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진정성을 지니고 /조광호신부

주혜1 2025. 12. 14. 20:39

당신의 *삶의 자리*가
바로 광야이다
ㅡ진정성을 지니고 살핀다면

마태복음 11장은 시작하면서 부터 의미심장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평생 광야에서 메시아를 외치던 세례자 요한, 그가 이제 감옥이라는 또 다른 광야에 갇혀 묻습니다.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멈춥니다.

그토록 확신에 찬 예언자가, 왜 지금 묻는 걸까요? 광야에 선 사람
요한은 광야를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왕궁의 편안함을 거부하고, 낙타 털옷과 메뚜기로 연명하며 가장 적나라한 삶의 터전에 자신을 내던진 사람. 왜 그랬을까요?

광야는 진실이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왕궁에서는 화장되고 도시에서는 가려지던 진실이, 광야에서는 그대로 드러납니다.

광야는 모든 것이 벗겨지는 곳입니다. 문명의 외투도, 사회적 지위도, 심지어 확신의 갑옷마저 벗겨집니다. 오직 뜨거운 태양과 차가운 밤, 그리고 '나'라는 존재의 적나라함만이 남습니다.

아무것도 없기에 모든 것이 드러나는, 역설의 공간입니다.

이제 요한은 감옥이라는 더 혹독한 광야에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그 벼랑 끝에서, 평생 확신했던 것들을 다시 묻습니다.

"내가 증언한 그분이 정말 메시아인가? 내 삶은 헛되지 않았는가?"

이것은 믿음의 약함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존적 정직함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확실성이 아니라 불안 속에서 태어납니다.

이것이 신 앞에 인간이 지니는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기에
요한의 질문은 불안 속에서 피어난 진정한 신앙의 꽃입니다.

예수님은 , 이렇게 답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걸으며,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이 말씀은 단순히 일어난 기적을 언급한 것이아니라
눈먼 자는 단지 시각을 잃은 자가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가 단절된 자입니다. 다리 저는 자는 자유를 잃은 자이고, 나병 환자는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자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 안에서 이들이 존재의 중심으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관계가 회복되고, 자유가 되찾아지고, 공동체가 재건되고 있습니다. 생명의 회복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군중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러 갔더냐?"
시적 서정이 가장 짙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광야에 나간다는 것은 선택입니다. 진실을 찾겠다는, 변화를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입니다.

갈대는 여론에 흔들리는
비본래적 실존(uneigentliches Dasein)의 상징입니다.
고운 옷은 본질을 가리는 문명의 가면입니다.
이 모든 것을 외면하고 예언자
요한은 양심의 소리를 따랐습니다,그리고 자신의 유한성을 직시하며
그는 본래적 실존(eigentliches Dasein)을 살았습니다.

광야에는 가면이 없습니다. 오직 존재의 진실만이 있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는
선포는
하느님 나라에서는 모든 가치가 뒤집힌다는것을 선포 한 것입니니다.

이것은 존재론적 전도(顚倒)입니다.
"모든 가치의 전환(Umwertung aller Werte)!"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 가치 전환이 일어나는 실재입니다.
세상의 논리로는 위대함이 권력, 성공, 업적으로 측정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존재론적 논리는 다릅니다.
거기서 위대함은 비움입니다.
거기서 위대함은 겸손입니다.
거기서 위대함은 사랑입니다.

세상의 위대함은 권력과 성공으로 측정되지만, 하느님 나라의 위대함은 비움이고 겸손이며 사랑입니다.

광야에서 펼쳐지는 이이야기가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우리는
인지해야 하겠습니다.

정말로 진정성을 지니고 당신의 삶을 진실로 살핀다면
당신의 *삶의자리*역시  *광야*라는고뱩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광야는 우리 삶의 실재입니다. 어떤 광야는 질병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어떤 광야는 상실의 이름을, 어떤 광야는 외로움의 이름을 가지고 어떤광는 피치못할 운명과도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는 저주가 아닙니다.
광야는 은총의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광야는 우리가 존재의 근원적 물음과 내가 마주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의 삶에 의미가 있는가? 하느님은 어디 계신가?"

이 물음들은 편안한 거실에서는 던져지지 않습니다. 광야에서만 가능합니다.

대림 시기는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기다림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 개방성을지니고있 습니다.

요한은 감옥에서 기다렸습니다. 답을 얻지 못했어도, 확신을 되찾지 못했어도, 그는 기다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언졔나 기다림 가운데 자리하고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 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희망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세르가
말했듯이 *희망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입니다.*

광야는 원망의 장소도 도피의 장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광야는 만남의 터전입니다. 어쩌면
포기하고
떠나지 말아야 할 곳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만나고, 존재의 신비를 만나며, 하느님을 만납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쳤고, 광야에서 의심했으며, 광야에서 기다렸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하느님과의 실존적 대화였습니다.

오늘 당신이 서 계시는 그 광야에
당신은 질문을 해도 괜찮습니다.

흔들려도 괜찮습니다. 다만 광야를 떠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광야는 존재가 존재 자체와 만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만남 속에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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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화 The cord of Blue Logos
20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