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탑과 십자가/조광호신부

주혜1 2026. 1. 26. 21:03

탑과 십자가

진실 앞에 선 두 인간 ― 시인 휠데린과 나자렛 예수

유학시절 나는 자주 남독의 대학도시튀빙겐을 찾아갔다.
그 때 마다 나는 시인 휠데린이 갖혀있던 네카어 강가의  옥탑 꼭대기 방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까닭은 단순한 유명관광지였기 때문이 아니였다.
나에게 그 옥탑방은 너무나 충격적인 ,암호와 같은 이세계에 대한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그 이유를 페북의 친구들과
조심스럽게 나눈다

1.
진실은 인간을 고양시키기보다 먼저 시험한다.
특히 진실이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현존으로 다가올 때—말이 뜻이 되기 전, 세계가 이름으로 굳기 전—인간은 보호막을 잃는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진실을 이해하지 않는다. 진실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 앞에서 인간의 태도는 갈라진다.
어떤 이는 진실을 붙들고 머무르려 하고,
어떤 이는 진실을 안고 걸어가려 한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 갈림길에 서 있었던 두 사람이 있다.

시인 프리드리히 휠데린, 그리고 나자렛 예수는 둘 다 “미친 사람”으로 오해받았고, 둘 다 진실의 가장 가까운 자리까지 다가갔다.

그러나 진실 앞에서 취한 태도는 결정적으로 달랐다.

2. 휠데린 ― 진실 앞에 머무르려 한 인간
휠드린은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세계를 설명하는 언어에 만족하지 않았고, 언어가 아직 언어가 되기 전의 떨림—신과 자연과 인간이 분리되기 이전의 심연—까지 내려갔다.

그의 시에서 신은 교리가 아니라 숨결이었고, 자연은 풍경이 아니라 리듬이었으며, 인간은 주체가 아니라 그 사이에서 울리는 현이었다.
휠드린의 태도는 정직했다.
그러나 동시에 위험했다.
그는 진실과 거리를 두지 않았다.

가까이 본다는 것은 곧,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장치인 거리를 내려놓는 일이다.
그는 진실을 붙들고 그 자리에 머무르려 했다.
그러나 진실은 머물수록 인간을 가볍게 하지 않는다.

삶의 형식—관계의 언어, 하루의 리듬, 공동체의 시간—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실은 인간을 지탱하지 못한다. 깊어질수록 삶은 따라오지 못했고, 그는 점점 일상에서 멀어졌다.

사람들은 그 상태를 ‘광기’라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 과도한 정면 응시의 결과였다.
사회는 그 진실을 이해하지 못했다기보다, 함께 살 수 없었다.

3. 나자렛 예수 ― 진실을 안고 걸어간 인간

나자렛 예수 역시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달랐다. 그는 진실을 붙들고 머무르지 않았다. 진실을 안고 걸어갔다.
예수에게 진실은 설명이 아니라 사건이었다.

그는 신을 정의하지 않았고, 신을 길 위로 데려왔다.
밥상으로, 병자의 피부로, 죄인의 집으로, 눈물과 분노가 교차하는 자리로.
그의 진실은 언제나 관계 속에서 움직였다.
그래서 그의 진실은 추상이 되지 않았고, 책임이 되었다.
사랑이 되었고, 불편한 자리에 앉는 선택이 되었으며, 손을 더럽히는 용기가 되었다.

그는 진실과 함께 인간으로 남는 길을 선택했다.
머무르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갔다.
그래서 그의 태도는 사람들의 눈에 더 미쳐 보였다.
왜냐하면 말로 된 진실은 토론할 수 있지만, 삶이 된 진실은 질서를 흔들기 때문이다.

4. 태도가 공간이 될 때 ― 탑과 십자가

이 두 태도는 결국 공간으로 응고된다.
휠드린의 진실은 탑에 머물렀다.
독일 튀빙겐, 네카어 강가의 탑 꼭대기 방. 그 옥탑은 감옥도 은둔처도 아니었다.
사회가 진실을 너무 가까이 본 한 인간에게 허락한 경계의 공간—완전히 쫓아내지는 않되, 더 이상 중심에 둘 수 없는 자리였다.

탑은 높다.
그러나 그 높이는 상승이 아니라 후퇴의 높이다. 광장과 시장을 떠나 충돌을 피하는 높이.
휠드린은 제거되지 않았다.

대신 무력화되었다.

사회는 그를 처벌하지 않고, 침묵 속에 보관했다.
탑은 이렇게 말한다.
“너의 진실은 깊다. 그러나 우리 삶의 중심에는 둘 수 없다.”

반면 예수의 진실은 십자가로 향했다.
십자가는 숨겨진 곳이 아니라, 모두가 보도록 세워진 자리다.

도시의 외곽, 길 위—고개를 돌릴 수 없는 공개된 장소.
탑이 진실을 보관하는 공간이라면,
십자가는 진실을 끝내 제거하는 장치다.

기성체제는 무너진 진실은 격리할 수 있지만, 무너지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진실은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는 침묵 속에 봉인될 수 없었고, 마침내 제거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미쳐서 죽은 것이 아니다.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 살해 되었다

5. 오늘 우리 앞에 남은 질문.

탑과 십자가는 더 이상 과거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실상 앞에 선 인간에게 언제나 열려 있는 두 태도다. 진실을 붙들고 머무를 것인가, 진실을 안고 걸어갈 것인가. 이 물음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문제다.
모든 예술의 끝에 이 질문이 남는다.
예술은 언제나 진실을 향해 간다. 그러나 예술이 도달하는 진실은 개념이 아니라 노출이다. 작품이 깊어질수록, 형식이 정교해질수록, 인간은 세계의 표면이 아니라 존재의 밑바닥과 마주하게 된다. 거기에는 위로도 해답도 없다. 다만 숨 막히는 명료함이 있을 뿐이다. 사물이 사물 이전으로, 말이 말 이전으로, 내가 나 이전으로 돌아가는 자리. 그 앞에서 인간은 더 이상 연기할 수 없다.
그때 예술가는 선택한다.
그 진실을 보관할 것인가, 아니면 감당할 것인가.
진실을 보관하는 예술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종종 후퇴의 형태를 띤다. 탑처럼 높지만 고립된 자리에서, 진실은 언어로 응축되고 침묵으로 봉인된다. 이때 예술은 깊이를 얻지만, 세계는 그대로 남는다. 존재는 드러났으나, 삶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반대로 진실을 감당하는 예술은 불편하다. 그것은 작품에 머물지 않고 삶으로 흘러나온다. 관계를 흔들고, 책임을 요구하고, 선택을 강요한다. 이때 예술은 더 이상 안전한 영역에 머물 수 없다. 그것은 광장으로 나오고, 길 위에 서며, 십자가의 위험을 감수해야한다.

진실이 형식이 아니라 몸이 될 때, 예술은 삶의 윤곽을 바꾼다.
그래서 존재의 실상 앞에 선 인간은 언제나 위태롭다.
그는 더 이상 ‘창작자’나 ‘관객’으로 숨을 수 없다.
그는 묻는다.
내가 본 이 진실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휠드린이 보여준 것은 진실의 위험한 아름다움이다.

진실은 인간을 들어 올리기도 하지만, 인간을 떠받칠 구조가 없을 때는 조용히 무너뜨린다.

그 무너짐은 실패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순간이다.
예수가 보여준 것은 다른 가능성이다.
진실이 사랑으로, 책임으로, 관계로 살아질 때, 진실은 인간을 파괴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을 끝까지 인간으로 남게 한다.

그 길은 안전하지 않다. 오히려 제거의 위험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 위험 속에서만, 진실은 역사 속을 걷는다.

그래서 모든 예술의 끝, 모든 사유의 끝, 모든 신앙의 끝에는 이 질문 하나가 남는다.
진실은 어디에 머물 것인가.
작품 안에, 탑 위에, 침묵 속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삶 안으로 내려와, 관계 속을 걷고, 상처를 감수하며, 십자가의 길을 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이렇게 바뀐다.
우리는 진실 앞에서, 어떤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6.
휠데를린은 그 흔적 앞에서 끝내 머무르지 못했다. 진실을 끝까지 바라본 인간의 대가는 고독이었고, 그의 정신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는 진실을 설명한 사람이 아니라, 진실에 노출된 사람이었다.

나자렛 예수는 신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신을 ‘말’로 정리하지 않았고, 체계로 보호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을 비워, 진실이 삶이 되도록 내어주었다.

휠데를린이 진실 앞에서 무너졌다면, 예수는 그 진실을 짊어진 채 끝까지 걸어갔다.

한 사람은 진실을 응시했고, 다른 한 사람은 진실을 살아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앞에 남은 또다시 반복 되는 질문은 여전히 하나다.

진실은 어디에 머물 것인가. 탑 위에 안전하게 보관될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처럼 인간의 삶 속으로 내려올 것인가.

모든 예술의 끝에서, 그리고 모든 신앙의 끝에서 이 질문은 우리에게로 되돌아온다.

우리는 진실 앞에서 어떤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빛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는 그 빛을 기억하는 파수꾼으로 머물 것인가, 아니면 그 빛을 안고 어둠 속으로 걸어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