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스크랩] 영혼의 종교 (7) 거룩한 삶 - 종교적 에로티시즘

주혜1 2010. 7. 24. 17:00

 

-일상생활의 깊이와 거룩함을 배양하는 길잡이-

토마스 무어 / 김영운 옮김

 

영혼의 종교(The Soul's Religion) 제7부


 

 

 

 

 

33. 종교적 에로티시즘

 

관능은 에로티시즘의 자매다. 그러나 사람들은 둘 다 영성에 반대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불필요한 분리는 필경 영성과 정서와 일상생활에 대하여 가장 해를 끼치는 것이리라. 왜냐하면, 욕망과 쾌락은 삶에 자극을 주며 존재 이유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욕망은 우리를 전진하게 만들고, 그것을 의심하는 일은 사람 자체를 문제 삼는 일이 된다.

삶은 에로스와 로고스 두 흐름으로 흘러간다. 로고스는 명료하든지 신비하든지 간에 의미이다. 에로스는 모든 것을 연결되게 만드는 힘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가에 대한 의미(로고스)를 지니는 것과 진행시키려는 욕망(에로스)을 지니는 것 또한 본질적이다. 로고스는 공부, 연구, 분석, 명상 그리고 의미의 탐색 같이 익숙한 일상적 형식을 취한다. 에로스는 짝을 찾는 일이나 가정을 꾸리는 일 그리고 섹스에 대한 욕망 같은 것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껏해야 그들은 음양과 같이 함께 작용도 하지만, 대개는 한 쪽이 다른 쪽을 이긴다. 때때로 한쪽을 더 좋아하면 다른 쪽에 반작용을 일으킨다. 우리가 삶을 합리화시키면 시킬수록 욕망은 더욱 강박적으로 커진다. 우리가 더욱 물질적으로 될수록 우리의 생각이나 사상은 더 거칠어지고 덜 이성적이 된다.

 

현대 생활 속에서 우리는 연구, 발명 그리고 분석 같은 정신 활동은 잘한다. 그러나 에로틱한 일은 잘 못한다. 오늘날 성적 혼란이 거의 삶의 자연스런 일부처럼 보인다. 그래서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알아내려고 정처 없이 방황하는 것을 막연하게 간절히 바라는 듯이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인생의 초기에 다른 어떤 것보다도 만족스러운 섹스 파트너를 찾는 일에 더 많이 쫓기듯이 보이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실제의 간절한 바람이 섹스보다 더 심층적인 데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순히 파트너가 아니라 살아있다는 느낌이다.

 

이 모든 이야기가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나에게는 매우 리얼하다. 나는 오십이 되어서야 나의 욕망들이 스스로 가려내졌다. 여러 해를 두고 나는 내가 의지하고 살 아이디어, 그리고 나의 일에 연료가 될 아이디어를 찾으려 했다. 그 같은 시기에 나는 불안정하고 연결되지 않는 성적 열망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개인적인 응집력이란 느낌이 모든 혼돈과 삶에 대한 고통스런 시도에서 솟아났다. 그러나 내가 놀란 것은 느낌 그 자체는 분명 내 것이었는데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그 속에 있는 에고는 훨씬 희박하였던 것이다. 내가 발견해야 했던 것은 나의 본성이 무엇이냐, 의지라기보다 출생으로 볼 때 나는 누구냐, 그리고 누구에게 무엇에 나는 부름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의 영혼의 구체적인 특성을 찾아야 하였고, 내가 일차적인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였던 피상적 목표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사춘기 때에 별다른 노력 없이 상상 속에서 성적 공상이 생기는 것을 즐기는 것이 얼마나 만족스러웠던가를 기억한다. 그러나 그런 이미지들이 싫증이 나든가 사라졌을 때,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에 기쁨 또한 비슷하게 느꼈다. 나의 실존 - 이를 테면, 나의 정체성 - 에 대한 로고스가 사춘기의 나르시시즘 속에 적절히 표현 되었던 것이 신비스런 성적 관심에 맞수가 되었는데, 그것이 명백히 더 큰 의미를 가리켜 주었다. 양쪽의 매력이 나의 인격 속에 응결되는 것과 상관이 있었다.

 

선의적인 교사들은 내가 에로틱한 것을 잊어버리고, 그런 것은 영성에 모순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나의 느낌이나 사적인 공상의 심층에서 그런 것을 절대로 믿지 않았다. 나는 에로스에 충실한 것에 대하여 상당히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가톨릭 교육의 타당성에 확신을 갖게 되었으나, 그런 죄책감은 치러야 할 작은 대가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의 성적 욕망은 삶 속에서 흔한 일로서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나는 흥미있는 것을 공부하였다. 내가 즐기는 문체로 글을 썼다. 내 자신이 가르침을 받기 원하는 방식으로 가르쳤다. 알고 보니 밥벌이 방법이 그 숱한 위험과 문제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비록 분투 애써 노력하는 것에 비하면 작게 보일지라도 부모 노릇에 기쁨을 누리기로 말하면,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는 도전도 감당할 수 있는 것임을 배웠다.

 

지난 25년 동안 나는 많은 사람들의 고뇌와 열망에 대하여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종종 그런 말을 쓰지 않았으나 자신들의 에로틱한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들은 결혼과 이혼, 연애사건과 별거, 열망과 공포에 대하여 이야기를 풀어낸다. 순수한 영에 봉사하기 위하여 성욕을 다스려야 한다고 설득당한 사람이 많았다. 물론 그들은 미덕에 대한 바람과 격정의 힘 사이에서 옥죄임을 당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치료를 받으러 오는 까닭은 이상과 욕망 사이의 긴장에서 오는 불편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하여 성적으로 억제해야 된다는 것을 믿지 않게 되었다. 인간관계 속에서 성욕이 영을 거슬러서 작용하는 악마적인 본능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고, 도덕성에 걸림돌이 되는 일차적인 장애가 된다고 지각할 필요 없이도 윤리적일 수 있다. 이런 이분법은 사람들이 성욕을 얼마나 오해하고 잘못 다루는가를 보여줄 뿐 아니라 영성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자주 비뚤어져 있는가를 또한 보여준다.

 

사람들은 성욕을 이겨낸 승리감은 느끼면서 그런 억제가 어떻게 거꾸로 뒤집어져서 우울증을 낳는지는 눈여겨보지 못한다. 덕을 살리는 쪽의 느낌보다는 오히려 평범하고 불완전한 사람이 되어서 소명을 찾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다른 사람 곁에 있어주고, 슬플 때 기도하는 편이 훨씬 더 좋을 법하다. 평범한 의미에서 덕스러워진다는 것이 성숙하게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삶에 대하여 관대하게 민감하게 응답하는 것보다는 자아완성에 더욱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종교인들 가운데는 심지어 결혼 생활에서조차, 나날이, 해를 거듭하여, 성욕을 제어하면, 이런 억제가 자신들을 더욱 신에게 가까워지게 만들어 준다고 확신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해를 거듭해서 에로틱한 삶을 무시하다가는 부정적인 결과에 부딪힌다. 그렇게 되면 우울해 질수도 있고 혼란에 빠지거나 분노하거나 도학적으로 될 수 있다. 결혼생활을 하기에도 어려움이 생긴다. 나는 많은 사례를 보았다. 배우자 한쪽이 소박하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며 성적인 억제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고 느끼는 반면에 상대방은 정반대로 느끼는 경우가 있다. 결혼은 불필요한 긴장을 겪어야 하고, 지극한 관용이 있어야만, 그리고 운이 좋아야 겨우 살아남게 된다.

 

섹스와 영이 반대된다고 상상하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는 개인적인 비극이 되고, 종교 지도자들이 구하고자 하는 결혼과 가정 그 자체에 상처를 입힌다. 그들이 관대한 열린 마음으로 하는 섹스가 심오한 기쁨을 낳게 해주고, 바로 이런 기쁨이 결혼과 가정을 함께 묶어 준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친밀하게 살아가는데서 오는 복잡함과 좌절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런 것은 모두 견뎌내고 또 해낼 수 있는 것들이다. 만약에 기쁨의 강력한 지지를 받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런 기쁨은 사랑하는 행복한 섹스에 의해서 자랄 수 있다.

 

수많은 종교인들 사이에서 섹스에 대한 두려움은 흔히 항의를 너무 많이 하면서 반동 형성으로 작동한다. 나에게 경건한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런 전형이다. 그는 흔히 성적순결에 대하여 설교하는데, 그 자신은 덜 불안한 사람보다는 훨씬 큰 정도로 섹스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만약 그리스에 신전들을 보러 갔었노라고 그에게 이야기한다 치면, 그는 곧 “거기에 누드 비치가 있지 않던가요?” 하고 말한다.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좋은 영화를 봤노라고 하면, 그는 “난 케이블 방송에 나오는 성적으로 추잡한 그런 거는 안 봐요.” 하고 말한다. 영적인 사람의 섹스 강박관념은, 종종 비판적이고 부정적이지만, 그런 사람에게 성적인 편안함과 수용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가를 보여주는 것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상상하기를 영성이란 완전과 높은 미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이며 신생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너그럽게 끌어안는 것이라 한다면, 우리는 섹스가 종교로부터 무엇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종교에 공헌을 많이 하는가를 보게 될지 모른다. 성적 성숙에 이르는 길을 찾는 일은 많은 일들의 질서를 잡는 일이다. 즉, 파워, 콘트롤, 신체적 편안함, 사랑, 관용, 윤리, 그리고 성 gender에 대한 지혜 같은 것들이 제자리를 잡게 한다. 이 모든 일이 좋은 섹스와 영성개발에 서곡이 된다. 그들은 손에 손 잡고 나란히 가며, 결과적으로 한쪽이 다른 쪽을 심오하게 끌어올려 준다는 진실을 드러낼 수도 있다.

 

심지어 하나님이 얼마나 성적인가를 이해하게 될 터인데, 이를테면, 자연계 속의 관능과 삶 속에서 신이 현존하는 친밀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라 하겠다. 내가 꿈꾸는 교회 dream church 에는 아가서를 화려하게 벽에다 그리고 찬란한 서체로 벽면 도처에 사랑과 섹스는 바로 영성 생활의 기초임을 상기시키고, 수많은 전승 속의 신비가들이 말하듯이, 하나님은 다른 무엇보다도 애인이심을 상기시키도록 하고 싶다. 나는 로렌스 D. H. Law- rence의 기발한 시와 에릭 질 Eric Gill의 에칭과 인도의 에로틱한 신전의 조각들도 포함하고 싶다.

 

섹스와 영 사이에 평화를 이루는 단서는 예술과 수많은 종교의 신화들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신들과 여신들을 숭배하였는데, 그들은 아름다운 아프로디테 Aphrodite에서부터 탐욕스러운 프리아포스 Priapus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다른 방식으로 있는 그대로 성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인도에서는 영의 성적인 측면이 숭배자로 하여금 생명 자체에 대한 설명이 되는 창조와 파괴의 원칙들 속으로 깊이 들어가도록 이끈다. 미국 원주민의 코요테 Coyote 상은 성적 자극의 기교성과 그에 대하여 사람들이 지니는 공포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코요테는 매력적이며 궁극적으로 창조력이 된다. 심지어 기독교에서는 예술가들이 성령을 동정녀 마리아를 잉태한 새의 형태로 그린다. 그리고 신비가들은 자신들의 하나님 경험을 성적인 언어로 기술한다.

 

이런 감동적인 이미지 속에서 섹스와 영은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 둘 다 생명을 드러내는 데 개입하고 있으며, 때로는 그들이 동전의 양면처럼 되어서 각기 다른 관점에서 보는 가장 기본적인 창조성이 되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런 관계를 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드러내는 성적인 특성의 의미를 충분히 성찰하는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섹스가 주로 소통과 자극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대중 심리학으로부터 얻는 제한된 아이디어를 수용한다. 그러나 종교 문헌이 보여주기로 말하면, 섹스는 훨씬 더 심층적인 요인이며 영성 생활에 있어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

 

심리치료사로서 나의 경험이 말해주는 것이 있다. 만약 성적인 특성 전부를 그 본질로 승화시키기로 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거라곤 순수한 생명력이 될 것이다. 조건을 제대로 갖추면, 성적 행동은 영화로운 삶의 시발점에서 생생하게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갖게 해 줄 수 있다. 물론 섹스는 우리를 절망 속에서 끌어들일 수도 있고, 더럽혀질 수도, 소진될 수도 있는 느낌을 갖게 한다. 모든 일에는 그늘이 있다.

 

성적 역기능에 대한 문헌은 종종 문제를 묘사하기 위하여 속박감, 신경과민, 실행불안, 두려운 기억 등등 이미지 같은 것을 사용한다. 더 큰 그림에서 보면, 이런 이미지들은 생명력에 대한 저항이나 생명의 흐름을 막으려는 의지를 암시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신의 의지에 저항하는 것과 대등한 것이 아닌가? 신이 우리의 성적 특성 곧 성욕 속에 있고, 역설적으로 말해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억제하려고 그토록 애를 쓴다. 왜냐하면, 생명력 그 자체인 신이 그밖에 다른 어떤 곳도 아닌 섹스 속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성욕이 제시하는 도전 속으로 깊이 있게 충분히 들어가지 못하면, 우리는 섹스를 물신 fetish으로 변질시킨다. 그렇게 되면 결정적으로 기쁨이나 생명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행위가 되고 만다. 내재적인 가치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방법과 테크닉의 과장과 반복을 통하여 필요한 것을 거기서 얻으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물신으로 행위를 할수록 영성은 더욱 숨겨진다.

 

우리의 성욕에 대한 영성적 치유에는 여러 가지 도전적인 테스트가 필요하다. 우리는 길을 찾아서 생명이 부당한 간섭을 받지 않은 채 우리를 통과하도록 하고, 에고가 방해하지 않도록 만들고, 신이 분명히 반성적 antixuasel 이 아니라 성적이라고 상상하는 길을 찾고, 우리의 구체적인 성욕이 이승에서 받은 소명의 일부일 뿐 아니라 신이 부여한 것을 알고,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거기에 충성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결국에는, 우리의 고귀한 성욕의 미로를 헤쳐 나감으로써 우리는 그것이 영에 이르는 직접적인 길임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메모 :

'스토리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침묵기도 - 토마스 머튼  (0) 2010.10.12
행복의 제1 법칙  (0) 2010.10.07
관상기도  (0) 2010.07.06
문 두드리는 예수님  (0) 2010.07.04
[스크랩] 모든 벽(壁)은 또 하나의 문(門)이다 /이수철 신부  (0) 2010.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