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직하고픈 이야기

성북동의 하루

주혜1 2014. 9. 12. 20:41

성북동의 하루

如如 허은경

 

비가 제법 내리는 탓인지 최소한 열 명은 오리라던 기대와 달리 일행은 여섯 명 뿐이다. 더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마을버스로 성북동을 향해 출발하였다.

어린 시절에 우리 집은 지금은 없어진 삼선교 근처에 있었다. 할머니의 친척분이 성북동 산속에 살고 있어서 할머니는 이따금씩 놀러 갈 때 언제나 나를 데리고 가셨다. 지금의 간송미술관 근처에서 큰 개천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길이 왼쪽으로 휘면서 두 갈래로 갈라졌다. 지금은 미술관 옆으로 이전한 아담한 성북초등학교를 끼고 오른쪽으로 오르면 계곡을 따라 바로 호젓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숲속에는 어쩌다 서너 채, 아주 작고 납작한 집이 나무 사이로 보일 뿐이었다. 행인을 만난 기억도 없다. 바위가 흩어져 있고 항상 깨끗한 물이 풍부하게 흐르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다리가 하나씩 있었는데, 마지막 다리를 건너면 그 친척 집이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도 산속이었다. 풀 사이로 좁은 길을 따라 한참 걸어들어가야 비로소 집이 나왔다. 할머니 두 분이 담소하는 동안 나는 집 안팎을 드나들며 주변의 산속에서 놀았다. 가을에 밤을 줍던 기억도 있다. 그때는 정말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이었다.

추억이 깃들어 있는 성북동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 한국 최초의 민간박물관인 간송 미술관에 들렀다. 간송은 전형필(1906~1962)의 아호다. 그는 일제 강점기, 어려운 시기에 사재를 털어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를 사들였다. 그 문화재들은 연중 5월과 10월 중순에만 전시 개방된다고 한다. 아쉽게도 일주일 후에 전시가 시작된다고 하여 정원에 있는 문화재급 불상만 먼발치에서 보고 돌아 나오며 시집님의 침묵으로 기억되는 만해 한용운의 유택으로 향하였다.

성북동 골짜기로 더 들어가 좁은 계단과 가파른 언덕길을 꼬불꼬불 숨가쁘게 오르면 이끼 낀 돌담길이 이어진다. 이곳은 그 옛날 나무숲만이 울창하던 때에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작은 집들이 줄 서 있는 사이로 여염집과 똑같은 철대문에 큼직하게 걸린 尋牛莊이라는 문패가 눈에 띈다. 열려 있는 문안으로 들어서니 인기척이 없다. 작은 방 두 개에 좁은 마루가 딸려 있는 아주 작은 한옥이다. 듣던 대로 북향으로 앉아 있다. 만해는 조선총독부가 있는 남쪽을 마주하기 싫어서 거처하는 집을 정반대인 북향으로 지었다고 한다. 한 방에는 만해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고 다른 방에는 만해의 꼿꼿한 기개를 엿볼 수 있는 초상화가 걸려 있다. 향을 피워 잠시 묵념을 올렸다. 벽에는 선생의 친필인磨杵絶葦(마저절위)’라는 짧은 글귀가 붙어 있다. 절구 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었다는 그 뜻을 새기며 한 자씩 쓸 때마다 마음을 다졌을 만해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 한켠이 시려왔다. 선생은 1933년부터 이곳에 머물다 해방되기 바로 전 해인 1944년에 옥고(獄苦)로 생을 마치셨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손수 심었다는 마당의 향나무는 주인을 닮아 곧게 위로 뻗었고, 거북이 등 모양으로 붉은 껍질이 툭툭 갈라진 굵은 노송이 사천왕처럼 대문 옆을 지키고 있다. 우리는 비도 피하고 잠시 쉴 겸 만해의 친필로 된심우장尋牛莊현판 밑에서 기념 촬영을 하였다.

다시 언덕을 내려와 큰길에서 아래로 조금 걸었다. 오늘 성북동 문화 탐방의 주 목적지인 상허 이태준 고택을 찾기 위해서다. 안내 표시를 보고 두리번거리다 보니 성북2동주민센터 오른쪽 골목 안으로 훤하게 주차장이 보였다. 그 뒤로 기와를 얹은 돌담이 병풍처럼 길게 펼쳐져 있고 그 너머에는 기품 있는 기와지붕이 아름다운 선을 드러내고 고아하게 서 있다. 분명 이조시대 건축 양식이기는 하지만 사대부집도 아니고 여염집 모양도 아닌 독특한 모양이다.

돌계단 위로 좁은 일각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문 위를 올려다보니 壽硯山房이라는 현판이 예사로운 집이 아님을 말해 주었다. 대문 바로 옆 담장 위로는 하얀 불두화가 시원스레 함박웃음을 보내고 있다.‘수연(壽硯)이란 오래된 벼루라는 뜻이니, 세월이 묻은 벼루에 먹을 갈아서 정성들여 글을 쓰듯이 문학에서도 그런 깊이와 색깔이 있어야 된다는 선생의 정신을 말하는 것 같다.

지금은 선생의 외종손녀가 찻집으로 운영하고 있어서 누구든지 손쉽게 올 수 있는 곳이지만 우리는 이제야 설레는 마음으로 안마당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바로 앞 시선이 닿는 곳에 이태준 문학의 산실이라고 적은 작은 표지석이 있다. 왼쪽에는 현대식 별채가 있고 가운데에는 반듯하게 남향으로 안채가 있는데 오른쪽 끝으로 누마루가 자를 뒤집어 놓은 듯 멋지게 튀어 나와 있다. 네 귀퉁이 굵은 돌기둥에 의지해 공중에 떠 있는 누마루는 문향루(聞香樓)라 이름하였다. 낮은 담 너머로 북악산의 커다란 골짜기가 팔을 벌리고 서서 여러 가닥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그 패인 골마다 신록이 우거져서 초록빛이 비와 함께 쏟아져 내리는 것 같다. 상허는 이 깊은 자연을 벗해 명상에 들고, 작품을 구상하였으리라. 그의 삶의 체취를 느끼며 작품 속의 무대에 직접 서게 되니 남다른 감회가 솟아났다.

1925년 시대일보에 오몽녀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한 상허는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김기림, 이효석, 정지용등과 함께 구인회(九人會)를 만들어 일제하의 한국문학을 이끌었고, 1933년부터 월북하기 전까지 십삼 년 동안 이곳에서 안정적으로 집필하였다. 문득 영국의 시인 워즈워스가 떠올랐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중에 뜻 맞는 시인들과 모여 함께 작품을 논하고 활동하였는데, 아름다운 호수지구의 작은 오두막집 도브 코티지(Dove Cottage)'에서 대표적인서정민요시집을 탄생시켰다. 상허도 월북하지 않고 계속 수연산방에 머물렀다면 얼마나 더 많은 좋은 작품들을 써 냈을까. 상허는 이 집에서 수필집무서록을 비롯하여 가마귀< 달밤> 등의 빼어난 단편소설과 문장강화등 수많은 작품을 썼다.

그가 집필하던 문향루에 직접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우리가 들어가고 있을 때 남녀 젊은이들 대여섯이 뛰어 들어가 문향루를 미리 차지하고 앉아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누마루와 연결되어 있는 온돌방에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 찻집에서 직접 만든 쌍화차와 대추차, 그리고 복분자 인절미를 주문하였다. 좁은 장소에서 노인들과 젊은이들이 서로 다른 대화를 하고 있으니까 정신이 없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젊은이들,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알고 왔어요?”

아니요, 직장 상사가 유명한 곳이라고 해서 점심시간에 잠시 왔어요.”

그럼 우리가 복사해온 이태준의 수필을 나누어 주어도 될까요?”

그럼요, 좋지요. 감사합니다!”

넉넉하게 준비한 유인물을 돌렸다. 젊은이 중 한 사람이 <>을 낭독했다. 신선한 목소리였다. 나이 차이는 많이 나지만 우리의 옛 수필을 한 공간에서 함께 읽고 있다는 것만으로 정겨움을 느꼈다. 문화적인 일체감으로 곧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시간이 없어서 저희는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자리를 먼저 차지해서 죄송합니다.”

처음 들어 올 때 당돌하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들은 깍듯이 인사를 하고 나갔다. 이제 우리가 문향루로 올라앉았다.

상허문학의 산실인 문향루! 안채보다 밖으로 툭 튀어나와 멀리 하늘과 산의 능선이, 가까이는 마당의 나무며 화단, , 우물 등 구석구석까지 잘 보이는 이곳, 그가 숨쉬며 사색하던 공간을 직접 대하니 마음이 벅차오른다. 이 집에 어울리게 은은하게 오래 달인 대추차를 천천히 음미하며 들었다. 그리고 그의 수필 <목수>를 읽었다. 이 한옥을 이해하기에 꼭 맞는 수필이다. 이미 읽은 적이 있는 작품이지만 이곳에서 읽으니 느낌이 전혀 다르다.

 

목수 다섯 사람 중에 네 사람이 60객들이다. 그 중에도 선다님으로 불리어지는 탕건 쓴 이는 칠십이 불원한 노인으로 서울 바닥 목수치고 신선다님더러 선생님이라고 안 하는 사람은 없다한다. 무슨 대궐 지을 때, 남묘南廟,동묘東廟를 지을 때, 다 한몫 단단히 보던 명수名手로서 어느 일터에 가든 먹줄만 치고 먹는다는 것이다. 딴은 선재選材와 재단裁斷은 모두 이 선다님이 해놓는데 십여 간남짓한 소공사小工事이기도 하거니와 한 가지도 기록을 갖는 습관이 없이 주먹구구인 채 틀림없이 해 내는 것만은 용한 일이다.

(...)내가 조선집을 지음은 이조건축의 순박, 중후한 맛을 탐냄에 있음이라. 그런 전통을 표현함에는 돈보다 일에 정을 두는 이런 구식 공인工人들의 손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것임으로 오히려 다행이라 여겨 일급日給으로 정한 것이다.

수필 목수중에서

 

멋지게 조각한 낮고 품위 있는 난간하며, 작은 집임에도 사대부집에나 어울리는 솜씨가 구석구석 배어 있음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처마 끝에는 풍경이 달리고, 각 방마다 이름을 지어 현판을 걸었는데 상심루(賞心樓)는 없어졌으나 문향루와 건너편에 죽향루(竹香樓)가 남아 지금까지도순박, 중후한이조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비가 그쳤다. 기울어가는 저녁 햇살이 우리에게 일어서야 할 시간임을 일깨워준다. 할머니 손 잡고 오르내리던 인적 없던 깊은 계곡, 성북동이 세월 따라 많이도 변했음을 실감한 하루였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이곳 수연산방을 비롯하여 근현대 문화유적들이 가득한, 도심에서 보기 드문 소박하고 정겨운 동네이다. 이 문화의 마을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라며 아쉽게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마루 한쪽에 덩그렇게 걸린 빛바랜 가족사진 속에서 상허가 우리를 배웅해 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