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감상

[스크랩] 와토(1684.10.10~1721.7.18)

주혜1 2008. 3. 13. 09:53

와토<Watteau, Jean-Antoine>(1684.10.10~1721.7.18)

[격조높은 사랑]의 아취(雅趣)

 

프랑스의 화가. 북프랑스 발랑시엔 출생.
1702년 파리로 나와 당시 그랑드 오페라극장의 장식화가였던 C.질로에게 배우고 이어 장식화가 C.오드랑의 조수가 되어, 주로 인물사생과 희극배우들을 스케치했다.
오드랑은 당시 뤽상부르궁의 어용화가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의 접촉으로 궁전에 있는 루벤스나 플랑드르계 명화를 접하고 감화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16세기 베네치아파에서도 영향을 받아, 점차 로코코회화의 창시자로서의 작풍을 확립해 나갔다.
17년 왕립아카데미 정회원이 된 기념으로 그린 《시테섬으로의 출범》(루브르미술관 소장)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이 그림 속에는 와토 예술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당시 베르사유궁전을 중심으로 꽃핀 화려한 왕조문화의 궁전풍속을 비롯하여 주로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펼쳐지고 있던, 밝고 우아하며 어딘지 모르게 관능적인 매력을 풍기는 풍속이나 취미에 적합한 작풍을 전개하여 ‘아연’으로 불리는 로코코회화 특유의 테마와 정서를 확립해 가고 있었다.
자연관찰에 착실하였으며, 그의 작풍을 이어받은 다른 로코코화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풍요함이 깃들어 있었다.
육체적으로 연약했던 와토는 일찍부터 폐병을 앓아 20년 요양차 런던에 갔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다시 파리에 되돌아왔다.
그런 와중에서도 친구 제르생이 화상을 시작하였을 때, 가게의 간판그림으로 평생의 걸작 《제르생의 간판》(베를린 샤를로템부르크궁 소장)을 그리기까지 하였다.
이 그림을 완성하고 얼마 안 가서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나, 그는 18세기의 전 유럽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밖의 작품으로 《전원오락》 《파리스의 심판》 《제우스와 안티오페》, 이탈리아희극에서 취재한 《질》 등 명작들이 파리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 그네

따사로운 햇볕이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드는 으슥한 정원 한 모퉁이에서 그네타기를 즐기는 연인들. 이 주제는 로코코적 풍속의 하나의 전형적 정경이며, 그것은 로코코 회화의 막내동이 격인 프라고나르의 같은 제목의 작품으로 이어진다. 이 작품이 와토의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거의 이론의 여지가 없으며, 그만큼 '와토적'인 작품이라 할 것이다. 그네를 미는 사나이는 꽤나 진지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반면 여자는 경쾌한 포즈와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려져 있다. 으슥한 나무 그늘에서 그네타기를 즐기는 그 마음의 자유스러움, 그리고 이와 곁든 사랑의 감미로움과 마음 조이는 매혹의 손길 . 이것은 바로 로코코 회화의, 특히 와토의 회화 세계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2. 놋그릇을 씻는 여인

허름한 농가의 가운데 뜰에서 물통에다 놋그릇을 씻고 있는 여인, 오른쪽 위편 창에는 광주리를 내리려는 사나이가 있고 또 한 사나이가 그것을 올려다보고 있다. 후기의 와토 답지 않은 작품으로 보이고 오히려 플랑드르의 통속적인 풍속화를 생각하게 한다. 요컨대, 와토 특유의 우아함의 흔적이 전혀 없으며, 따라서 이 작품이 와토의 작품으로는 도저히 간주할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물들의 신체의 움직임의 경쾌함, 놋그릇들의 질감을 묘출한 필촉의 경쾌함, 그리고 배후 풍경의 유연함 등에서 와토의 초기 화풍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3. 달빛 속의 아를캥 황제

그림의 주제는 당시 희극 작가의 희극 장면의 한 정경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희극 장면을 직접 보고 그려진 것이 아니라, 와토가 그의 보호자인 클로드 질로와 같이 생활할 때 본 질로의 판화를 본따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주제 선택에 있어서 질로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제작 연도도 일반적으로 1708년경이라는 설로 통용되고 있기는 하나 실제로는 1712년 전후가 아닌가도 추정되고 있다. 어쨌든 화면 왼쪽 끝의 피에로의 동작과 표정이 와토적인 것이 틀림이 없으며, 가벼운 필촉, 색조의 미묘한 이행, 인물의 자유로운 포즈의 정확한 포착은 이 작품에서도 분명하게 눈에 띈다.



4. 참새 둥우리를 든 사나이

이 작품은 원래가 패널 그림의 중앙 부분에 그려진 것이었으나, 나머지 부분이 그 후에 절단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모사에 의한 것인지, 그 내력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하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이 그림에서도 우리는 와토의 경쾌한 필촉, 포즈나 표정의 정확한 포착, 질감의 완벽한 표현 등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꿈결 속에서와 같은 하늘의 아롱진 색채, 역광의 미묘한 효과 또한 이 그림이 모사가 아니라 와토 자신의 붓에 의해 그려진 것임을 믿게 하기에 충분하다. 연인들이 나무 그늘에 앉아 서로 기대어 참새 둥우리를 들여다 보고 있다. 사나이의 허벅다리에 팔꿈치를 기대고 있는 자세도 부자연스러움이 없고 오히려 상냥함을 느끼게 한다.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개의 모습이 또한 이 정경에 어울리고 있다.



5. 두 쌍의 연인들

기타를 둘러 멘 피에로와 왼쪽 끝에 앉아 있는 아를 캥, 그리고 부채를 든 젊은 여자와 또 한 사람의 여자가 으슥한 정원 한 모퉁이에 그려져 있다. 오른편 여자는 검은 가면을 피에로에게 내밀고 있으나, 그것이 그 어떠한 사랑의 표징인지 또는 어떤 무대의 한 정경 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당시의 세태로 보아 두 쌍의 연인들이 들이라든가, 실내에서 사랑의 밀회를 즐긴다는 것은 아마 일상적인 풍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와토가 그리는 사랑의 밀회는 단순히 감미로운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질투라든가 시기라든가 하는 미묘한 요소들이 끼어 들고 있다. 작품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까닭도 있겠으나, 색채의 아름다움과 놀라운 질감 묘사가 충분히 발휘된 일품이다.



6. 조각하는 원숭이

이 작품의 진위(眞僞)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와토가 <조각하는 원숭이>와 <그림을 그리는 원숭이>를 각기 1점씩 그렸다는 사실은 당시의 판화를 통해서 확실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원숭이>는 판화만이 남아 있다. 작품의 보존 상태는 조잡한 수복(修復)과 잦은 덧칠로 해서 최악의 상태에 있다. 이 원숭이의 주제는 당시의 일부 판화가들 사이에서 다루어진 것이기도 하나 혹자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원숭이에게서 와토 자신을 찾아보고 있다. 주제 자체가 지니고 있는 풍자는 로코코 적이며, 와토는 아마도 자기 풍자의 의미도 함께 담아 이 주제를 다룬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작품은 장방형 속에다 약간 이지러진 원형 속에 그림이 그려지고 있으며, 이 그림은 그 원형 만을 게재한 것이다.

 



7. 사랑의 모험을 하는 여인

작품의 보존 상태는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나 그림 전체가 와토 본래의 섬세함을 지닌 아름다운 작품이다. 화면 중앙 약간 왼편의 여자는 백조 깃털의 레이스가 달린 모자를 쓰고 화사한 지팡이를 짚은 채 어엿하게 서 있다. 피에로와 순진한 청년 앞에 그녀의 오만스러운 자세, 입술에 떠올린 야릇한 미소는 그녀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알고 사나이들의 마음을 매혹할 수 있다는 자신에 넘쳐 있다. 이 장면이 실제 야외에서의 정경인가, 아니면 연극 무대의 한 장면인가에 대해서는 구구한 의견이 엇갈리고 있으나, 그 어느 장면이든 간에 와토 특유의 '사랑의 향연(페트 걀랑트)'의 보다 순수하고 감미로운 세계가 그려져 있음에는 틀림없다.



8. 화살을 빼앗긴 큐우핏

장난이 지나쳐 어머니 비너스로부터 화살을 빼앗긴 큐우핏이 그 화살을 다시 뺏으려고 어머니의 가슴팍에 매달리고 있다. 이미 오래된 주제이기는 하나 이 작품의 구도를 와토는 베로네제의 작품에서 빌어 오고 있다. 와토는 비단 베로네제 뿐만 아니라, 베네치아파의 여러 화가들, 즉 티지아노, 틴토레토 등의 작품을 통해 화려한 색채와 풍만한 육체에 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와토에게 있어서의 비너스는 보다 우아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색채도 또한 훨씬 담백하고 경쾌한 것이 되고 있다. 구도에 있어서는 인물을 전면에 크게 클로즈업시키고 원경을 까마득하게 멀리 생략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또한 특징이다.



9. 주피터와 안티오페

잠자는 안티오페(또는 님프)의 나신을 엿보고 있는 주피터(또는 사티로스)라는 관능적이며 신화적인 주제를 즐겨 다룬 것은 베네치아파의 화가들이며, 와토에게 미친 이 파의 영향을 여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뒤편의 주피터의 힘찬 데랑은 플랑드르의 회화, 특히는 루벤스의 회화를 상기시킨다. 따라서 이 그림에는 베네치아풍과 플랑드르풍이 기묘하게 혼존하고 있으며, 여자의 나신과 남자의 나신과의 강한 대조를 보여 주고 있다. 두 인물을 전경에 크게 클로즈업시키고 원경을 먼 조망으로 처리한 것은 <화살을 빼앗긴 큐우핏>의 구도와 마찬가지이나 인물 처리는 전혀 다르다. 또 주제 면에서 볼 때 이와 같은 비속한 관능적 테마는 본래 와토에게 인연이 먼 것이 사실이다.



10. 이탈리아풍의 놀이

기타를 치며 노래와 사랑의 말을 읊는 메즈탕(이탈리아 희극의 극 중 인물의 하나. 사랑의 뚜장이 역이다.), 손에 접힌 부채를 들고 있는 여인이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 배후에는 둘 또는 세 쌍의 연인들이 있고, 화면 왼쪽에는 누드의 조각, 오른쪽에는 생각에 잠겨 있는 사나이가 서 있다. 이 정경 역시 실제의 '사랑의 향연'의 장면인지 또는 이탈리아 희극의 한 장면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오른발을 내뻗고 있는 메즈탕, 그 쪽으로 몸을 굽히고 있는 여인, 뒤쪽에서 앞으로 몸을 굽히며 오른손을 땅에 짚고 있는 여인, 그리고 화면 양편의 조각과 서 있는 인물에 이르기까지 S자 형의 곡선 구도가 화면 밑부분을 넘실거리듯 펼쳐지고 있다.



11. 이탈리아풍의 세레나데

기타를 치며 이야기를 건네는 연주가, 약간 몸을 뒤로 움추리며 그와 마주 보고 앉아있는 젊은 여자, 그리고 탬버린을 든 여자와 또 한 사람의 사나이가 그려져 있다. 여기에 나무 그늘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다섯 번째 인물은 아마도 와토가 자주 등장시키는 질투의 상징일 것이다. 우거진 나뭇잎들은 벌써 단풍이 지기 시작하고 있으며, 그 너머로 보이는 하늘에는 늦은 여름철의 구름이 끼어 있다. 인물들의 배합이 엮어내는 부드러운 선율은 일종의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선율 자체가 와토 특유의 세계이다. 이 작품은 X-레이에 의한 검사에서, 와토가 이 그림을 그리기 전에 잉크로 장식적 아라베스크로 화면의 구성을 미리 결정한 후에 완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12. 조망

드높은 나무들이 우거진 정원에서 한무리 인물들이 담소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또는 거닐고 있다. 귀족의 호화로운 정원에서의 사랑의 정경이다. 전경(前景)에는 한 쌍의 연인들, 그 왼편에는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서 있는 여인, 화면 중앙 약간 오른편에서 희희 낙락하는 두 소녀 등 이들 등장 인물의 포즈와 의상의 묘사는 와토가 이미 화가로서의 원숙기에 들어섰음을 말해 주고 있다. 화면 중앙에 우거진 나무 사이로 샛길이 트여 조망이 멀리 바라다 보이며, 그 원경에 고대 풍의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은 와토의 보호가 이기도 했던 은행가 크로자의 저택이며, 이 그림의 정경도 그 저택의 정원을 무대로 그린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정원이든 간에 자연의 한 모퉁이를 꿈이 어린 시절의 세계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데 와토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13. 쟝 드 쥘리엔느의 초상

모델인 쥘리엔느(1686~1766)는 유복한 상인으로 와토의 가장 가깝고 헌신적인 친구이자 20점에 달하는 가장 훌륭한 와토 작품의 소장가이기도 했고 또 와토에 관한 많은 회상의 글을 남겨 놓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이 작품이 와토의 작품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이론이 제기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높은 안목과 세련된 취미의 소유자였던 친구의 초상화를 와토가 그렸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섬세하고 부드러운 색조의 처리와 배경의 우거진 나뭇가지의 미묘한 뉘앙스는 역시 와토 특유의 것임이 틀림없다.



14. 密語를 속삭이는 아를캥

이탈리아 희극의 아를캥이 빨강과 초록색의 마름모꼴 모양의 광대 옷을 입고 또 검은 가면을 쓰고 상대역인 콜롱빈(광대의 연인)에게 무엇인가 열심히 속삭이고 있다. 물론 이 두 중심 인물은 이탈리아 희극의 한 장면을 그려낸 것이며, 반대로 왼편 뒤쪽의 인물들은 와토만의 세계, 즉 '사랑의 향연(페트 걀랑트)'의 세계요, 전원에서의 사랑의 장면이다. 그리고 화면 중앙 뒷면에 우뚝 서 있는 주상(柱像)은 그것이 장미꽃에 엉키고 있어 애욕의 상징임이 분명하다. 아를캥과 콜 롱빈이라는 극 중 인물의 한 쌍과 선남 선녀의 사랑의 장면, 그리고 애욕의 상징인 불길한 모습의 주상의 배합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애욕의 드라마와 전원에서의 목가적인 사랑의 속삭임의 대비 이상의 것임이 분명하다.



15. 철부지

실 타래를 들고 실을 뽑고 있는 시골 아낙네, 그 아무렇게나 내뻗은 발끝 밑에 손에는 피리를 들고 밀짚 모자를 쓴 사나이가 엿보고 있다. 이 정경이 연극 무대의 한 장면인지, 아니면 어떤 풍속화적인 정경인지 또는 그 어떤 우의(寓意)를 담은 그림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주제부터가 와토로서는 예외적인 농촌 풍속을 다루고 있으며, 이 점에 관해서는 많은 전문가들이 플랑드르의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사실 이 작품에서는 감미롭고 우아한 공상의 세계 보다 현실적인 풍속의 매력에 이끌리고 있는 태도에는 분명히 플랑드르적인 요소가 깔려있다. 혹자는 이 작품에서 와토의 사실주의 정신의 표명을 찾아보기도 하고 또 혹자는 와토의 작품임을 부정하고도 있다. 만일 와토의 것임이 분명하다면 이 작품은 와토의 본질을 밝히는 중요한 작품의 하나이다.



16. 샹젤리제

야외에서 한 때의 즐거움을 그린 전형적인 작품의 하나이다. 대개의 와토의 작품이 그러한 것처럼 이 작품 역시 거듭되는 보수로 해서 상당한 손상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는 하나, 부드러운 햇볕, 나뭇잎들의 가벼운 하느작거림, 감미로운 공기의 묘출은 분명히 와토만의 세계이다. 전경의 아낙네들이 우아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저마다의 자태, 어린이들의 천진스러운 표정이 어울려 환한 야외에서의 평화로운 분 위기를 돋구고 있다. 이를테면 <정원에서의 모임>에서와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는 자취를 감추고 있다. 와토의 작품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밝은 인간적인 따뜻함이 감도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 작품보다 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정원에서의 오락>과 좋은 비교가 되는 작품이다.

 


출처 : 김동진아뜰리에
글쓴이 : 백설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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