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다와 길 사이의 시학
김명인 시를 관통하고 있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바다’와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다는 물론 김명인의 뼈아픈 유년체험의 상징적 대상으로 그의 초기 시에서부터 후기 시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고. 길은 그가 고향을 떠나와서 겪게 되는 방황과 모색의 표징물로서 김명인 시인의 삶의 노정을 상징하는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여러 평자들에 의해서 지적 된 바 있듯이 김명인의 시에서 바다 이미지는 그의 유년체험과 맞물리면서 그의 시 전체를 관통하는 근원적 심상으로 간주되어져 왔다. 출렁거리면서도 어딘가로 끊임없이 들고 나는 행위를 반복하는 바다는 김명인에게 있어서 영원한 그리움이면서도 결국은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유년의 고향체험을 간직하고 있는 복합적 의미를 지닌 심상인 것이다.
김명인 시에서의 길 이미지는 ‘떠남’이라는 명제와 맞물려 있는데, 이는 그에게 지독한 고통과 환멸을 안겨준 유년체험의 아픔이 가져다준 방황과 모색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바다’로 상징되는 그의 유년 체험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물인 셈이다. 원래 길 이미지는 ‘떠남’과 ‘돌아옴’이라는 두 가지 명제와 관계되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김명인의 시에서는 ‘돌아옴’보다는 주로 ‘떠남’에 비중이 실려있다. ‘떠남’에 대한 단초가 보이는 것은 물론 그의 첫 시집인 『동두천』(1979)이다. 이 시집에는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아버지와 아버지 대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서 자식을 돌볼 수 없었던 어머니, 이런 척박한 가정환경 속에서 본의 아니게 고아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시인 자신의 ‘더러운 그리움’으로 가득했던 유년체험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따라서 그의 고향에 대한 기억은 아름다움이나 그리움보다는, 어딘가 벗어나야 할 숨 막히는 ‘아우시비쯔’와 같은 곳으로 인식된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어딘가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탈출에의 상상과 자신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동두천 1」).
김명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던 ‘떠남’에 대한 갈망이 ‘길’의 이미지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그의 세 번째 시집인 『물건너는 사람』(1992)부터이다. 그는 이 시집에서 인간의 노동과 바다가 만나는 ‘소금바다’에 천착하기도 하고(「소금바다로 가다」), 쉽게 버릴 수 도, 그렇다고 쉽게 외면해 버릴 수도 없는 그의 내면의 영원한 상처로 남아있는 가족사적 체험을 ‘유적’이라는 모티브를 통해서 현재화 시켜서 바라보기도 한다(「유적에 오르다」,「유적을 향하여」「유적을 위하여」). 이러한 그의 노력은 그의 ‘떠남’이 단순히 고향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눈물겨운 성찰에 바탕을 둔 필연적인 떠남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이 시집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소금’의 이미지는 ‘바다’와 ‘인간’을 동시에 포섭하는 이미지라는 점에서 김명인 시인이 추구하는 시 세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의 시에 나오는 ‘소금’이미지는 ‘모래’나 ‘파도’ 이미지와 함께 넓게 보면 ‘바다’의 이미지에 포섭된다는 점에서, ‘바다’라는 근원적 이미지의 환유적 상관물들인 셈이다. 특히 여기서 ‘소금’ 이미지는 남진우의 지적대로 물과 모래의 종합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물이 시인의 유년 체험의 근원인 ‘바다’와 상관이 있고 개인적인 가족사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면, 모래는 사막과도 같은 세상으로 상징되는 현대 문명의 제유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이 개인적이며 근원적인 ‘물’의 세계를 떠나 도달하고 싶어 하는 곳은 보다 넓은 세상이지만, 그 세상도 결국 사막과 같은 곳이기 때문에 오래 머물 수 없는 곳이다. 이러한 개인과 세계의 구조적인 갈등은 시인으로 하여금 끝없는 탐색의 길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게 만들기도 하고, 반면에 영원히 바다를 떠날 수 없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이기도 하다.
그의 네 번째 시집인『푸른 강아지와 놀다』(1994)는『물건너는 사람』에 이어 ‘길’에 대한 탐색을 가장 본격적으로 보여준 시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서, 그가 고향이 ‘후포’에서 ‘동두천’으로, ‘유타’로, ‘연해주’로 쉴 새 없이 달려온 길의 행로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뒤돌아보기도 하고, 영문도 모르는 길을 가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하늘’과 그 길의 끝에 있을 ‘블랙홀’을 가늠해 보기도 한다. 시인이 길을 통해서 줄기차게 탐색해 온 것은 결국 삶과 죽음으로 요약되는 시간에 관한 인식이다. 시인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반추해 보면서 자신이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운명과 그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허망함 사이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 운명을 견디는 법을 깨닫게 된다.
하늘에 솜자루 풀어놓고
안산 가까이 날아가다 되돌아보는 구름
몰고 가는 짐승들 발걸음이 풍선처럼 가벼워
인간이 닿지 않는 저 육전 거리까지 끌려가보자
일행은 팔리러 가는 길인 줄도 잊어버린 채
한 구름의 무심한 인도를 즐겁게 따라 걷는다
영문 모른 채 새옷 입고
어머닐 쫓아나섰던 그 때 그 고아원 길
빌려온 책을 코앞에 펼쳐놓아도
텅 빈 마음이 까마득한 사다리를 타고 흔들리는 하오,
읽던 글귀도 바람이 다
들고 가버렸다, 우리가 모르는 블랙 홀이
산너머 더 먼 하늘 거기에도 있다는 것이다
―「하늘 길」전문
시인은 빌려온 책을 보다가 우연히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게 된다. 하늘에는 구름이 짐승들을 몰고 육전의 시장거리로 팔러가는 듯한 광경이 보이고, 그러한 풍경은 시인이 어린 시절 영문도 모르고 어머니를 따라나섰다가 혹독한 배고픔과 변두리의 삶을 체험해야 했던 송천동 고아원 가는 길을 되살려 낸다. 시인의 이러한 뼈아픈 체험은 세월이 많이 지난 현재에도 시인의 가슴 속에 ‘블랙 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시인이 여기서 말하는 ‘블랙 홀’은 시인의 내면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인 근원적 어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둠은 본질적으로 죽음 쪽에 가 있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김명인의 ‘블랙홀’은 단순히 죽음을 지향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시인의 의지가 엿보인다. 시인은 ‘블랙홀’의 대척점에 생명의 상징인 ‘꽃’의 심상을 예비해 둔다. ‘꽃’의 심상이야 말로 죽음을 단순히 시간의 끝으로 인도하지 않고 축제로 만들어주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2. 바다와 하늘을 잇는 생명의 끈-꽃
인간은 어머니의 물(양수)에서 와서 지하의 물로 돌아간다. 이 땅에 물이 남겨 놓는 것은 하찮은 재나 티끌뿐이다. 시인은 길을 통한 시간의 탐색의 끝에서 죽음과 만난다. 어쩌면 죽음이야 말로 시인이 걸어온 길의 마지막 화두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생명의 탄생을 바다를 통해서 인식하듯이 죽음 역시 바다를 통해서 바라본다. 시인은 죽음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축제임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에게 장례말고 더 큰 축제가
일찍이 있었던가
녹아서 짓밟히고 버려져서
낮은 곳으로 모이는 억만 년도 더 된 소금들,
누구나 바닷물이 소금으로 떠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죽음은 연두빛 흐린 물결로 네 몸 속에서도 출렁거리고 있다
�지 않는다면, 슬픔의 방부제 다하지 않는다면
소금 위에 반짝이는 저 노을 보아라
―「바닷가의 장례」부분
위의 시에서 시인이 장례를 하나의 축제로 보는 것은 “녹아서 짓밟히고 버려져서/낮은 곳으로 모이는 억만 년도 더 된 소금들”이 단순히 일시적으로 왔다가 사라지는 죽음의 부산물이 아니라 썩지 않는 방부제로서의 삶의 영원성에 닿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금 위에 반짝이는 저 노을”은 그런 의미에서 생명의 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금이 바다의 꽃이라면, 노을은 하늘의 꽃이다. 꽃은 죽음을 죽음으로 놓아두지 않고 다시 생명에게로 이어 놓는다. 바다 속에 떠다니는 소금도 언젠가는 돌고 돌아서 다시 인간의 몸에 생명의 자양분으로 복귀하게 마련이다. 태양이 물에서 나와서 물로 사라지지만, 그것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금이야 말로 죽음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꽃인 셈이다.
내가 이 물가에서 그대 만났으니
축생을 쌓던 모래 다 허물어 이 시계 밖으로
이제 그대 돌려보낸다
바닷가 황혼녘에 지펴지는 다비식의
장엄함이란, 수평을 둥글게 껴안고 넘어가는
꽃수레에서 수만 꽃송이들이 한번 활짝 피었다 진다
몰래몰래 스며와 하루치의 햇빛으로 가득차던
경계 이쪽이 수평 저편으로 갑자기 무너져 내릴 때,
채색세상 이미 뿌옇게 지워져 있거나
끝없는 영원 열려다 다시 주저앉는다
내 사랑, 그때 그대도 한 줌 재로 사함받고
나지막한 연기 높이로만 흩어지는 것이라면
이제, 사라짐의 모든 형용으로 헛된
불멸 가르리라
그대가 나였던가, 바닷가에서는
비로소 노을이 밝혀드는 황홀한 축제 한창이다
―「다시 바닷가의 장례」전문
앞의 시「바닷가의 장례」가 실제로 바닷가의 장례를 소재로 삼고 있다면, 이 시는 저녁에 바닷가에서 장엄하게 해가 지는 모습을 ‘바닷가의 장례’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바닷가에서 해가 지는 저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죽음을 통해서 이 땅의 모든 헛된 것들의 본질을 똑바로 바라보려는 시인의 시선은 동일하다. 시인은 이 시에서 바닷가 일몰의 장엄한 광경을 “수평을 둥글게 껴안고 넘어가는/꽃수레에서 수만 꽃송이들이 한번 활짝 피었다 진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해가 질 때 하늘을 붉게 수놓는 노을과 출렁이는 바닷물에 비친 반짝이는 노을빛을 묘사한 것으로, 시인이 노을을 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시인은 해가 소멸하는 일몰의 광경을 바라보면서 죽음의 섬뜩함이나 어둠을 생각하지 않고, 거기서 오히려 황홀한 꽃을 본다. 이 시를 보면 삶과 죽음, 밝음과 어둠, 사라짐과 영원의 사이에 ‘꽃’이 놓여있다. 꽃이야 말로 삶과 죽음을 새롭게 여는 문이고 이승과 저승의 틈을 아름답게 수놓는 ‘경계’의 꽃이다. 그런 의미에서 ‘꽃’ 이미지는 김명인의 시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꽃’ 이미지는 그의 여러 시집에서 드물지 않게 보이는 중요한 심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필자가 이 글에서 주요 텍스트로 삼고자 하는 그의 여덟 번째 시집『파문』(2005)에도 시집의 첫머리에 꽃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절벽 위 돌무더기가 만든 작은 틈새
스치듯 꽃뱀 한 마리 지나갔다
현기증 나는 벼랑 등지고 엉거주춤 서서
가파른 몸이 차오르던 통로와 우연히 마주친 것인데
그 때 내가 본 것은 화사한 꽃무늬뿐이었을까
바닥없는 적요 속으로 피어올랐던 꽃뱀의 시간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제 사족을 지워버렸다
아직도 한순간을 지탱하는 잔상이라면
연필 한 자루로 이어놓으려던 파문 빨리 거둬들이자
잘린 무늬들 그 허술한 기억 속에는
아무리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
말의 블랙홀이 있다 마주친 순간에는 꽃잎이던
허기진 낙화의 심상이여!
꽃뱀 스쳐간 절벽 위 캄캄한 구멍은
하늘의 별자리처럼 아뜩해서
내려가도 내려가도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
끝내 지워버리지 못하는 두려운 시간만이
허물처럼 뿌옇게 비껴 있다
―「꽃뱀」전문
시집『파문』을 읽어보면 꽃을 소재로 하고 있는 시들이 여럿 보인다. 대충 열거해보아도「꽃을 위한 노트」,「배꽃 江」,「봄산」,「消燈」, 「울타리」,「길」,「복날」,「봄꽃나무」,「식목」,「석류」등이 「꽃뱀」과 더불어 시 속에 꽃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김명인의 시에서의 꽃 이미지는 이 시집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비중이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 필자에게는 새로운 변화로 감지된다. 인용 시 「꽃뱀」은 직접 꽃을 소재로 한 것은 아니지만 꽃이 변용된 이미지가 ‘꽃뱀’이라는 점에서 꽃 이미지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앞에서 살펴 본 ‘바닷가의 장례’ 시리즈에서 꽃은 ‘바다’이미지와 관계되어 있다면, 「꽃뱀」에서는 그것이 ‘길’의 이미지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 다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절벽 위를 타고 오르는 꽃뱀과 마주친 경험을 ‘꽃’과 ‘길’의 이미지와 연결시켜서 ‘꽃뱀의 시간’으로 요약되는 인간 욕망의 덧없음과 허위성을 전경화 시키고 있다. 꽃뱀의 “가파른 몸이 차오르던 통로”와 “꽃뱀 스쳐간 절벽 위 캄캄한 구멍”은 그것 자체가 길이면서 동시에 욕망의 흔적이다. 시인은 꽃뱀이 더듬어 왔던 욕망의 흔적을 “바닥없는 적요”나 “캄캄한 구멍”으로 표현함으로써 길의 욕망이 거느리고 있는 허위성을 지적하고 있다. 시인에 의하면 꽃뱀은 한순간에만 꽃이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낙화일 뿐이고, 결국 꽃뱀이 벗어놓은 허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시에서 흥미로운 것은 물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절벽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물의 이미지가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파문’이 그것인데, ‘파문’은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심상이다. 시인이 ‘파문’에 주목하는 것은 ‘파문’이야 말로 “근원이었던 싱그러움”으로부터 번져 나간 것이며(「순결에 대하여」-『길의 침묵』 소재), “새겼다가 지우며 경계마저 허무는” “나를 흔드는 방식”(「종이배」-『길의 침묵』 소재)이기 때문이다. 즉 시인에게 있어서 ‘파문’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더듬어가는 방식이고 세상의 온갖 허울뿐인 삶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가장 지혜로운 소멸의 방식인 것이다. 인용 시에서의 ‘파문’ 역시 “잘린 무늬들 그 허술한 기억 속에는/아무리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말의 블랙홀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표인 셈이다. 그런데 ‘파문’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형상이 ‘물의 꽃’과 같다는 점에서 꽃의 심상과 연결된다. 존재의 심연에 블랙홀을 숨기고 있는 꽃인 ‘파문’이야 말로 시인이 탐구하고 싶어 하는 궁극적인 대상의 하나인 것이다.
3. 바다와 길의 만남-물고기
다음으로 ‘꽃’의 심상과 더불어서 시집『파문』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심상은 ‘물고기’이다. 김명인의 이번 시집을 보면 ‘꽃’과 같은 식물 이미지와 ‘물고기’나 ‘뱀’과 같은 동물 이미지가 혼재해 있다. 그리고 또 눈에 띄는 것은「배꽃」,「얼음 물고기」,「우물」,「신발」,「빨래」,「마늘」, 「모과」라는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시 대부분이 구체적인 대상을 시적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이 이처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에 천착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일상이야 말로 시인의 삶의 세목들이며, 넓게 보면 시인 자신의 존재와 환유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분신 같은 존재들이라는 깨달음 때문일 것이다. 시인이 특히 이 시집에서 ‘물고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고기’야말로 김명인 시인의 상상력의 두 가지 축인 ‘바다’와 ‘길’의 심상을 하나로 아우르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평선에 걸터앉은 낚시꾼들이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를 끌어올리고 있다
어느새 눈높이까지 꼬리를 치렁대면서
흥건하게 퍼덕거림을 쏟아놓는 저 물고기
찢긴 아가미 사이로 피도 조금 내비치고 있다
심해는 어떤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다는데
어떻게 잡혔을까 발광의 몸 둥글게 말아
천 길 캄캄한 무덤 사이로
고요히 헤엄쳐 다녔을 저 물고기
수압을 견딘 衲衣를 벗고
한번도 들어 올려보지 못한 듯 천근 공기를 밀치고 있다
―「심해 물고기」부분
바다가 너무 넓어서
한 칸 낚싯대로 건져 올릴 물고기 아예 없으리라
줄을 드리우자 이내 전해져온 이 어신은
저도 외톨이인 바다 속 나그네가
물 밖 외로움 먼저 알아차리고
미끼 덥석 물어준 것일까
낚싯대 쳐들자 찌를 통해 주고받았던 手談
툭 끊어져버리고
미늘에 걸려온 것은 외가닥 수평선이다
―「외로움이 미끼」부분
김명인의 시에 있어서 ‘꽃’의 심상이 이 땅의 ‘色’ 즉 욕망과 관련되면서 황홀함의 색조를 띠고 있다면 ‘물고기’의 심상은 고독이나 외로움의 정조에 가까이 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 인용 시「심해 물고기」는 아침 바다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광경을 수평선에 걸터앉은 낚시꾼들이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 올리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 시에서 ‘심해 물고기’는 “발광의 몸 둥글게 말아/천 길 캄캄한 무덤 사이로/고요히 헤엄쳐 다녔을 저 물고기”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심해 물고기가 극도의 중압과 캄캄한 어둠을 스스로의 몸빛으로 견디며 살아온 고독한 물고기임을 말해준다. 여기서 ‘심해 물고기’는 태양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시인 자신을 포함한 고독한 인간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물고기는 낚시 바늘을 물고 물 위로 올려지는 순간이 즉 죽음의 순간이지만, 여기서의 ‘심해 물고기’는 심해의 어둠을 뚫고 드넓은 하늘로 올려진다는 점에서 죽음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된다. 실제로 여기서 인용되지 않은 이 시의 마지막을 보면 심해 물고기가 千尋을 하늘로 끌어올리는 것은 하늘 깊이에 ‘서슬 푸른 비늘 한 장’을 꽂아두기 위해서 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서슬 푸른 비늘 한 장’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시인의 무의식의 심연에서 끌어올린 시 같은 것일 것이다.
두 번째 인용 시「외로움이 미끼」역시 평범함을 거부하는 김명인 시인의 번득이는 상상력이 나타나 있다. 이 시를 읽어보면 물고기가 낚시에 잡히는 것은 낚시꾼이 물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낚시꾼의 외로움을 간파한 물고기가 미끼를 일부러 덥석 물어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전도된 상상력은 “바다가 너무 넓어서/한 칸 낚싯대로 건져 올릴 물고기 아예 없으리라”는 이 시의 첫 구절에 이미 암시 되어 있다. 여기서 바다가 넓다는 것은 외롭다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이고, 한 칸 낚싯대가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의 시에서 낚시꾼이 끌어올린 심해 물고기가 시를 상징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시 역시 낚시꾼이 외로움의 물고기를 낚는 것은 시인이 내면의 바다에서 시를 건져 올리는 행위에 비견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이 “한 칸 낚싯대로 건져 올릴 물고기 아예 없으리라”고 한 것은 시인이 시를 낚는 것이 시인의 능력보다는 ‘외로움’이라는 미끼 덕분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두 시에서 공통적인 것은 물고기가 바다 속에서 수평으로 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하늘로 수직이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물고기의 길이 수평적이라는 통념을 깨는 것으로 그 이면에는 하늘로 상징되는 ‘초월’에의 정서가 녹아있다. 물고기가 하늘로 오르는 일이야 말로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초월을 이루는 것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명인 시인이 추구 하는 ‘바다’와 ‘길’의 접점에 ‘물고기’의 이미지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생각과 느낌> 2005년 가을호
김명인 시를 관통하고 있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바다’와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다는 물론 김명인의 뼈아픈 유년체험의 상징적 대상으로 그의 초기 시에서부터 후기 시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고. 길은 그가 고향을 떠나와서 겪게 되는 방황과 모색의 표징물로서 김명인 시인의 삶의 노정을 상징하는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여러 평자들에 의해서 지적 된 바 있듯이 김명인의 시에서 바다 이미지는 그의 유년체험과 맞물리면서 그의 시 전체를 관통하는 근원적 심상으로 간주되어져 왔다. 출렁거리면서도 어딘가로 끊임없이 들고 나는 행위를 반복하는 바다는 김명인에게 있어서 영원한 그리움이면서도 결국은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유년의 고향체험을 간직하고 있는 복합적 의미를 지닌 심상인 것이다.
김명인 시에서의 길 이미지는 ‘떠남’이라는 명제와 맞물려 있는데, 이는 그에게 지독한 고통과 환멸을 안겨준 유년체험의 아픔이 가져다준 방황과 모색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바다’로 상징되는 그의 유년 체험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물인 셈이다. 원래 길 이미지는 ‘떠남’과 ‘돌아옴’이라는 두 가지 명제와 관계되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김명인의 시에서는 ‘돌아옴’보다는 주로 ‘떠남’에 비중이 실려있다. ‘떠남’에 대한 단초가 보이는 것은 물론 그의 첫 시집인 『동두천』(1979)이다. 이 시집에는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아버지와 아버지 대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서 자식을 돌볼 수 없었던 어머니, 이런 척박한 가정환경 속에서 본의 아니게 고아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시인 자신의 ‘더러운 그리움’으로 가득했던 유년체험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따라서 그의 고향에 대한 기억은 아름다움이나 그리움보다는, 어딘가 벗어나야 할 숨 막히는 ‘아우시비쯔’와 같은 곳으로 인식된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어딘가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탈출에의 상상과 자신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동두천 1」).
김명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던 ‘떠남’에 대한 갈망이 ‘길’의 이미지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그의 세 번째 시집인 『물건너는 사람』(1992)부터이다. 그는 이 시집에서 인간의 노동과 바다가 만나는 ‘소금바다’에 천착하기도 하고(「소금바다로 가다」), 쉽게 버릴 수 도, 그렇다고 쉽게 외면해 버릴 수도 없는 그의 내면의 영원한 상처로 남아있는 가족사적 체험을 ‘유적’이라는 모티브를 통해서 현재화 시켜서 바라보기도 한다(「유적에 오르다」,「유적을 향하여」「유적을 위하여」). 이러한 그의 노력은 그의 ‘떠남’이 단순히 고향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눈물겨운 성찰에 바탕을 둔 필연적인 떠남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이 시집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소금’의 이미지는 ‘바다’와 ‘인간’을 동시에 포섭하는 이미지라는 점에서 김명인 시인이 추구하는 시 세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의 시에 나오는 ‘소금’이미지는 ‘모래’나 ‘파도’ 이미지와 함께 넓게 보면 ‘바다’의 이미지에 포섭된다는 점에서, ‘바다’라는 근원적 이미지의 환유적 상관물들인 셈이다. 특히 여기서 ‘소금’ 이미지는 남진우의 지적대로 물과 모래의 종합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물이 시인의 유년 체험의 근원인 ‘바다’와 상관이 있고 개인적인 가족사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면, 모래는 사막과도 같은 세상으로 상징되는 현대 문명의 제유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이 개인적이며 근원적인 ‘물’의 세계를 떠나 도달하고 싶어 하는 곳은 보다 넓은 세상이지만, 그 세상도 결국 사막과 같은 곳이기 때문에 오래 머물 수 없는 곳이다. 이러한 개인과 세계의 구조적인 갈등은 시인으로 하여금 끝없는 탐색의 길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게 만들기도 하고, 반면에 영원히 바다를 떠날 수 없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이기도 하다.
그의 네 번째 시집인『푸른 강아지와 놀다』(1994)는『물건너는 사람』에 이어 ‘길’에 대한 탐색을 가장 본격적으로 보여준 시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서, 그가 고향이 ‘후포’에서 ‘동두천’으로, ‘유타’로, ‘연해주’로 쉴 새 없이 달려온 길의 행로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뒤돌아보기도 하고, 영문도 모르는 길을 가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하늘’과 그 길의 끝에 있을 ‘블랙홀’을 가늠해 보기도 한다. 시인이 길을 통해서 줄기차게 탐색해 온 것은 결국 삶과 죽음으로 요약되는 시간에 관한 인식이다. 시인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반추해 보면서 자신이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운명과 그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허망함 사이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 운명을 견디는 법을 깨닫게 된다.
하늘에 솜자루 풀어놓고
안산 가까이 날아가다 되돌아보는 구름
몰고 가는 짐승들 발걸음이 풍선처럼 가벼워
인간이 닿지 않는 저 육전 거리까지 끌려가보자
일행은 팔리러 가는 길인 줄도 잊어버린 채
한 구름의 무심한 인도를 즐겁게 따라 걷는다
영문 모른 채 새옷 입고
어머닐 쫓아나섰던 그 때 그 고아원 길
빌려온 책을 코앞에 펼쳐놓아도
텅 빈 마음이 까마득한 사다리를 타고 흔들리는 하오,
읽던 글귀도 바람이 다
들고 가버렸다, 우리가 모르는 블랙 홀이
산너머 더 먼 하늘 거기에도 있다는 것이다
―「하늘 길」전문
시인은 빌려온 책을 보다가 우연히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게 된다. 하늘에는 구름이 짐승들을 몰고 육전의 시장거리로 팔러가는 듯한 광경이 보이고, 그러한 풍경은 시인이 어린 시절 영문도 모르고 어머니를 따라나섰다가 혹독한 배고픔과 변두리의 삶을 체험해야 했던 송천동 고아원 가는 길을 되살려 낸다. 시인의 이러한 뼈아픈 체험은 세월이 많이 지난 현재에도 시인의 가슴 속에 ‘블랙 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시인이 여기서 말하는 ‘블랙 홀’은 시인의 내면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인 근원적 어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둠은 본질적으로 죽음 쪽에 가 있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김명인의 ‘블랙홀’은 단순히 죽음을 지향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시인의 의지가 엿보인다. 시인은 ‘블랙홀’의 대척점에 생명의 상징인 ‘꽃’의 심상을 예비해 둔다. ‘꽃’의 심상이야 말로 죽음을 단순히 시간의 끝으로 인도하지 않고 축제로 만들어주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2. 바다와 하늘을 잇는 생명의 끈-꽃
인간은 어머니의 물(양수)에서 와서 지하의 물로 돌아간다. 이 땅에 물이 남겨 놓는 것은 하찮은 재나 티끌뿐이다. 시인은 길을 통한 시간의 탐색의 끝에서 죽음과 만난다. 어쩌면 죽음이야 말로 시인이 걸어온 길의 마지막 화두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생명의 탄생을 바다를 통해서 인식하듯이 죽음 역시 바다를 통해서 바라본다. 시인은 죽음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축제임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에게 장례말고 더 큰 축제가
일찍이 있었던가
녹아서 짓밟히고 버려져서
낮은 곳으로 모이는 억만 년도 더 된 소금들,
누구나 바닷물이 소금으로 떠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죽음은 연두빛 흐린 물결로 네 몸 속에서도 출렁거리고 있다
�지 않는다면, 슬픔의 방부제 다하지 않는다면
소금 위에 반짝이는 저 노을 보아라
―「바닷가의 장례」부분
위의 시에서 시인이 장례를 하나의 축제로 보는 것은 “녹아서 짓밟히고 버려져서/낮은 곳으로 모이는 억만 년도 더 된 소금들”이 단순히 일시적으로 왔다가 사라지는 죽음의 부산물이 아니라 썩지 않는 방부제로서의 삶의 영원성에 닿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금 위에 반짝이는 저 노을”은 그런 의미에서 생명의 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금이 바다의 꽃이라면, 노을은 하늘의 꽃이다. 꽃은 죽음을 죽음으로 놓아두지 않고 다시 생명에게로 이어 놓는다. 바다 속에 떠다니는 소금도 언젠가는 돌고 돌아서 다시 인간의 몸에 생명의 자양분으로 복귀하게 마련이다. 태양이 물에서 나와서 물로 사라지지만, 그것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금이야 말로 죽음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꽃인 셈이다.
내가 이 물가에서 그대 만났으니
축생을 쌓던 모래 다 허물어 이 시계 밖으로
이제 그대 돌려보낸다
바닷가 황혼녘에 지펴지는 다비식의
장엄함이란, 수평을 둥글게 껴안고 넘어가는
꽃수레에서 수만 꽃송이들이 한번 활짝 피었다 진다
몰래몰래 스며와 하루치의 햇빛으로 가득차던
경계 이쪽이 수평 저편으로 갑자기 무너져 내릴 때,
채색세상 이미 뿌옇게 지워져 있거나
끝없는 영원 열려다 다시 주저앉는다
내 사랑, 그때 그대도 한 줌 재로 사함받고
나지막한 연기 높이로만 흩어지는 것이라면
이제, 사라짐의 모든 형용으로 헛된
불멸 가르리라
그대가 나였던가, 바닷가에서는
비로소 노을이 밝혀드는 황홀한 축제 한창이다
―「다시 바닷가의 장례」전문
앞의 시「바닷가의 장례」가 실제로 바닷가의 장례를 소재로 삼고 있다면, 이 시는 저녁에 바닷가에서 장엄하게 해가 지는 모습을 ‘바닷가의 장례’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바닷가에서 해가 지는 저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죽음을 통해서 이 땅의 모든 헛된 것들의 본질을 똑바로 바라보려는 시인의 시선은 동일하다. 시인은 이 시에서 바닷가 일몰의 장엄한 광경을 “수평을 둥글게 껴안고 넘어가는/꽃수레에서 수만 꽃송이들이 한번 활짝 피었다 진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해가 질 때 하늘을 붉게 수놓는 노을과 출렁이는 바닷물에 비친 반짝이는 노을빛을 묘사한 것으로, 시인이 노을을 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시인은 해가 소멸하는 일몰의 광경을 바라보면서 죽음의 섬뜩함이나 어둠을 생각하지 않고, 거기서 오히려 황홀한 꽃을 본다. 이 시를 보면 삶과 죽음, 밝음과 어둠, 사라짐과 영원의 사이에 ‘꽃’이 놓여있다. 꽃이야 말로 삶과 죽음을 새롭게 여는 문이고 이승과 저승의 틈을 아름답게 수놓는 ‘경계’의 꽃이다. 그런 의미에서 ‘꽃’ 이미지는 김명인의 시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꽃’ 이미지는 그의 여러 시집에서 드물지 않게 보이는 중요한 심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필자가 이 글에서 주요 텍스트로 삼고자 하는 그의 여덟 번째 시집『파문』(2005)에도 시집의 첫머리에 꽃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절벽 위 돌무더기가 만든 작은 틈새
스치듯 꽃뱀 한 마리 지나갔다
현기증 나는 벼랑 등지고 엉거주춤 서서
가파른 몸이 차오르던 통로와 우연히 마주친 것인데
그 때 내가 본 것은 화사한 꽃무늬뿐이었을까
바닥없는 적요 속으로 피어올랐던 꽃뱀의 시간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제 사족을 지워버렸다
아직도 한순간을 지탱하는 잔상이라면
연필 한 자루로 이어놓으려던 파문 빨리 거둬들이자
잘린 무늬들 그 허술한 기억 속에는
아무리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
말의 블랙홀이 있다 마주친 순간에는 꽃잎이던
허기진 낙화의 심상이여!
꽃뱀 스쳐간 절벽 위 캄캄한 구멍은
하늘의 별자리처럼 아뜩해서
내려가도 내려가도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
끝내 지워버리지 못하는 두려운 시간만이
허물처럼 뿌옇게 비껴 있다
―「꽃뱀」전문
시집『파문』을 읽어보면 꽃을 소재로 하고 있는 시들이 여럿 보인다. 대충 열거해보아도「꽃을 위한 노트」,「배꽃 江」,「봄산」,「消燈」, 「울타리」,「길」,「복날」,「봄꽃나무」,「식목」,「석류」등이 「꽃뱀」과 더불어 시 속에 꽃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김명인의 시에서의 꽃 이미지는 이 시집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비중이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 필자에게는 새로운 변화로 감지된다. 인용 시 「꽃뱀」은 직접 꽃을 소재로 한 것은 아니지만 꽃이 변용된 이미지가 ‘꽃뱀’이라는 점에서 꽃 이미지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앞에서 살펴 본 ‘바닷가의 장례’ 시리즈에서 꽃은 ‘바다’이미지와 관계되어 있다면, 「꽃뱀」에서는 그것이 ‘길’의 이미지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 다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절벽 위를 타고 오르는 꽃뱀과 마주친 경험을 ‘꽃’과 ‘길’의 이미지와 연결시켜서 ‘꽃뱀의 시간’으로 요약되는 인간 욕망의 덧없음과 허위성을 전경화 시키고 있다. 꽃뱀의 “가파른 몸이 차오르던 통로”와 “꽃뱀 스쳐간 절벽 위 캄캄한 구멍”은 그것 자체가 길이면서 동시에 욕망의 흔적이다. 시인은 꽃뱀이 더듬어 왔던 욕망의 흔적을 “바닥없는 적요”나 “캄캄한 구멍”으로 표현함으로써 길의 욕망이 거느리고 있는 허위성을 지적하고 있다. 시인에 의하면 꽃뱀은 한순간에만 꽃이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낙화일 뿐이고, 결국 꽃뱀이 벗어놓은 허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시에서 흥미로운 것은 물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절벽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물의 이미지가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파문’이 그것인데, ‘파문’은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심상이다. 시인이 ‘파문’에 주목하는 것은 ‘파문’이야 말로 “근원이었던 싱그러움”으로부터 번져 나간 것이며(「순결에 대하여」-『길의 침묵』 소재), “새겼다가 지우며 경계마저 허무는” “나를 흔드는 방식”(「종이배」-『길의 침묵』 소재)이기 때문이다. 즉 시인에게 있어서 ‘파문’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더듬어가는 방식이고 세상의 온갖 허울뿐인 삶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가장 지혜로운 소멸의 방식인 것이다. 인용 시에서의 ‘파문’ 역시 “잘린 무늬들 그 허술한 기억 속에는/아무리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말의 블랙홀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표인 셈이다. 그런데 ‘파문’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형상이 ‘물의 꽃’과 같다는 점에서 꽃의 심상과 연결된다. 존재의 심연에 블랙홀을 숨기고 있는 꽃인 ‘파문’이야 말로 시인이 탐구하고 싶어 하는 궁극적인 대상의 하나인 것이다.
3. 바다와 길의 만남-물고기
다음으로 ‘꽃’의 심상과 더불어서 시집『파문』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심상은 ‘물고기’이다. 김명인의 이번 시집을 보면 ‘꽃’과 같은 식물 이미지와 ‘물고기’나 ‘뱀’과 같은 동물 이미지가 혼재해 있다. 그리고 또 눈에 띄는 것은「배꽃」,「얼음 물고기」,「우물」,「신발」,「빨래」,「마늘」, 「모과」라는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시 대부분이 구체적인 대상을 시적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이 이처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에 천착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일상이야 말로 시인의 삶의 세목들이며, 넓게 보면 시인 자신의 존재와 환유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분신 같은 존재들이라는 깨달음 때문일 것이다. 시인이 특히 이 시집에서 ‘물고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고기’야말로 김명인 시인의 상상력의 두 가지 축인 ‘바다’와 ‘길’의 심상을 하나로 아우르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평선에 걸터앉은 낚시꾼들이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를 끌어올리고 있다
어느새 눈높이까지 꼬리를 치렁대면서
흥건하게 퍼덕거림을 쏟아놓는 저 물고기
찢긴 아가미 사이로 피도 조금 내비치고 있다
심해는 어떤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다는데
어떻게 잡혔을까 발광의 몸 둥글게 말아
천 길 캄캄한 무덤 사이로
고요히 헤엄쳐 다녔을 저 물고기
수압을 견딘 衲衣를 벗고
한번도 들어 올려보지 못한 듯 천근 공기를 밀치고 있다
―「심해 물고기」부분
바다가 너무 넓어서
한 칸 낚싯대로 건져 올릴 물고기 아예 없으리라
줄을 드리우자 이내 전해져온 이 어신은
저도 외톨이인 바다 속 나그네가
물 밖 외로움 먼저 알아차리고
미끼 덥석 물어준 것일까
낚싯대 쳐들자 찌를 통해 주고받았던 手談
툭 끊어져버리고
미늘에 걸려온 것은 외가닥 수평선이다
―「외로움이 미끼」부분
김명인의 시에 있어서 ‘꽃’의 심상이 이 땅의 ‘色’ 즉 욕망과 관련되면서 황홀함의 색조를 띠고 있다면 ‘물고기’의 심상은 고독이나 외로움의 정조에 가까이 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 인용 시「심해 물고기」는 아침 바다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광경을 수평선에 걸터앉은 낚시꾼들이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 올리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 시에서 ‘심해 물고기’는 “발광의 몸 둥글게 말아/천 길 캄캄한 무덤 사이로/고요히 헤엄쳐 다녔을 저 물고기”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심해 물고기가 극도의 중압과 캄캄한 어둠을 스스로의 몸빛으로 견디며 살아온 고독한 물고기임을 말해준다. 여기서 ‘심해 물고기’는 태양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시인 자신을 포함한 고독한 인간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물고기는 낚시 바늘을 물고 물 위로 올려지는 순간이 즉 죽음의 순간이지만, 여기서의 ‘심해 물고기’는 심해의 어둠을 뚫고 드넓은 하늘로 올려진다는 점에서 죽음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된다. 실제로 여기서 인용되지 않은 이 시의 마지막을 보면 심해 물고기가 千尋을 하늘로 끌어올리는 것은 하늘 깊이에 ‘서슬 푸른 비늘 한 장’을 꽂아두기 위해서 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서슬 푸른 비늘 한 장’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시인의 무의식의 심연에서 끌어올린 시 같은 것일 것이다.
두 번째 인용 시「외로움이 미끼」역시 평범함을 거부하는 김명인 시인의 번득이는 상상력이 나타나 있다. 이 시를 읽어보면 물고기가 낚시에 잡히는 것은 낚시꾼이 물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낚시꾼의 외로움을 간파한 물고기가 미끼를 일부러 덥석 물어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전도된 상상력은 “바다가 너무 넓어서/한 칸 낚싯대로 건져 올릴 물고기 아예 없으리라”는 이 시의 첫 구절에 이미 암시 되어 있다. 여기서 바다가 넓다는 것은 외롭다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이고, 한 칸 낚싯대가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의 시에서 낚시꾼이 끌어올린 심해 물고기가 시를 상징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시 역시 낚시꾼이 외로움의 물고기를 낚는 것은 시인이 내면의 바다에서 시를 건져 올리는 행위에 비견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이 “한 칸 낚싯대로 건져 올릴 물고기 아예 없으리라”고 한 것은 시인이 시를 낚는 것이 시인의 능력보다는 ‘외로움’이라는 미끼 덕분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두 시에서 공통적인 것은 물고기가 바다 속에서 수평으로 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하늘로 수직이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물고기의 길이 수평적이라는 통념을 깨는 것으로 그 이면에는 하늘로 상징되는 ‘초월’에의 정서가 녹아있다. 물고기가 하늘로 오르는 일이야 말로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초월을 이루는 것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명인 시인이 추구 하는 ‘바다’와 ‘길’의 접점에 ‘물고기’의 이미지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생각과 느낌> 2005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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