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직하고픈 이야기

[스크랩] 사진이 태어나자 화가들은 어떤 ‘인상’ 썼을까. ‘근대 도시 파리의 삶과 예술, 오르세미술관전’을 보고

주혜1 2014. 7. 24. 11:54

사진이 태어나자 화가들은 어떤 ‘인상’ 썼을까

 
곽윤섭 2014. 05. 07

 

 
‘근대 도시 파리의 삶과 예술, 오르세미술관전’을 보고

 

 

 정밀한 그림의 가치 상실…빛의 재해석으로 다른 길 모색
 사진전 열고 회화 종말론까지…“예술에 산업 섞어” 경멸도


 

  앙리루소-뱀을부리는주술사.jpg » 앙리루소-뱀을부리는주술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기획특별전 ‘근대 도시 파리의 삶과 예술, 오르세미술관전’이 시작되었다. 8월 31일까지. (http://www.orsay2014.co.kr, 02-325-1077) 국립중앙박물관은 서울 지하철 4호선 이촌역 2번출구로 나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걸어도 좋은 거리였으나 2012년 12월 지하보도를 만들었고 이 중 160미터는 무빙워크를 설치해 아주 편해졌다.

 

 

이번 ‘오르세미술관전’을 요약하면 19세기 후반 인상주의 이후 새롭게 등장한 미술가들의 작품과 벨 에포크로 일컬어지는 시기의 파리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다. 클로드 모네,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등의 회화작품이 절반 정도이며 그 외 조각, 공예, 드로잉, 사진 등이 절반인데 총 175점이 들어왔다.

 

사진도 있다! 그래서 5월 2일 오전 개막기자회견장에 가서 쭉 둘러보고 왔다. 어찌 파리 현지의 오르세미술관과 비교하겠느냐만 잠깐 동안이나마 오르세에서 서성거리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오르세 관장이 이번 전시를 맞아 직접 한국에 왔고 이날 기자회견에서 뭔가 설명하는 모양이었으나 오불관언,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이 방 저 방 왔다갔다하면서 모네의 <양산을 쓴 여인>도 보고 손바닥보다 더 작은 사진도 보고 비교적 큰 에펠탑 사진도 봤다. 무희를 다룬 에드가 드가의 조각도 있고 그림도 있다. 원본의 아우라…. 같은 말을 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사진’으로만 보던 대가의 이름난 작품을 전시장의 공기 속에서 보고 듣고 맡는다는 것은 차가운 스마트기기의 기운과 비할 일이 아니다. 비행기 타고 프랑스에 가지 않아도 최소 8월 말까지는 지하철 한 번 갈아타면 갈 수 있는 지척에 오르세의 작품이 있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흐뭇하다.

 

 

고갱-노란건초더미.jpg » 고갱-노란건초더미

로트렉-검은모피를두른여인.jpg » 로트렉-검은모피를두른여인

르동-감은눈.jpg » 르동-감은눈

모네-양산을쓴여인.jpg » 모네-양산을 쓴 여인

소리유-백화점.jpg » 소리유-백화점

스타이켄-마티스.jpg » 스타이켄-마티스

에펠탑의 페인트공.jpg » 에펠탑의 페인트공

조르주가랑-에펠탑.jpg » 조르주가랑-에펠탑

폴 르누아르- 1900년 만국박람회장을 찾은 방문객들.jpg » 폴 르누아르- 1900년 만국박람회장을 찾은 방문객들

폴시냐크-아비뇽교황청.jpg » 폴시냐크-아비뇽교황청

photo.jpg » 사라 베르나르의 상체를 작업하고 있는 장 레옹 제롬, 시청앞의 시장풍경-찰스 네그르(네그르는 원래 들라로슈와 앵그르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고 있었으나 사진이 탄생하자 본격 사진가로 전업한 인물 중의 한명), 파리의 꽃술뿌리기 축제-폴 제니오, 손님을 기다리는 매춘부-으젠 앗제/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parasol.jpg » <양산을 쓴 여인>은 비슷한 작품이 더 있다. 오른쪽은 <양산을 쓴 여인-모네부인(까미유)과 모네의 아들>이란 작품명으로 미국에 있다. 이 밖에도 양산을 쓴 여인이 왼쪽을 향하고 있는 작품도 오르세가 소장하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필연적으로 이들 인상주의 화가들과 사진의 관계가 떠올랐다. 여러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진 발명에 열을 올리던 19세기초, 정확히 1839년에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서 종신직 사무총장 프랑수아 아라고가 역설하여 다게레오타입(루이 다게르가 세계최초의 사진술인 니엪스의 헬리오그래피기술과 제휴하여 만들어낸 사진인화기법으로 니엪스가 먼저 사망하는 바람에 다게르는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을 공표하면서 사진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물론 니엪스가 사실상 앞섰다는 것이 정설이나 프랑스 정부가 사진을 인정하고 사진술의 특허를 사들여 바로 그날 국민들에게 풀었던 것이 1839년이다.
 
 

<의회에서의 아라고의 연설 후에 일어난 일. “몇 시간 후 안경점에는 손님들이 쇄도했다. 이처럼 많은 열광적인 애호가들의 열정을 충족시켜주기에는 렌즈나 암실 모두 부족했다. 사람들은 실험 재료를 들고 가면서 지평선 위로 기우는 태양을 유감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다음날 날이 밝자 여러 집들의 창문에서는 옆집의 천창의 모습 또는 굴뚝이 쭉 늘어선 광경 등을 건판에 옮기려고 흠칫흠칫 겁을 내면서도 온갖 애를 쓰고 있는 수많은 실험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루이 피기에, 『사진술-현대의 주요한 과학적 발견의 역사 전람회』, 파리, 1851년 > 발터 벤야민, <도시의 산책자> 중에서
 
 

어쩔 것인가. 그들이 태어나보니 이미 사진이 나타나있었다. 대표적인 인상파화가중에서 가장 빠른 편이 피사로였는데 1830년생이었다. 에드가 드가는 (18)34년, 끌로드 모네는 40년, 폴 세잔은 사진이 공인된 39년에 각각 태어났다. 후기인상주의의 대표주자인 고갱은 48년, 고흐는 53년으로 인상주의 선배들보다 조금씩 나중에 태어났다. 후기인상주의와 인상주의의 명단이 일부 겹치기도 하는 것은 인상주의자 중에서도 후에 노선을 바꾸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쨌든 인상주의의 특징은 빛에 대한 재해석이다. 시간과 날씨에 따라 변화무쌍한 빛을 어떻게 하나의 색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는 반항이었다. 사진의 내용에 있어서도 그전의 사조를 넘어서 (프랑스라면) 거리, 카페, 공원 같은 파리의 일상과 풍경을 주로 다루게 되었다. 산업혁명으로 중산층이 많이 늘어났으며 사진의 공표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법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화가들은 사진의 도래와 더불어 ‘멘붕’에 빠졌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사진의 덕을 톡톡히 봤고 이번에 주로 가져온 후기인상주의 화가들도 역설적으로 사진의 도움을 받았다. 모든 화가들이 사진을 환영한 것은 아니다. 폴 들라로슈는 사진과 직면하자 회화의 종말을 예언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는 사진을 경멸하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산업을 예술에 뒤섞고 있다. 산업이라니! 우리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산업은 자기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하며 오직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에만 전념하는 우리들 신성한 아폴로의 학교 계단에 와서 자리를 잡아선 절대로 안 될 일이다.
 사진과 사회(지젤 프로인트), 눈빛
 
 

앵그르와 숙적관계에 있었던 외젠 들라크루아는 사진의 가치를 알아봤다. 그러나 사진을 보고 베끼는 회화에 대해서는 경계했다. “다게레오타입을 하나의 보조역으로서 일종의 사전으로 이용하는 대신에 회화작품 자체로 만드는 화가들에 대한 비판이다……. 예술가는 한마디로 말해 다른 기계에 얽매인 기계가 된다. (위의 책)
 

들라크루아는 최초의 사진협회 회원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귀스타브 쿠르베도 사진의 애호가였다. 실제로 그는 사진을 보조수단으로 삼아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에드가 드가는 살아있는 동안 사진전도 한 번 열었던 열렬한 사진가였다. 1956년 6월호 <이미지>지에 실린 짧은 기고문 <드가, 아마추어 사진가>를 보면 당시로는 최초 공개되는 에드가 드가의 편지 8통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이 편지의 발견으로 인해 에드가 드가의 사진가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학자들의 연구에 불이 붙는다. 부분 인용해 재구성한다.
 

“에드가 드가는 1895년 8월 12일부터 22일 사이의 기간 동안 퓌드 돔의 산악지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 기간에 사진용품업을 하는 타세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내용을 보면 루미에르가 만든 블루라벨 브랜드의 건판 6상자를 주문하거나 역시 루미에르가 만든 판크로마틱건판 수십 상자를 주문한다. 또한 인화과정에서 네거티브에 묻은 얼룩을 깔끔하게 지울 수 있는지 묻기도 하고 17일에는 거의 오밤중까지 사진을 찍으려고 했으나 18일 편지에선 까맣게 태워먹었다고 쓰기도 했다. 최소한 휴가 동안 사진에 심취했다는 증거다. 폴 발레리는 그의 책에서 ‘드가는 사진을 사랑했고 높이 평가했다. 그 무렵은 예술가들이 사진을 경멸하고 있거나 그들의 예술에 사진을 이용할 시도도 하지 않으려고 하던 때다. 드가는 근사한 작품을 하나 만들어 내게 주었는데 아끼면서 보관하고 있다. 큰 거울 옆에 벽에 기대고 있는 말라르메가 보이고 르누아르는 소파에 있다. 거울 속에는 유령처럼 보이는 드가와 카메라가 있고 말라르메의 부인과 딸이 보인다. 아홉 개의 가스등, 그리고 15분이란 끔찍한 노출시간이 이 작품을 만들어낸 조건이라고 한다.’고 적었다. 그 시기의 모든 화가들 중에서도 드가는 사진이 화가들에게 가르쳐야만 하는 것에 대해 가장 인식을 깊이 하고 있었다. 순간 사라지는 이미지를 잡아챈다는 것, 움직이는 형태가 만들어내는 우연한 병렬배치, 가끔은 내려다보고 또 가끔은 올려다보는, 그리하여 거친 원근법을 제공하게 되는 촬영장소의 관점 등에 심취해있었다. 거듭하여 그의 캔버스는 우리들로 하여금 카메라가 만든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Image, 1956 6, 버몬트 뉴홀
 
 

그 외에도 많은 화가들이 사진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 명백하다. 누군가는 드가처럼 직접 찍어서 보고 그렸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직접 찍기가 싫어서였는지 사진을 사서 참고하기도 했다. 찍었든 샀든 사진을 참고하여 그렸다는 것은 사진의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다. 한 논문에선 오히려 에드가 드가의 그림이 당시 사진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도 있다. 새로울 것도 없는 주장이다. 회화주의 사진의 바람이 있었는데 이것은 사진이 회화를 해방해놓고 다시 회화가 이미 장악하고 있는 예술세계에 편입되고 싶어하는 자기반동에 다름없다. 사진과 회화 사이의 이런 구조는 역사를 통해 이어져왔으며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여 사진을 파괴하여 예술시장으로 진입하려는 몸부림이 이름하여 사진작가라고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너무 많이 돌아왔다. 인상주의자들은 사진이 탄생했으니 정밀하게 있는 그대로를 그릴 필요가 없어졌다. 필요라기보다는 정밀한 그림의 가치가 상실된 것이 더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다. 사진과 다르게 그려야했고 그래서 거친 터치, 빛의 재해석이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번 오르세리스트에 포함된, 인상주의라는 이름을 끌어낸 끌로드 모네가 사진을 직접 찍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찍힌 사진은 많이 있다. Claude_Monet,_Impression,_soleil_levant.jpg » 클로드 모네-인상 해돋이(이번 전시엔 없으나 이해를 돕기위해) 모네는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1874년 나다르의 사진가게에서 열린 인상주의 화가들의 첫 전시에서 <인상, 해돋이>를 걸었고 평론가가 신문에 쓴 적의적 기사에서 “인상이라….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 스스로 감명깊은 대목이 있다는 것이다. 그 그림에는 분명히 어떤 인상적인 면이 있다……. 얼마나 자유롭고 얼마나 손쉬운 솜씨인가! 미숙한 벽지라도 이 바다풍경(해돋이)보다는 더 완성도가 높다.”라고 언급하는 바람에 유행어가 되었다. 이 전시에 동참했던 화가들도 인상주의라는 말을 수용했고 이제 이들은 인상주의 화가가 되었다. 모네의 연작들 중에서 가장 유명해진 <루앙대성당> 연작을 만들 때 모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물들은 그리 단단하게 고정된 형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군. 가장 중요한 게 뭐냐면 나는 날마다 그 전날에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한단 말이지. 종국에는 나는 지금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야” 루앙대성당의 연작을 보면 아침, 저녁, 안개, 겨울철의 날씨 등에 따라 수십가지로 변하는 빛을 보여주고 있다. 연작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2년 동안 루앙대성당 길 건너에서 거주하면서 작업했다고 전해진다.


rouen.jpg » 모네-루앙대성당 연작중에서(이번 전시장엔 없으나 이해를 돕기위해)  

 

 

 

후기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나비파 등은 이제 곧 20세기로 건너가기 위한 징검다리 구실을 한 화가들이다. 마네의 <풀밭위의 식사>가 기존 화단에서 거부당하고 모네의 <인상, 해돋이>가 조롱거리로 전락하자 의기투합하여 <인상주의>를 자처한 인상주의 화가들 안에서도 화풍이 일치한 것은 아니었다. 인상주의의 기치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온 사람들이 생기고 인상주의 화풍에서 벗어나고 싶은, 상대적으로 젊은 화가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선배들의 색채, 형태, 패턴, 그리고 선의 터치를 부정하고 싶어했고 다르게 그렸다. 19세기 말 파리는 사진의 상업적으로나 외형적으로나 중흥기였으니 후기인상주의는 사진과 더 달라지고 싶었을 것이다.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젊은이라고 할 수 없다, 특히 예술분야에선.
 

“카페 아믈랭은……. 사진가나 밤에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알프레드 델보, 파리의 시간, 1866년, 발터 벤야민 도시의 산책자 299쪽 재인용
 

그나저나 나비파라는 낱말은 예전에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물론 나비가 Butterfly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비(Nabi)는 선지자를 뜻하는 히브리어다. 나비파의 젊은이들은 다같이 턱수염을 길렀다.
 
 

다시 조금 길을 벗어나보면 사진이 예술인지 아닌지를 놓고 연구해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이미 1862년에 프랑스 파기원(최고재판소)에서 사진은 예술이라고 판결을 받았다.

 

 

마예르와 피에르송 두 사람은 1855년부터 파리 시내에서 사진관을 열고 동업에 들어갔다. 초상사진 전문가들이었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고객으로 맞이하고 나서부터 이들 사진관은 많은 귀족과 예술계 인사들로 붐볐다. 1856년에 두 사람은 이탈리아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카보우르 백작의 초상을 제작했다. 1861년에 두 사람은 경쟁관계에 있던 다른 세 사람이 카보우르 백작의 초상을 가필한 사진들을 무단 복제해서 판매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위조라고 생각하고 법적 권리를 지키기로 했다. 위조가 성립하려면 사진이 예술작품이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1839년에 사진이 공표된 이래로 사진의 기계적인 면 때문에 순수예술로서 인정되는 뛰어난 솜씨의 수공기법과 상반되었다.
 
 

마예르와 피에르송의 변호사는 이렇게 주장했다. 화가를 예술가로 부르듯 <사진예술가>라는 단어를 내세웠고 사진가도 화가와 마찬가지 수법으로 사진을 제작한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
 
 

경쟁자들의 변호사는 이에 맞서 26인의 탄원서를 내놓았다. “사진을 어떤 식으로든 예술로 보는 것에” 반대하는 앵그르 같은 화단 인사들이 여기 포함되어있다. 피고 측 변호인들은 사진의 자동적, 기술적 성격을 지적했다. 1862년 1월 파리 형사 재판정은 고소인들의 고소를 기각했다. 그러나 4월 항소심 법정은 마예르와 피에르송의 손을 들었다.
 
 

“사진 데생이 그 사진을 제작하는 사람의 사고와 정신, 또는 취미와 지성의 산물일 수 있다”는 취지였다. 또한 법정은 “수공과 독립적인 완성은 대체로 풍경의 재생이나 시점의 선택, 음영 효과의 대비에 의존하여 초상에서는 인물의 자세와 의복 또는 장신구 배치에 의존하는데 이 모든 것이 예술적 감정에 좌우되면 사진가의 작업에 그 개성의 자취를 새긴다”라고 했다. 같은 해에 마예르와 피에르송은 책을 내고 “오늘, 법의 눈으로도 예술가와 대중의 눈으로도 사진은 예술이다. 사진가의 작품을 복제하는 것은 위조다”라고 썼다. (논쟁이 있는 사진의 역사)


이 판결이 최초의 법적인 승리이며 1862년 프랑스 최고 재판소(파기원)에서 최종 확정 판결을 받았다. 이로서 사진은 1862년에 예술작품이란 합법적 지위를 얻었다. 그렇지만 사고방식이 바뀌는데는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9세기는 물론 20세기 초반까지도 사진이 회화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뒤 여러 나라에서 속속 사진이 예술 작품지위를 획득하는 판결이 이어졌다. 인상주의 회화와 사진 사이의 관계를 놓고 어느 쪽이 영향을 받았는지 혹은 빚을 졌는지 연구해보는 것도 지금은 적절히 않다고 생각한다. 이 미개한 나라에서 미개한 21세기 초반을 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지금 예술을 따질 겨를이 없다. 게다가 ‘예술’은 이미 사기꾼들의 마당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오르세’를 보러 가는 것이 지금 무슨 호사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최소한 프랑스는 (한국보다) 선진국이다. 프랑스도 제국주의 국가중 하나로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든 야만의 시절이 있다. 타국을 겁박하지만 그러나 최소한 자국의 국민들은 챙긴다. 한국은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수탈을 당했으니 더 낫다고 할 것인가. 어떻게든 자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자국민을 겁박하고 있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은 후진국이다. 선진국 프랑스, 전세계 문화의 수도 파리의 19세기 후반을 본다는 것은 잠시라도 시름을 잊어버릴 수 있으며 뭐라도 배울 수 있는 기회다. 어쩔 것인가.

 

 

 

참고자료: 사진과 사회, 지젤 프로인트, 눈빛

논쟁이 있는 사진의 역사, D. 지라르댕 외, 미메시스

도시의 산책자, 발터 벤야민, 길

에드가 드가-사진과 회화의 관계, 김소영 (논문)

DEGAS: Amateur Photographer, Image 1956. 6

Impressionism, Wikipedia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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