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문단(文壇)도 화단(畫壇)도 없다. / 조광호신부

주혜1 2026. 2. 4. 22:43

문단(文壇)도 화단(畫壇)도 없다
― 울타리 사회에서 예술은 어디에 서 있는가

‘문단(文壇)’과 ‘화단(畫壇)’이라는 말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쯤 이 단어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壇(단)은 본래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뜻한다. 높여 쌓은 자리, 권위가 부여된 공간이다.

따라서 문단·화단이라는 말에는 단순한 활동 영역 이상의 의미가 스며 있다. 그래서 촌스러운 뉘앙스 풍기는 말이 되었다.

그것은 위계와 승인, 권위와 질서의 구조를 암시한다. 문학계, 미술계라고 해도 충분할 텐데 굳이 ‘단(壇)’을 붙여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우리는 여전히 예술을 단상 위의 일로 상상하는가.
포스트 휴먼 시대라 불리는 오늘, 인간 중심적 위계가 해체되고 경계가 흐려지는 이 시대에 ‘단’이라는 말은 오히려 낡은 권위의 그림자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이 단어가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울타리의 논리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담장이 높은 사회
담장이 높은 사회다. 아파트의 담장만 높은 것이 아니다.

학교에도, 직업에도, 인간관계에도, 그리고 예술에도 담장이 있다.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는지, 누가 통과했고 누가 탈락했는지, 누가 인정받았고 누가 아직 “아닌지”를 끊임없이 구분한다.

이 구조는 예술 안에서도 반복된다.
‘등단’이라는 말이 이를 상징한다.

마치 고등고시에 목매달 듯, 예술인들 스스로가 등단을 말한다. 등단하지 않으면 아직 예술가가 아닌 것처럼, 공식 문단이나 제도권 화단에 들어서야만 존재가 승인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등단은 한때 통과의례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 그것은 계단이 되었다. 안과 밖을 가르고, 위와 아래를 나누며, 인정된 자와 미인정된 자를 구획하는 계단. 가장 자유로워야 할 예술이 가장 제도화된 계단 위에 서 있다.

이것은 불편한 진실이다.

작은 권력욕인가, 문화권력인가
이 문제는 단순히 몇몇 개인의 욕망으로 환원될 수 없다. 동시에 추상적인 구조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그 안에는 작은 권력욕이 있고, 그것이 축적되어 형성된 문화권력이 있다.

예술계의 권력은 정치권력처럼 거대하지 않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미묘하다. 누가 추천권을 가지는가, 누가 심사위원이 되는가, 누가 초대받는가, 누가 명단에서 빠지는가. 이 미세한 영향력은 개인에게는 ‘작은 권력’처럼 보이지만, 예술가의 생존과 명예를 좌우한다.

문제는 그것이 구조화될 때다.

문화권력은 총을 들지 않는다. 법을 만들지도 않는다. 대신 기준을 만들고 경계를 긋는다. 누가 ‘문학’이고 누가 ‘아마추어’인지, 누가 ‘현대미술’이고 누가 ‘취미’인지 구분한다. 취향의 이름으로 작동하지만 실상은 질서 유지의 장치다.
작은 권력욕이 구조의 언어를 입고, 구조가 개인의 인정 욕망을 통해 유지될 때, 울타리는 더 단단해진다. 그리고 예술은 점점 ‘화단’이 된다.

예술은 화단의 꽃이 아니다.
화단의 꽃이 되어서도 안된다.

‘화단’이라는 말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花壇, 정돈된 꽃밭이다. 잘 가꿔지고, 관리되고, 보기 좋게 배열된 공간. 그러나 예술은 본래 그런 화단에서 피는 꽃이아니다.

야생의 꽃은 허가를 받지 않는다.

비를 기다리고, 바람을 맞고, 때가 되면 꽃피고 지면 그뿐이다.

예술도 그러하다. 그것은 허가를 받아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생명처럼 솟아나는 것이다.
어디에서 전시를 했는가, 어디에서 출판을 했는가, 얼마에 팔렸는가, 얼마나 팔렸는가. 이 질문들은 오늘의 예술을 둘러싼 가장 흔한 질문들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 그것들은 본질이 아니다.

장소는 영향력을 줄 수 있어도 진리를 보증하지 않는다. 숫자는 유통의 성공을 말해 줄 수 있어도 존재의 깊이를 측정하지 못한다.

진리는 통계로 증명되지 않는다.

빛이 가격표로 빛나지 않듯, 예술도 판매량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알량한 보장과 예술의 본질
어디에 들어가면 알량한 돈이 나오고, 어디에 소속되면 명예가 보장된다는 믿음은 예술과 무관하다.

그것은 직업의 논리일 수는 있어도 예술의 논리는 아니다.

보장은 안정의 언어다. 예술은 불안의 언어다. 보장은 체계 속에서 유지되지만, 예술은 체계를 흔들며 발생한다.

“어디에 속해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나를 흔드는가”가 예술의 출발점이다.

소속이 예술을 보증하지 않는다. 진리만이 예술을 정당화한다.

절대절명의 시대, 예술의 자리
인류세와 자본세라는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 세계는 이미 깊은 균열 위에 서 있다.

이때 예술이 해야 할 일은 안전한 감성의 울타리 안에서 박수를 받는 것이 아니다.

상처를 드러내고, 구조를 흔들고,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것. 그것이 예술의 본령이다.

예술은 결코 어느누구의 승인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예술은 진리의 충격 속에서 태어난다.

가장 화려한 전시장보다, 가장 거친 야생에서 먼저 일어나는 것이 진리의 드러남이다.

문단도 화단도 없다.

있어야 할 것은 단 하나, 진리가 드러나는 자리가 있을 뿐이다.

꽃은 화단의 허락을 받아 피지 않는다. 봄이 오면, 그냥 핀다.
예술도 그렇다.

그것은 울타리 밖에서, 승인 이전에서, 위계 이전에서
먼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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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블라 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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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조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