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 위에서
— 사랑, 그 애도의 꽃
물비늘 위를 조심스레 건너는 햇살처럼,
사랑은 언제나 가장 여린 떨림으로
내게 왔습니다.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말보다 먼저 스며드는 고요한 침묵으로
사랑은
눈빛 하나에 조용히 흔들리는
환희의 *알아차림*이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유한 속에 무한을,
시간 속에 영원을 꿈꾸는
우리의 사랑은
이 세상의 중심에서부터,
아주 오래 전부터
슬픔을 품은 채 피어나는 꽃이었다는 것을.
나는 당신의 만남 가운데
숨은그림자를 통해
예감처럼 미리 엿보았습니다.
사랑은 폭포 아래로 떨어지는 물처럼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흐름이며,
스스로 사라짐으로써 타인을 살리는
눈물처럼 투명한 열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기쁨이 솟구치는 순간에도
어렴풋이 이별을 예감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이미 당신 없는 시간을
미리 가슴에 품게 되었음을
나는 아주 천천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승에서의 사랑은 언제나
이별의 향기를 안고
땅에 내려앉는 씨앗처럼,
고요하고 겸허하게 뿌리내려
슬픈 향기를 품고
거친 동토에 피는
봄날 하얀 가시찔레 같았습니다
보는이없어도 말없이 피었다
흔적없이 사라지는 존재의
숭고한 아름다움
바로 그것이
유한한 세상에서 단 한 번 주어진
생애에 사랑이 깃드는 섭리였습니다.
자크 데리다는 『애도 작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 순간, 이미 너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그의 이 문장은
마치 짙은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처럼
마음을 깊이 울리고 지나갑니다.
사랑은 그렇게,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상실의 시간 속에 조용히 뿌리내립니다.
사랑이란,
그 사람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의 부재를 통해 또다시
사랑할 준비를 시작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 존재가 영원히 곁에 머물지 않더라도,
함께한 시간은
영원을 대신할 만큼 귀한 것이 되기에
우리는 오늘도 끊임없이 사랑을 선택합니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말합니다.
"부재는 사랑하는 자가 끊임없이 생산하는 언어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애쓰며
잃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지금 여기를 더욱 붙잡습니다.
사랑은 늘 그 자체로
부재를 향한 속삭임,
아직 오지 않은 이별을 견디기 위한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기도입니다.
사랑이 머무는 시간은 덧없고,
기억은 길며,
기억이 애도의 옷을 입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우리는 어렴풋이 알면서도
그 모순의 장대한 흐름 위에
꽃을 꺾어 놓듯
사랑을 띄웁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사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끝남을 전제하며 시작된다."
이 무정해 보이는 문장은
오히려 가장 정직한 위로가 됩니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에,
우리는 더욱 뜨겁게 사랑합니다.
불꽃은 꺼질 줄 알기에 찬란하고,
꺼진 자리마다 남겨진 잿빛 기억의 꽃은
다시금 우리를 살게 합니다.
사랑은 흐름 위에서 피어나는 꽃입니다.
언제나 잠시 머물다 떠날 것을 알기에,
그 꽃은 더욱 진하게 피고,
더 향기롭게,
더 깊게,
끝없이 바람에 흔들립니다.
그 흔들림은 애도의 예감이며,
그 맑고 빛나는 애도 안에
사랑의 가장 순결한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압니다.
사랑이란, 함께 있는 동안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조용히 떠나보내고 있는 일이며,
애도란, 떠난 뒤에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흐름 위에서,
우리는 사랑합니다.
끝을 알면서도,
그 끝마저도 아름답게 떠나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흐름 위에 스쳐가는
바람결에 들리지 않는 애원의 송가를
숨죽여 부릅니다.
때로는 침묵 속에
뜨거운 흐름의 전율로,
승화의 환상으로,
혼신의 절규로,
이별 뒤에 홀로 숨어
그대 이름을 목놓아 부릅니다.
사랑은 결국 애도의 꽃.
영원하지 않기에 더욱 영원한,
한 송이 기억과 그리움과 찬란함으로
이루어진
사랑 은
흠도 티도 없는 그리움 속에
영근 희망이 피워 낸
절망의 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 꽃을 가슴에 품은 채,
흐름 위를 조용히 건너갑니다.
그리고 사랑은 이제
이름도 없고 형체도 없는
텅 비고 자유롭고 순수한
절대 신성의 어둠,
그 초연의 존재 그 자체로
흐름이 끝난 방하의 품 안에서
너와 나,
마침내
우리는 영원히
하나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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