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신비
ㅡ썰물 지난 자리
다시
밀물이 들고있다
목마른 갯벌에 생명이 넘실댄다
무너진 자리에서 시작되는
위로의 변주곡이 시작된다
*하나 : 신앙의 신비에서 고통의 신비로
우리는 매일 미사 중 성찬례를 앞두고 "신앙의 신비여!" 하고 노래합니다. 그 순간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하는 놀라운 신비 앞에서 우리는 무릎을 꿇습니다. 그런데 제단을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서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신비와 마주하게 됩니다. "고통의 신비여!" 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현실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병, 예고 없는 사고, 무고한 자연재해와 전쟁, 이유 없는 상실과 설명되지 않는 아픔들이 우리 삶에 불청객처럼 찾아옵니다. 고통은 문을 두드리는 손님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할 이웃처럼 우리 삶 깊숙이 자리 잡고 머뭅니다.
이 영원한 질문 앞에서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저마다 다른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부처는 말했습니다. "삶은 곧 고통이다.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다. 욕망을 버려라. 집착을 내려놓아라. 그러면 해탈할 수 있다." 그는 고통을 존재의 본질로 보았고, 그것을 벗어나는 길로 욕망을 비우고 무아의 경지로 나아가는 수행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마호메트는 선포했습니다. "알라는 모든 것을 아신다. 고통은 그분의 시험이다. 인내하라. 그리고 그 뜻에 전적으로 맡겨라." 그는 고통을 신의 시험으로 이해했고, 사브르(인내)와 타왓쿨(전적 신뢰)을 통해 그 시험을 견뎌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나자렛 예수는 고통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함께 우셨고, 십자가 위에서는 인간의 가장 깊은 절망을 당신의 목소리로 외치셨습니다.
하느님 아들이셨지만 이 세상에서
참 사람이 셨던 나자렛여수는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 27,46) 하고. 부르짖어 셨습니다
이 절규는 단순한 고통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는 온 인류가 고통 중에 하느님께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을 대신 물어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인간의 가장 깊은 고뇌를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신 순간입니다.
가톨릭 전통에서 십자가는 고통의 절정이자 동시에 사랑의 완성입니다.
둘 : 고통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성 바오로 사도는 이를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하신 것"(로마 5,8)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이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고통의 가장 깊은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함께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회칙 『구원에 이르는 고통』(Salvifici Doloris)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은 모든 인간 고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고통은 더 이상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가톨릭 신학의 핵심은 하느님의 내재성(Immanence)입니다. 하느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신 분입니다. 특히 고통의 순간에 하느님은 가장 가까이 오십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은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신다"고 했는데, 이는 고통의 가장 깊은 자리에도 하느님이 함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현대 가톨릭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는 이를 "하느님의 연민의 신학"으로 발전시켰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에 무관심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 고통에 참여하시고 함께 아파하십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신비입니다.
가톨릭 전통에서 고통은 완전히 해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신비'입니다. 신비란 이성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지만, 신앙의 눈으로 그 깊은 의미를 직관할 수 있는 실재를 말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을 이해했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통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고통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고통의 신비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하느님의 더 큰 계획에 신뢰하도록 이끕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고통이 그 자체로 선한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통은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고통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고통과 결합될 때, 그것은 구속적 가치를 갖게 됩니다.
성 바오로는 이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골로 1,24)고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그리고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봉헌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톨릭 영성에서 말하는 "고통의 사도직"입니다.
셋 : 고통을 너머 사랑과 위로를
성모 마리아는 고통 중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모범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극도의 고통을 겪으셨지만, 부활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은 "고통의 성모"(Mater Dolorosa)이시면서 동시에 "위로의 성모"(Mater Consolatrix)이십니다. 우리의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하시고, 그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는 분입니다.
역사상 수많은 성인들이 고통을 통해 거룩함에 이르렀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오상(五傷)을 받아 그리스도의 고통에 직접 참여했고, 아빌라의 성 테레사는 영적 고통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를 체험했습니다.
근현대의 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콜베 성 막시밀리아노는 아우슈비츠에서 대신 죽음을 선택했고,
*고통도 나누면. 기쁨이된다*고 말한
마더 테레사는 영적 어둠의 밤을 50년간 겪으면서도 가난한 이들을 섬겼습니다.
이들은 고통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으며, 그 고통을 사랑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고통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고통은 항상 부활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이 사랑의 변증법은 그리스도교의 독특함입니다. 십자가는 무덤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이어집니다.
성 바오로는 이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것"(로마 6,8)이라고 표현했습니다. .
우리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고통과 결합될 때, 그것은 부활의 생명으로 변화됩니다.
우리는 현재의 고통이 영원하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어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아픔도 없을 것이다"(묵시 21,3-4)라고 약속합니다.
이 종말론적 희망은 현재의 고통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 중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산고(産苦)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과의 연대를 강조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고통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고통도 다른 이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고, 우리의 사랑도 다른 이들의 치유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섯: 고통, 그 사랑의 변증법
결국 고통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고통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더 큰 사랑을 배우고, 더 깊은 일치를 체험하게 됩니다.
성 테레샤는 "고통은 지나가지만, 고통을 사랑으로 받아들인 것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만날 때, 그것은 영원한 가치를 갖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고통을 설명해주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분명히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어 지십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끝에서 부활의 새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통의 신비여!" 이 고백 안에서 우리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피어나는 부활의 진리입니다.
*"그분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이사 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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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검도 채플.
아름답고 신비스런 생명의 신비가
넘실대는 갯벌을 바라보며
*왜 인간은 까닭도없이 고통을
받아야 하니요*하고 절박한
질문을 던진 어느 방문객에게
삼가 이 글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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