동물을 복사할 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유전자 조작 기능을 통하여 인간의 몸까지 복사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유전자 조작 기술을 통하여 인간의 몸까지 복사해낼 수 있는 시대에 와 있다. 이들 모두가 인간의 몸을 기계적으로 파악하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기계적 신체관을 비판한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몸은 기계도 아니고 순수의식도 아니다. 몸은 일종의 체화(incarnation)된 의식이다. 즉 정신적인 힘이 몸에 배어 있는 것이다. 몸이 살고 있는 세계는 물질적인 것도 정신적인 것도 아니다 따라서 몸은 기계론적 인과적 법칙이나 선험적 목적론적 원리에 의하여 지배받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몸은 세계 속에 있으면서 세계로 향해 나아가는 실존으로서의 세계에로의 존재이다. 우리의 몸이 세계와 하나가 되기 위하여 적응하는 과정에서 세계로부터 일정한 형태를 받아들여 자기 속에 구조화한다. 예컨대 피아니스트는 피아노 연주를 잘 할 수 있는 것은 몸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었기 때문이다. 몸의 구조화는 부단한 실천과정을 거쳐서 형성되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수행(修行), 수신(修身)을 강조하는 동양철학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발견된다.

 

 

 

 동양사상에서 본 몸


 동양철학은 추상적 이론보다는 구체적 실천에 우위를 두기 때문에 유가, 도가, 불가를 막론하고 몸의 수행에 관심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하였다. 동양의 의학이 기계론적 바탕에 근거를 둔 서양의 의학과 그 도식이 다른 이유는 몸에 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에는 보이지 않는 기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이다. 흐르는 기는 선진제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념인데 이 기가 천지 사이에 가득 차 있으며 인간의 마음과 몸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고대 중국의 대표적인 신체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도덕적 마음이 몸을 통하여 실천된다는 맹자의 천형관(踐形觀) 2. 몸이 사회규범(禮)과 분리될 수 없다는 순자의 예의관(禮義觀), 3. 우주 대자연의 흐르는 기가 우리 몸에서 운행한다는 기화(氣化觀)이다.

 


 

 첫째, 맹자의 선형관은 정신화된 신체관이다. 맹자에 의하면 인간은 몸(形)과 흐르는 기 그리고 마음(心)이 하나가 되어 있는 존재이다. 마음은 밝은 의식층이고 몸과 흐르는 기는 어두운 비의식층이다. 인간의 의식 주체는 어두운 몸과 흐르는 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도덕의식은 수련을 통하여 몸의 기를 통하여 나타나게 된다. ‘덕이 몸을 윤택하게 한다(德潤身)’든가, ‘온몸은 말을 하지 않아도 깨우친다’라는 말처럼 군자의 몸은 그 독특한 도덕적인 빛을 발한다. 옆에 있는 사람은 그 몸이 전달하는 특수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성인 군자의 몸은 일종의 정신화된 신체이여서 도덕적인 빛을 발휘하고 있다. 호연지기(浩然之氣)는 바로 이러한 정신화된 신체에서 나오는 도덕적 힘이다. 따라서 맹자는 오직 성인만이 몸을 밝아 나갈 수 있다(踐形)고 하였다. 다시 말해 성인만이 수양을 통하여 온몸으로 도덕을 실천할 수 있다는 말이다.

 


 

둘째, 수자의 예의관은 사회화된 신체관이다. 순자에 의하면 배움(學)은 예(禮)를 읽고 성인이 되는데서 끝난다고 한다. 순자는 마음과 성질을 나누어 성질은 가꾸어지지 않은 바탕이며 그 속에는 선(善)이 들어 있지 않은 자연의 기이므로 다스리고 가꾸어야 하는 것이다. 누가 다스릴 것인가? 그것은 바로 마음이다. 명확한 의식은 어두운 비의식층인 몸과 기를 다스리어 사회적 질서를 만들어 이것을 지키도록 하였다. 순자가 생각한 몸은 사회규범인 예와 떨어질 수 없는 사회화된 몸이다. 수신으로 다져진 군자의 인격은 풍부한 문화적 내용을 가지고 있으므로 군자의 몸은 문화계통(禮)의 기호(sign) 또는 지표(indicator)일 뿐만 아니라 예의 체현인 것이다. 순자의 “예로서 몸을 다스린다.는 말은 자연적 몸(physical body)을 사회적 규범을 지키는 예의화된 몸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셋째, 동양의학의 신체관을 대표되는 기화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양의학은 살아 움직이는 몸을 기가 흐르는 그릇으로 보는 입장이다. 기의 흐름이 고르지 못할 경우 질병이 생긴다. 즉 음과 양, 허와 실, 한과 열 등의 불균형으로 인하여 일어난다고 보았다. 따라서 치료의 목적은 병의 원인을 공격하여 말살하는 것보다는 몸의 기의 균형을 되찾고 몸 안의 자연치유능력을 활성화함으로써 저절로 건강하게 되는 것을 지향한다.

 


 

 몸의 기본구조를 경락의 분포로 보는 것이다. 경락이란 기의 에너지가 몸 안을 순환하는 통로이다. 이 통로의 흐름이 막히면 몸과 마음에 이상이 생긴다. 침과 뜸은 경락에 있는 경혈을 자극하여 기의 흐름을 순조롭게 하는 것이다. 경락은 신경계와 혈관계 등과 똑같이 온몸에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경락은 몸을 해부하여 현미경으로 관찰해도 보이지 않는다. 경락은 살아 있는 몸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다. 경락을 흐르는 기는 실리작용과 생리작용을 결합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 ‘황제내경’은 슬픔(悲)은 호흡기, 분노(怒)는 자율신경계, 기쁨(喜)은 심장과 심신작용 사려(思)는 소화기, 두려움(恐)은 비뇨생식기와 각각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였다. 경락계통은 신경계통처럼 감각에 의하여 그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 또한 자율신경처럼 단지 내장기관만 관계하는 회로가 아니다. 그것은 운동기관과도 관계하는 회로이다. 경락 계통은 이 세 가지 회로를 합쳐 온전한 것으로 한다. 이것을 유아사 야스오는 무의식의 준신체정합계통(holistic unconscious quasi-body system)이라고 명명하였다. 이처럼 동양사상은 철학이나 의학을 막론하고 모두 보이지 않지만 우리 몸에 흐르는 기에 근거를 두고 전개되었던 것이다.


 

 “신체의 영원성 장생불로(長生)不老)를 추구하는 도교에서 몸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 역시 기를 바탕으로 내단(內丹), 존사(存思 이론을 전개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단전호흡 이론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신유가에서 말하는 ‘몸’은 천지만물을 하나의 몸으로 보는 왕양명 철학에서 그 극치를 이루고 있다.”

 

욕망 좇는 틀 혹은 수양의 통로 몸 

강신익 조광제 등 6명 집필/운주사/2만원


 

 
몸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람은 현실에서 몸으로 존재한다. 한 인간이 아무리 숭고하고 초월적이며 정신적으로 높은 성취를 이룬다 해도 그는 몸에 의지해, 몸 속에 존재한다. 동시에 몸은 온갖 욕망을 받아들이는 장이다. 이 놈의 몸만 없으면 인간이 욕망 탓에 타락하는 일도 없을 텐데…언제나 몸이 문제다.

밝은사람들연구소 박찬욱 소장이 기획하고 강신익(인제대 의과대 교수) 정준영(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 변희욱(서울대 철학과 강사) 성태용(건국대 철학과 교수) 우희종(서울대 수의대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씨 등 인문학자들이 참여해 펴낸 몸, 마음공부의 기반인가 장애인가는 인간에게 이렇듯 복잡미묘하고도 중대한 고민거리인 몸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의 글 '몸과 살, 그 신비하고 불투명한 토대'는 서양철학사가 몸과 마음을 어떻게 다뤄왔는지 간명하게 정리해 이 책의 길잡이 구실을 한다. 그는 플라톤이 몸을 '영혼의 감옥'이라고 봤다는 점을 먼저 지적한다. 체액과 살덩이로 이뤄져 있고 욕망에 좌지우지되는 몸을 벗어나 영혼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때에야 인간은 순수한 이상향에 가닿을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서양철학의 기초가 됐다. 이런 생각을 받아 "나는 사유다"(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확고하게 육체와 영혼의 분리 원칙을 정립한 이는 데카르트였다.

그러다 니체가 나타났다. 니체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나는 몸이다"라고 선언했다. 사람은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인데 둘을 분리하면 어떻게 인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느냐고 비판한 것이다. 니체의 등장을 서양철학사에서 벼락 같은 충격이자 혁명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이 같은 그의 혁신적 인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 글은 이 같은 니체의 몸 일원론을 현대철학으로 전개한 메를로-퐁티까지 소개한다.

 
  한 남성이 자연 속에서 명상하며 심신을 닦고 있다. 몸은 욕망이 활개를 치는 장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완성시켜주는 마음공부의 기반이다. 국제신문 DB
강신익 교수는 '의학, 의술, 의덕-삶을 치유하는 몸과 마음 공부'에서 가짜 약을 처방해도 환자가 처한 심리적·사회적 상태에 따라 실제로 큰 효능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하는 플라시보 효과의 예를 든다. 플라시보 효과는 19세기에는 존재할 수 없는 현상으로, 20세기 들어서는 일시적 심리현상으로 폄하당하다 20세기 말부터 그 실체를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강 교수는 이를 사례로 들며 몸과 마음이 둘일 수 없고, 몸은 자연공간이면서 동시에 도덕공간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몸에 대한 공부'로 요약되는 의학은 '몸과 마음의 공부'이자 '몸 공부를 통해 마음을 공부하고 삶을 치유하는' 체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어딘가 모르게 조금씩 불완전하지요. 사과나무에는 잘 익은 아름다운 사과뿐만 아니라 조금씩 벌레 먹고 썩은 것이 많지요.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사람은 눈이 나쁘고 어떤 사람은 썩은 이빨을 가지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계산을 잘 못하고 어떤 사람은 용기가 없어요. 그렇지만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이데아의 세계에는 완전한 것들로 가득차 있어요. 완전한 사과 완전한 사람 완전한 책상.....

 

원래 이 세상을 만든 조물주가 완전한 이데아의 모습을 본 따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모든 것이 조금씩 불완전하지만 아주 조금씩은 이데아와 비슷한 모습이래요. 이데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이데아와 비슷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겠지요.

 

서양의 철학 전통이 몸과 마음을 확실히 구별해 영혼을 높이 사고 몸을 장애물로 여긴 전통이 분명한 반면, 동양의 불교·유가·도가 등은 둘을 대립적 존재로 보기보다 조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봤다는 점도 흥미롭다. 성태용 교수는 '수신과 양생: 몸 닦음과 마음 닦음의 조화'에서 수신(修身) 수기(修己) 등의 개념에서 엿보이는 것처럼 중국철학에서는 몸을 단순히 신체로 여기기보다 '자기' 또는 '자신'으로 확장해서 생각해왔음에 주목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같은 관념이 여기 해당한다. 공적인 관점에서 자신(몸)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군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지만 사적인 개체성에 함몰되는 사람은 소인이 된다. 이렇게 되면 몸은 수양의 갈림길이 된다.

책은 다양한 각도에서 몸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해준다. 전반적으로 '몸이 마음공부의 기반인가 장애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논의를 전개한다기보다 각 분야의 인문학자들이 자신의 관점에서 관련 논의를 소개하고 풀어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플라톤은 몸은 선한 영혼을 가두어 악하게 만드는 영혼의 감옥이라고 불렀어요. 또한 몸은 영혼이 이데아를 보지 못하게 가리는 창살이기도하구요. 보고 듣는 것은 완전한 이데아를 보고 듣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차라리 눈을 감고 두 귀를 막고 마음속 지혜의 눈으로 볼 때 이데아가 보인답니다. 이데아를 보는 마음속의 눈 그것은 바로 이성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진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병든 사람이 있다면 가족들이 의논하여 어떻게 그를 치료할 것인가 결정해서는 안 되지요. 가족들이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반대한다고 해도 의사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돈보다도 마음을 올바로 갖는 일에 힘쓰라고 충고했습니다.

“돈, 명예, 재물이나 신체가 아니라 훌륭한 영혼을 갖도록 노력하라!”

마음은 마치 자동차의 핸들 같은 것입니다. 핸들이 고장 나면 자동차는 차도를 벗어나서 사람이 다니는 인도로 올라올 수도 있으니까요. 사람들을 아끼는 마음 없이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