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기다림 속에 머무는/ 조광호신부님

주혜1 2025. 12. 16. 22:14

왜 인간은 끊임없이 희망하는가
― 기다림 속에 머무는 존재의 신비

내일 눈이 오면 좋겠다는 바람을 우리는 희망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기대이며, 조건이 충족되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눈이 오지 않으면 곧 사라지고, 실망으로 바뀌는 감정이다. 참된 희망은 이렇게 상황에 종속되지 않는다.

참된 희망은 결과보다 깊고, 성취보다 오래 남는다.

그것은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닫지 않도록 지켜 주는 어떤 힘이다.

대학 시절, 나는 희망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본격적인 연구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학부 졸업논문으로 *「가브리엘 마르셀의 희망의 신비」*를 썼다.
그 무렵 3·1로의 작은 창고극장에서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연일 공연되고 있었고, 나는 그 연극을 여러 차례 보았다. 낮고 거친 무대, 거의 비어 있는 공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고도는 끝내 오지 않았고, 인물들은 떠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책상 위에서는 마르셀을 읽고, 밤에는 베케트를 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희망을 “신비”라 불렀고, 다른 한 사람은 희망이 도착하지 않는 세계를 무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이 둘은 내 안에서 충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를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의 기다림은 목적을 상실한 시간처럼 보인다.
고도가 누구인지, 왜 와야 하는지, 정말 올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두 인물은 떠나지 않는다. “가자.” “그래.” 그러나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 반복은 무의미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인간 존재의 끈질김을 드러낸다. 의미가 확정되지 않았음에도, 인간은 시간을 버리지 않고 견딘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바로 이러한 기다림의 심연을 “희망의 신비”라 불렀다. 희망은 문제처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비처럼 들어가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셀에게 희망은 “잘될 것이다”라는 낙관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근거가 무너진 자리에서조차, 존재가 완전히 배반당하지 않았다고 믿는 태도다.

희망은 미래를 소유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미래에 자신을 열어 두는 신뢰의 결단이다.

이 지점에서 마르셀의 희망은 성서가 말하는 희망과 깊이 만난다.

성경에서 희망은 언제나 광야의 언어로 말해진다. 출애굽의 백성은 이미 해방되었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구원은 시작되었으나 완성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약속을 소유하지 않은 채, 약속에 의지해 하루를 산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듯, “보이는 것은 희망이 아니다.” 성서적 희망은 성취의 가시성에 근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연과 미완성, 보이지 않음이 희망의 자리다.

그래서 성서의 마지막 말은 설명이 아니라 기도다.
“마라나타—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외침은 종말의 시간표를 재촉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오지 않은 시간 속에서도 신뢰를 거두지 않겠다는 존재의 선언이다.

기다림 속에서도 관계를 끊지 않겠다는 고백이다. 마르셀의 희망은 바로 이 마라나타의 철학적 깊이다.

이 점에서 베케트의 인물들은 결코 절망의 화신이 아니다. 그들은 희망을 말하지 못했을 뿐, 존재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고도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은 서로를 떠나지 않는다.

의미가 사라진 세계에서 그들이 끝까지 붙드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관계다. 희망은 예측이 아니라, 관계의 지속이다. 희망은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머무는 용기다.

오늘의 현대인은 어떤 기다림 속에 살고 있는가.

우리는 즉각성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깊은 기다림 속에 놓여 있다.

더 나은 내일, 안정, 회복, 평화를 말하지만, 그것들이 정말 도착할 것이라는 확신은 점점 희미해진다.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기다리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말하지 못한다.

고도를 기다리던 인물들처럼, 우리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미래 앞에 서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미래를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완전히 포기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 인간의 마음은 하느님 안에 안식하기까지 결코 평안하지 않다. 우리는 근원에서 나와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는 여정 위에 있으며, 그 여정 전체가 기다림의 시간이다.

이 기다림은 홀로 서 있는 희망이 아니다. 성서가 말하는 희망은 언제나 믿음 안에서 태어나고, 사랑 안에서 견디어진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고, 희망은 그 약속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이며, 사랑은 그 미완성의 시간 속에서 타자를 떠나지 않는 결단이다.

믿음은 방향을 주고, 희망은 시간을 견디게 하며, 사랑은 그 시간을 관계의 시간으로 바꾼다.

믿음 없는 희망은 막연한 낙관이 되고, 희망 없는 사랑은 쉽게 지치며, 사랑 없는 믿음은 추상이 된다. 그러나 이 셋이 하나로 엮일 때, 인간은 기다림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왜 인간은 끊임없이 희망하는가.하고다시 묻는다면

그것은 희망이 인간의 선택이기 이전에, 하느님으로 부터 지음 받은
인간 존재의 선험적구조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믿음으로 부름받았고, 희망으로 숨 쉬며, 사랑으로 기다림을 견딘다. 희망은 약속된 결과가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닫지 않게 하는 마지막 문이다.

어쩌면 참된 희망이란,
예정되지 않은
어쩌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회의 속에서도 끝까지
고도를 기다리며
희망은
믿음으로 방향을 잃지 않고,
시간을 포기하지 않으며,
사랑으로 서로에게서 떠나지 않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의 희망은 *이미 그러나 아직 *
아니지만
하느님 앞에 이미 조용히 함께 머물고 있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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