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축복인가 재앙인가/조광호

주혜1 2026. 1. 22. 20:28

축복인가 재앙인가
— 세상의 부와 명예와
     재능과건강

얼마 전 작업실에서 아르바이트 학생들 사이에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한 학생이 말했습니다.
“신부님, 우리나라 대통령이 되려면 검정고시를 봐야 하는 것 같아요. 검정고시를 본 분들은 대통령이 되고, 좋은 대학 나온 분들은 오히려 감옥에 가는 것 같거든요.”
다른 학생이 곧바로 반문했습니다.
“아니에요, 아무개 대통령은 서울대 나왔는데 감옥에 안 갔잖아요?”
그러자 또 한 학생이 덧붙였습니다.
“그분 아들이 대신 감옥에 갔어요!”
똑똑하고 잘나가는 사람들과
'정치인 만 그런게 아니라 재벌들도
감옥을 집드나들듯 하는걸 보면
좋은게 다 좋은게 이닌가 봅니다.'
하여 잠시
작업실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순진한 농담이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날카로운 통찰이 숨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왜 이 농담에 웃었을까요? 아마도 그것이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오래 붙들어 온 ‘축복의 공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을 드러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명문 학벌, 뛰어난 재능과 화려한 경력, 좋은 가문, 부와 건강을 축복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성서는 처음부터 묻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한 축복인가?”

1. 아브라함의 축복 — 소유가 아니라 방향

발터 브루그만은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아브라함의 소명은 특권의 선택이 아니라 위험한 부르심이었다고.
“너를 축복하겠다”는 약속은 곧바로
“너를 통하여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문장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축복은 그가 더 많이 가지게 되는 상태가 아니라,
그가 더 많이 흘려보내야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성서에서 축복은 언제나 방향성을 지닙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축복이
오로지 나에게로 모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성서적 축복이 아닙니다.

그때부터 축복은 왜곡되고, 관계를 파괴하는 힘으로 변합니다.

2. 축복의 전도(顚倒) — 신명기의 경고

신명기는 축복과 저주를 단순한 보상의 언어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경고합니다.
“네가 배부르고,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될 때
네 마음이 교만해져 주 너의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여기서 문제는 부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부가 기억 상실을 낳는다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을 잊고, 이웃을 잊고, 결국 자기 자신마저 잊게 만드는 상태—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참된 재앙입니다.

3. ‘값싼 은총’과 왜곡된 축복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를 “값싼 은총”이라 불렀습니다.

대가 없는 은총이 아니라, 책임 없는 은총.

삶을 변화시키지 않고, 관계를 요구하지 않는 은총입니다.

이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축복 신앙’과 정확히 겹칩니다.

잘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하느님의 승인으로 착각하는 순간, 이러한
축복은 자기 정당화의 도구가 됩니다.

그때 축복은 은총이 아니라 면허증이 됩니다.

이미 선택받았으니, 더 이상 내 삶은 질문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지니면 축복은 자기중심주의의 면허증이 됩니다.

4. 아상(我相)과 교만 — 성서의 오래된 통찰

일등을 하고, 생각한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외적 성취에서 비롯된 우월감은
아차 잘못 생각하면
타인의 인정에 중독이됩니다.

이런 우월중독에 걸면 평생고생하며 살게 됩니다.
끊임없이 이웃과 비교하며
타인의 눈치와
인정과 존경의 유명세에 휘둘리는 가여운 인생이 되어
밖으론 굉장한듯 보이지만 늘 분노와 불안 속에 살게 됩니다.

성서는 이 현상을 오래전에 이미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만을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굽히는 사랑”이라 불렀습니다.

이 사랑은 결국 자기 자신마저 파괴합니다.

5. 종교적 깨달음의 성취도 예외가 아니다

이 진리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수행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스스로를 더 깨달은 자, 자신을 더 영적인 자로 늘 인식하는 순간,
그 지혜와 덕성은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어디서나 주인이 되어 진리에 머문다는 임제선사의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은
어디서나 내가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상황·인정·욕망에 끌려가지 않고 깨어 있음의 주인이 되라는 말이며,
내가 서 있는 곳이 곧 진리라는 선언이 아니라,
도망치지 않고 책임지고 서 있을 때 그 자리에서 진리가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이는 자기 도취가 아니라 자기 책임의 요청입니다.
성서가 말하듯,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된다.”
깨달음도, 재능도
지식도, 영성도 요구를 동반한 축복입니다.

6. 그리스도교 축복의 핵심 — 나눔
신약에서 축복은 더 분명해집니다.

예수는 축복을 소유의 언어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복음은 언제나 나눔의 형태를 띱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합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재물 외
“잉여 재물은 가난한 이의 것이다.”

이는 윤리적 권고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선언입니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이 나만의 것이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하느님의 질서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맺으며 끝내는 말 — 축복은 관계다

축복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나를 통해 다른 이가 살아나는 관계입니다.

나의 건강과 재능과 지식이 공동체의 생명이 되는 관계입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이 그에게만 머물렀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서든 주인이 되되,
그 주인됨이 겸손과 나눔으로 드러날 때 만
그 축복은 향기로운 꽃이 되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축복은 재앙이 되어
결국 우리 자신을 가두는 정교한 감옥이 될 것입니다.

받은 축복이 많든 적든
크든작든 간에 모든 축복의 속성에
감춰진 진리를 눈여겨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가며 끊임없이 물어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 맡겨진 이 세상의 부와 명예와 재능과 건강은
과연 축복인가, 아니면 재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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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영광의 로고스 ㅡ부분 조광호유리화. 진주김옥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