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직하고픈 이야기

[스크랩] 영화 <곡성>이 교회에게 걸어오는 말

주혜1 2016. 6. 7. 17:35

영화 <곡성>이 교회에게 걸어오는 말

최재석  |  jschoi@cnu.ac.kr
폰트키우기폰트줄이기프린트하기메일보내기신고하기
입력 : 2016년 05월 24일   
트위터페이스북미투데이 네이버구글msn

영화 <곡성(哭聲)>을 보러 가면 맨 먼저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구절이 자막으로 뜬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성경구절을 읽는 기독교인들은 이 영화가 기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모양이라고 기대한다.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무어야 이것, 기독교 영화인가?’라고 불만스러워할 것이다. 나홍진 감독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이러한 불만을 예상하고 있었을 텐데 누가복음 24절의 구절을 맨 앞에 띄웠다. 그런데 무당과 귀신의 이야기가 판을 치는 이 영화에서 명확한 기독교적 메시지를 찾을 수는 없다. 그래서 기독교인 관객들은 ‘이거 무당 이야기인데.’라며 실망할 것이다. 나 감독은 이들의 실망을 짐작하고 있었을 텐데도 이 영화에서 미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왜 그렇게 할까?


<곡성>이 끝나는 장면에서는 모든 관객이 어리둥절해진다. 이 영화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살인사건들이 일어나고 처음부터 경찰이 등장해서 사건의 원인을 밝히려고 하는데,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영화가 끝나고 만다. 방송과 신문에서는 독버섯 탓이라고 하는데, 동네 여인 무명은 일본인 무당의 소행이라고 하고 무당 일광도 그렇게 말하더니 일광은 나중에 가서 말을 바꾸어 무명이 한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본인 무당이 죽었는데도 살인은 일어난다. 그런데 동네 여인 무명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귀신의 짓이라고 말한다. 이 미스터리 영화는 관객들이 기대한 것과는 달리 아무런 해결의 실마리 없이 끝난다. 그래서 관객들은 일어서면서 ‘뭐야 이것, 아무런 해결도 없네.’라고 투덜거린다.


이렇게 실망하고 불만스러워 하면서도 왜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보려고 몰려드는가? 칸 영화제에서 <곡성>을 초청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영화제에서 수준 높은 관객들이 <곡성>을 보고 나서 한참 동안 기립박수를 했다는데, 그들을 그토록 감동시킨 것은 무엇일까? 이 영화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재미있기 때문인가? 특히 한국인 관객의 경우에는 토속신앙인 샤머니즘에 친근감을 느끼기 때문일까? 딸을 구하려는 아버지의 진지한 노력에 감동하기 때문인가? 혹은 이런 것들이 합작해내는 효과에 매혹되기 때문인가?


나는 여기서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겠다. 어느 영화의 줄거리 요약이나 설명으로는 그 영화가 주는 감동이나 재미를 맛볼 수 없게 마련이다. 단지 나는 여기서 당당뉴스를 좋아하는 진지한 독자들과 함께 나홍진 감독이 인용한 누가복음 24장의 구절과 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신부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이 영화가 한국교회에게 걸어오는 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혹에 빠진 사람들


이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비가 쏟아진다. 살인사건 그리고 쏟아지는 비, 이 두 가지가 겹쳐서 칙칙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전체 분위기가 어둡고 절망적이다. 계속 비가 내리는 이 영화에는 희망의 햇살이 비치지 않는다. 미신에게 미혹된 주인공 종구(곽도원)는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 속에서 헤매며 소리치고 몸부림친다.


종구는 곡성이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조사하려고 비 내리는 현장에 나간다. 매스컴에서는 독버섯을 먹은 사람이 환각상태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사건이 발생한 일이 있다고 보도했기 때문에 그는 처음에 이 사건도 독버섯이 그 원인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종구는 동료를 병원에 보내서 범인의 혈액 분석 결과를 알아보게 하는데, 병원에서는 살인자의 혈액에 버섯의 독성이 다량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종구는 살인자의 집 기둥에 말린 버섯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기도 한다.


비대한 종구의 굼뜬 행동과 얼뜬 표정에서 형사로서의 예리함이나 민첩성이 엿보이지 않는다. 살인 사건 현장에 출동할 때도 그는 번번이 늦게 나타나서 윗사람에게 질책을 당한다. 이러한 멍 때린 표정의 주인공을 남자의 웃옷을 흰옷 위에 걸쳐 입은 이상한 옷차림의 무명(천우희)이 유혹한다. 종구가 혼자서 사건 현장을 지키고 있을 때 실성한 것처럼 보이는 무명이 의자에 앉아 있는 그에게 자꾸 돌을 던진다. 그러고는 이 사건에 일본인 무당(쿠니무라 준)이 관련되어 있다고, 그는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라고, 자기가 사건 현장의 목격자라고 말한다. 목격자를 자처한 무명이 자취를 감추어 버리자 목격자가 있다고 보고한 종구는 질책을 받는다. 질책을 받으면서도 그는 이제 독버섯은 잊고 믿을 수 없는 무명의 말에 집착한다. 여기서부터 그는 미혹에 빠지기 시작한다.


그 마을에서는 또 다른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어느 남자가 자기 부인과 한 남자를 칼로 찔러 죽였다. 모두들 이 사건은 치정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살인자의 몸에 벌건 두드러기가 흉하게 나있다. 그런 두드러기는 지난번 살인사건의 피의자 피부에 나 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종구는 여기서도 지난번처럼 그 사람의 집 기둥에 말린 버섯이 걸려 있는 것을 본다. 종구의 동료는 이 살인이 독버섯 때문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종구는 무당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구는 산속에서 일본인 무당을 만난 일이 있다는 동네 사람에게서 그 일본인이 악마라는 말을 듣는다. 종구는 그 무당이 정말 악마인지 지접 보고 싶어서 동료를 데리고 그 동네 사람의 안내를 받아 숲속에 있는 일본인의 집으로 간다. 그 무당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 집에는 무당들의 집처럼 촛불이 켜있고, 벽에 여러 장의 사진이 붙어 있고, 그 사진 가운데는 살인사건에서 살해당한 사람의 사진도 있다. 독버섯이 살인의 원인이라고 고집하던 그의 동료도 그 사진들을 보고 나서는 종구보다 더  확신을 가지고 일본인이 살인사건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종구도 일본인이 모든 살인사건의 주범인 것 같다는 생각을 더욱 굳힌다.


종구는 그의 동료가 일본인의 집에서 발견한 실내화에 그의 딸 효진이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그 무당이 효진이를 지목하고서 접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효진이의 다리에 살인자들의 몸에 나 있던 두드러기가 나 있는 것을 보고는 효진이가 그 무당을 만났고 효진이가 그에게 겁탈 당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자 종구는 그 무당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힌다. 효진이가 겁탈 당했다면 그 겁탈자가 일본인이 아닌 다른 남자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그는 그 일본인이 그런 살인사건에 관여한 현장을 목격한 일도 없고 살인자들이 그 무당을 만났다는 증언도 듣지 못했지만, 그가 듣고 본 것에 근거해서 심증만을 가지고 살인이 일본인의 소행이라는 생각을 굳힌다. 이렇게 단정하는 그의 태도는 객관적인 증거를 중시해야 하는 수사관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이제 그는 매스컴에 거듭 발표되는 독버섯에 대한 기사도, 살인자들의 피부에 난 흉한 두드러기의 원인도, 집 기둥에 걸려 있는 말린 버섯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효진이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염려한 종구의 장모가 무당 일광을 데려다가 굿을 하자고 사위에게 제의한다. 종구는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일천 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굿판을 벌인다. 무명과 마찬가지로 일광도 모든 살인사건의 주범이 숲속의 일본인이라고 그 일본인은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를 없애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게 돈다고 말한다. 일광이 굿을 하면서 장승을 쓰러뜨리고 그 장승에 쇠대못을 서너게 박자 일본인이 아파하면서 거의 죽어간다. 이런 장면을 보는 관객들은 굿판을 벌이는 일광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효진이도 고통으로 몸부림치며서 소리친다. 딸의 고통을 지켜보던 종구는 견디지 못하고 굿을 멈추게 한다.


이제 종구는 일본인을 죽이려고 동네 사람들을 데리고 산속의 오두막을 찾아가는 등 무당들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일본인 무당이 차에 치어서 죽은 것을 보고 그 사체를 처리한다. 종구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무명을 만나는데, 그때 일광이 그에게 전화를 해서 일본인은 귀신이 아니고 동네의 여인 무명이 진짜 귀신이라고, 동네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의 주범이 무명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이제 무엇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게 된 종구는 무명에게 그녀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소리친다. 무명은 종구에게 자기가 귀신을 잡을 덫을 쳐놓았으니 닭이 세 번 운 다음에 집에 들어가라고, 그렇지 않으면 귀신에게 온 집안 식구가 몰살을 당한다고 말한다.


이제 무명도 귀신을 부릴 줄 아는 무당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종구에게 접근해서 자기가 살인사건의 목격자라고 말하고는 자취를 감추었던 무명이 무당이라면, 주인공은 처음부터 무당의 계략에 말려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종구는 그동안 세 명의 무당에게 놀아난 것이다.


종구가 무당들이 던진 낚시에 걸린 셈이다. 이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일본인 무당이 낚시를 하고 있다. 그리고 왜 하필 일본인이 효진이에게 접근하는 것이냐는 종구의 물음에 일광은 낚시 이야기를 하면서 낚시를 던지는 사람이 어떤 고기가 물릴 것을 알고 낚시를 던지는 것은 아니라고, 단지 물고기가 미끼를 문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종구의 경우는 무명이 의도적으로 그를 낚으려고 낚시를 던졌고 종구가 그 낚시를 덥석 문 것이 된다. 그런데 그 낚시는 하나가 아니라 세 개였다. 그가 세 개의 낚시에 걸려들었으니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세 번 닭이 울기 전에는 집에 들어가지 말라는 무명의 말을 무시하고 집에 간 종구는 그의 부인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가 부인의 사체를 붙들고 통곡할 때 딸 효진이가 문간에 나타나 서 있다. 직전의 장면에서 효진이가 부엌칼을 집어 들었기 때문에 관객들은 효진이가 환각에 빠져서 어머니를 죽인 것으로 추측하게 된다. 장면이 바뀌면서 문간에 서 있던 두드러기가 심하게 난 효진이는 맥없이 바깥 마루에 걸터앉아 있고, 한참 통곡하고 난 종구는 벽에 기대어 앉아서 힘없이 효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딸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겠다고 중얼거린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는 아무런 기력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영화는 끝난다.


 

  
 



두 신부 이야기


왜 종구가 그 세 개의 낚시에 걸려들게 되었는가? 그가 찾아간 신부의 말에 의하면, 그가 소문만을 듣고 무당의 소행이라고 단정하면서 객관적인 수사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신부는 그것이 바로 종구의 실수라고 말한다. 살인자의 혈액을 검사한 병원에서 범인의 혈액에 버섯의 독성이 다량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도 독버섯에 대해서는 더 이상 조사하지 않았다. 신빙성이 적은 무명의 증언, 동네 사람의 미신적인 언급, 일본인 집에서 본 사진과 실내화를 근거로 한 추측, 무당 일광의 언급에 대한 신뢰 등 객관성이 없는 말들에 현혹되었다.


다음으로 신부는 종구가 눈에 보이는 사람을 귀신으로 단정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이 영화에서 자막으로 띄운 누가복음의 내용과 통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보고 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놀라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예수는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자기에게는 그런 것이 있다고, 자기의 손과 발을 보고 만져 보라고 말했다. 일광은 종구에게 일본인 무당이 귀신이라고 말했지만, 종구는 일본인 무당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일광이 귀신이라고 말한 무명도 눈에 보였다. 신부의 말에 의하면, 눈에 보이는 사람을 귀신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원래 귀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귀신은 가끔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도 일광이 귀신이라고 말하는 무명은 자기가 목격자라고 말하고는 다음 순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실상 존재하지도 않는 귀신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지만, 이 영화에서 종구나 다른 사람들이, 특이 무당들이 귀신이 존재한다고 혹은 귀신이 사람처럼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것은 샤머니즘에 젖어 있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태도다. 그러나 어떻든 그런 생각은 과학적이거나 이성적인 사고와는 거리가 멀다. 특히 사건을 과학적으로 수사해야 하는 형사는 그런 생각을 떨쳐버려야 한다.


이 영화에는 또 한 명의 신부가 등장한다. 무당 이야기가 판을 치는 영화에 성경구절이 맨 처음에 인용된 것도 상식 밖의 일이지만, 이런 이야기에 신부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등장하는 것은 정말 예상 밖이다. 더구나 젊은 부제는 잠깐 등장하는 정도가 아니고 종구를 따라서 숲속의 일본인 집에 여러 차례 올라가고 종구를 위해서 통역을 하면서 일본인에 관한 일을 듣고 그의 집을 살펴보기도 한다.


그는 이 무당의 집에 갔을 때 그 현장을 보고 놀라고 무당을 만났을 때는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의 가냘픈 체구와 소심하게 보이는 얼굴 표정이 그의 두려움과 잘 어울린다. 그리고 그 집의 개가 그의 바지 끝을 물고 늘어질 때 놀라서 지르는 그의 비명과 몸부림에서 그의 내면적 상태가 드러나기도 한다. 그는 예수를 만나서 영인 줄 알고 무서워하는 예수의 제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가 혼자 일본인을 찾아가서 일본인이 스스로 악마라는 것을 인정하면 자기가 물러가겠다고 말하는 데서는 그에게 일본인 무당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상 그 전에 일본인이 죽었기 때문에 이 장면은 그의 상상 속에서 혹은 꿈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 장면에서 일본인은 부제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다. 도술을 부릴 줄 아는 이 무당은 악마의 모습으로 변신하고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한 누가복음 24장의 구절을 중얼거리면서 부제에게 손바닥의 성흔을 보여준다. 여기서 부제는 그 무당에게 압도당하면서 주여라고 말하는데, 그 어조로 보아서 그 무당을 주라고 부르는 것처럼 들린다.


우리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명의 신부들의 신앙적 태도가 아주 다른 것을 발견한다. 나이든 신부는 사물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성숙한 신앙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젊은 부제는 확고한 신앙이 정립되지 않은, 샤머니즘적인 신앙을 벗어나지 못한 미숙한 신앙인이다. 그는 자칫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에 빠질 수도 있는 사람이다. 이 젊은 부제에게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런가 하면 나이든 신부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는 수사관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서 그리고 무당을 귀신이라고 보는 미신적인 자세에 대해서 그 문제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어려움에 처한 종구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종구에게 교회에서는 당신을 도울 수가 없다고 잘라 말하면서 병원에나 가보라고 덧붙인다. 그는 교회 안의 일에만 몰두하면서 교회 밖의 사람은 그가 어떤 어려움을 당했다 하더라도 외면하는 사람이다.


젊은 부제의 샤머니즘에 대한 관심은 교인들을 잘못 인도하겠지만, 나이든 신부는 재난 앞에서 통곡하는,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 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유무와 상관 없이 그리고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도 그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나이든 신부처럼, 교회에서는 당신을 도울 수 없으니 다른 곳에 가보라고 말한다면, 거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서 이웃 사랑을 가르친 예수의 정신이 아니다.

 


마치면서


나홍진 감독은 예수가 부활한 후에 실의에 빠진 제자들에게 나타난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그 장면이 언급된 누가복음 24장의 구절들을 영화의 내용이 시작하기 전에 자막으로 처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관객은 누구나 이 자막이 영화의 내용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무당의 미끼를 물고 몸부림치는 주인공의 이야기에서 이 성경구절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무당들에게 미혹되어서 헤매다가 기진맥진한 상태로 주저앉아서  딸을 위해 어떤 일이든 하겠다고 중얼거리는, 절망에 빠진 이 영화의 주인공에게 다가가서 누군가가 희망적 비전을 제시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주인공을 따라서 미신의 세계에서 헤매다가 해결이 없는 이 영화의 결말을 대하면서 각기 나름대로의 막연한 설명을 시도해 보는 관객들에게 누군가가 그럴듯한 해결을 귀띔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 해결의 실마리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신부와 누가복음의 구절에서 찾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두 신부는 자기들의 소임을 다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샤머니즘적 신앙에 기울어 있거나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외면하고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신부를 통해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현 주소를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정도를 벗어난, 본연의 임무를 외면하는 한국교회에게 말을 걸어온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미혹에 빠져서 헤매다가 부인까지 잃고 절망상태에 이른 주인공을 만난다. 이제 그에게는 일어설 힘조차 없다. 절망하고 있다는 면에서 이 주인공은 예수가 죽은 후에 실의에 빠졌던 예수의 제자들과 비슷해 보인다. 그때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절망했던 제자들이 힘을 얻어 일어설 수 있었다. 누가복음 24장에 언급된 부활한 예수를 언급하는 이 영화는 교회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대들은, 예수처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일으켜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메모 :

'간직하고픈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자  (0) 2016.09.05
防壁방벽이자 어머니인 청빈淸貧  (0) 2016.06.28
복되신 동정마리아의 방문 축일/ 5월 31일  (0) 2016.05.23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0) 2015.06.25
황지우  (0) 2015.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