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안개 속에서
- 길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가야 길이 열린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섬의 안개는 만물의 경계를 지운다.
섬은 경계다.
육지와 바다 사이, 머무름과 떠남 사이, 고립과 연결 사이에 놓인 경계. 그러나 물안개는 그 경계를 잠시 허문다.
바다와 갯벌 위로 드리운 안개를 보면, 이 기상 현상이 인간 삶의 존재 현상과 몹시 닮아 있다는 걸 느낀다.
안개가 피어오르면 섬의 윤곽이 흐려진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가 사라진다.
이 광경을 보며 문득 깨닫는다. 경계란 원래 없었던 것이었다. 우리 의식이 임의로 그어 놓은 허약한 틀이다 . 물안개는 그 사실을 잠시 드러낸다.
시간과 역사와 진화의 사상이 그 안개 속에 겹쳐진다.
저 안개의 흐릿함 속에서 오히려 미지의 신비는 더 명징한 실상으로 닥아 온다
이것이 하늘이 인간에게 내린 은혜요
축복이다
안개는 오랫동안 허무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안개는 허무가 아니다. 오히려 허무 속의 충만을 보여준다. 감추면서 드러난다.
사라지면서 남는다. 가을 섬의 안개가 바로 그렇다.
시간은 흐르되 머문다. 역사는 쌓이되 흩어진다. 진화는 나아가되 되돌아온다.
섬은 시간의 정박지다.
동시에 시간이 흘러가는 통로다.
바다에 피어오른 안개는 수평선을 지운다. 하늘과 바다를 하나의 장막으로 덮는다.
세계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순간, 우리는 그 속에 선다.
섬은 바다 위의 고독한 점이었다.
안개 속에서 그 고독마저 녹아든다.
우리는 늘 나와 너, 안과 밖, 생과 사의 경계를 긋고 살아간다. 안개는 그 경계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보여준다.
시간의 경계도 그렇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안개 속에서 하나로 녹아든다.
타자와 나의 간격이 무너진다.
존재를 하나로 끌어안는 장막 속에서, 섬의 안개는 만물의 통합을 속삭인다.
인간이 스스로 세운 경계를 무너뜨린다. 하나 됨을 체험하게 한다.
이 섬에서 깊어가는 가을의 안개는 단순한 습기의 응결이 아니다.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현현이다.
섬이 경계라면, 안개는 그 경계의 허상을 폭로한다.
역사의 층위들이 안개처럼 겹쳐진다. 진화의 궤적이 그 속에서 미지의 형상으로 떠오른다. 사색은 그 형상을 따라간다.
새벽의 연못 위, 갯벌 위에 피어오르는 안개는 땅의 따뜻한 숨과 하늘의 찬 공기가 만나 빚어낸 짧은 호흡이다.
손으로 잡으려 하면 흩어진다. 눈으로 붙들려 하면 사라진다.
인간 삶의 형상이 그렇다.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는가. 안개처럼 흩어지는 것들을.
시간도 그렇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섬은 그 덧없음을 증언하는 침묵의 증인이다.
물안개는 그 증언을 부드럽게 감싼다.
한 방울 이슬 속에도 온 우주가 비친다.
한순간의 덧없음 안에 전체 존재의 충만이 담겨 있다. 인간의 삶이 한순간의 안개와 같으되, 그 순간마다 신의 호흡이 스며 있다.
깊어가는 가을, 섬의 안개는 그 진실을 증언한다.
시간의 한 점 속에 영원이 깃든다.
역사의 한 순간 속에 모든 시대가 응축된다. 명징한 사색이 이를 관통한다. 섬은 그 사색의 요람이다.
안개 낀 새벽길은 불확실하다.
앞은 흐릿하다. 길은 막혀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불확실성이야말로 인간을 각성시킨다.
불안은 가능성의 현기증이다. 새벽안개는 그 현기증의 풍경이다.
섬의 길 위에서 우리는 묻는다. 보이지 않는 길을 어떻게 걸어갈 것인가.
미지의 미래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섬은 질문을 던지는 자리다. 안개는 그 질문을 증폭시킨다.
길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가야 길이 열린다.
인간은 한계 상황의 존재다. 섬의 새벽안개는 그 한계 상황을 담는다. 죽음, 고통, 불확실성이라는 장막 속에서 인간은 결단한다.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가을의 안개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품는다. 그 속에서 우리는 매일 새롭게 열리는 길을 만난다.
진화는 그렇게 미지를 향해 나아간다. 역사는 그렇게 신비 속에서 펼쳐진다.
사색은 그 펼쳐짐을 응시한다. 섬은 그 응시의 자리다.
섬의 세 안개가 보여주는 것들. 바다 위 안개는 경계의 해체와 하나 됨을 담는다. 갯벌 위 안개는 숨결과 무상, 덧없음 속의 충만을 담는다.
새벽안개는 불확실성과 가능성의 문턱을 담는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는 보이되 보이지 않는 세계다. 이 섬에서 가을이 깊어가면서 우리는 그 진실과 마주한다.
시간의 신비 앞에서. 역사의 깊이 앞에서. 진화의 방향 앞에서. 명징한 사색이 그 앞을 밝힌다. 섬은 그 빛을 받아 안는다.
우리는 안개 속을 걷는다. 그 흐릿함 속에서 인간은 타자와 더불어 존재한다. 무상 속의 충만을 경험한다. 불확실성 속에서 가능성을 향해 나아간다.
섬은 그 여정의 무대다. 시간은 그 여정의 흐름이다.
역사는 그 여정의 기록이다. 진화는 그 여정의 의미다. 섬은 경계였으나, 물안개는 그 경계가 본래 없었음을 속삭인다.
안개는 사라진다. 그러나 그 순간이 주는 체험은 덧없지 않다. 안개는 인간이 자신을 다시 보고, 세계를 다시 경험하게 하는 통로다.
섬의 채플에 드리운 안개가 속삭인다.
네 삶은 한순간의 안개와 같으나, 그 안개 속에도 빛이 깃든다.
시간 속에도, 역사 속에도, 진화의 긴 여정 속에도. 섬은 그 빛을 증언한다.
경계가 지워지는 기상 현상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숨결 속에 놓여 있음을 깨닫는다.
섬의 안개는 그 깨달음의 장막이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너는 안개 같은 삶 속에서 무엇을 남기겠는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역사의 무게 속에서, 진화의 신비 속에서.
가을이 깊어가는 섬은 대답을 기다린다.
안개 속에서. 미지를 향한 명상 속에서. 명징한 사색 속에서. 섬은 침묵으로 기다린다.
물안개는 그 침묵을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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