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혜 시를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동침]부터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여름, 햇볕에 바싹 달군 홑이불을 덮었다. 태양의 맨살이 나를 받아 안는다. 달큰한 살내음, 태양의 흑점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간다. 계란 노른자위처럼 말랑한 그곳으로 기분 좋게 눈을 감으며 내 알몸을 맡긴다. 풀먹인 햇살이 까칠까칠 가슴께를 더듬는다. 봉싯 솟아오른 봉우리. 서서히 온몸이 달아오른다. 감이 부풀고, 대추 열매가 부풀고, 사과가....머지않아 나의 정원엔 태양을 닮은 자식들 쑥쑥 쏟아져 나오겠지? 두둥실 떠오르는 한낮.
-동침 전문
이 시를 처음 대하면 [동침]이라는 제목이 엉뚱하게 느껴진다. 이 시는 햇볕에 달군 홑이불과 "내"알몸의 접촉으로부터 출발한다. 홑이불을 달군 햇볕은 '나"를 태양의 흑점 한가운데로 끌고 가고, "계란 노른자위처럼 말랑한 그곳은 시를 정적 상상의 세계로 비약시킨다. 까칠까칠 가슴께를 더듬는 풀먹인 햇살은 더이상 햇살만은 아니다." 봉싯 솟아오른 봉우리.서서히 온몸이 달아오른다.감이 부풀고, 대추열매가 부풀고 사과가...."에서 햇살의 이미지만을 떠올리는 순진한 독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쯤에서 시의 제목이 [동침]이 된 점 깨달아진다. 실제로 이 시의 주제는 홑이불을 달군 햇볕이나, 두둥실 떠오르는 한낮이 아니라 동침이다. 어쩌면 모티브도 햇볕에 달군 홑이불과의 접촉이 아니라 동침일 가능성이 있다. 말하자면 실제적인 동침에서 거꾸로 홑이불을 달군 햇볕을 이끌어냈다는 얘기다. 이 시의 재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가령 이 시가 단순히 홑이불을 달군 햇살의 맑고 깨끗한 맛을 기리기 위하여 쓰여졌고 후반의 성적 상상도 그것을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밋밋하고 상식적인 시가 되고 말았겠는가. 동물적 이미지의 성행위를 식물적 이미지로 환치시켜 놓은 점도 이 시를 읽는 재미를 배가 시킨다. "풀먹인 햇살" 같은 감각적표현도 주목을 요한다. 짝해 읽을 또한 편의 시를 보자.
간통, 유죄 선고를 받고
숨을 훅 들이키니
누군가 손목울 잡아끌었다
내 입술에서 루즈를지우고
장신구를 하나씩 떼어냈다
새우처럼 등을 구부려 척추 한가운데
바늘을 꽂고는 내게 명령했다
-발가락을 움직여 봐
혈관 속으로 에테르의 방울이 흘러 들어가고
흰 벽이, 천장이 빙글 돌더니
차가운 공기가
홑이불을 들치고 나를 꺼냈다
개구리를 들고 있었다
아니 개구리가 내 손가락을 물고 잇었다
배를 가르고 오물오물
팔딱이는 숨골을 바늘 끝으로 톡톡 찔러댔다
버둥거리던 개구리 다리가
축 늘어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새구리도 눈을 감고 있었다
혈관 속을 흐르는 수액의 수런거림에 눈을 떴다
그리고 그들은 물러났다
주홍글씨를 남기고.
-[주홍글씨] 전문
[주홍글씨]는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 제목으로 불륜의 상징이다. 이와 간련하여 이 시를 불륜의 결과로 생겨난 씨앗을 제거하는 과정과 그 아픔을 형상화한 시로 읽는 독법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다. 그 과정을 "흰 벽이 천장이 빙글 돌더니/차가운 공기가 /홑이불을 들치고 나르 ㄹ꺼냈다/개구리를 들고 있었다/아니. 개구리가 내 손가락을 물고 있었다."라고 하드보일드체로 비유적으로 표현한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에는 불륜의 알레고리 속에 포착한 일그러진 현대문명이 있다. 자연의 섭리에 거스르는 현대문명에서 불륜의 알레고리 속에 포착한 일그러진 현대문명이 있다. 자연의 섭리에 거스르는 현대문명에서 불륜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 모티프였을 것이라 유추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 시는 행간을 가지고 성적 상상력을 자극한 요소가 없지 않다. 그 점을 놓쳐서는 재미있게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생텍쥐베리의 소설 제목을 차용한 [어린 왕자]도 김주혜 시를 읽는 재미를 맛보게 해준다.
바람은 그림쟁이다. 투명한 그림쟁이다. 보려고 할수록 꽁꽁 숨어 버리는 그의 그림은 눈을 감으면 확실해진다. 바람이 가리키는 대로 나무는 이파리가 되고 꽃은 나비가 된다. 하늘로 올라가면 사자가 되고 물 속에 가라앉으면 독수리 다리를 가진 물고기가 된다. 이것저것 섞어놓고 희희낙락 즐기는 바람의 그림을 보면 서늘해진다. 으스스해진다.
오늘 아침, 바람은 나를 그리겠다고 했다. 옷을 챙겨 입은 나를 그리면서 그는 가슴속의 뼈를 그리고 있었다. 뼈 속의 간, 허파, 그리고 심장을 그리려고 할 때 나는 서둘러 바람 앞을 도망쳤다.
바람은 내 안에 숨겨 둔 그 사내를 그리려 했을까?
-[어린왕자] 전문
나무를 흔들리는 이파리로, 꽃을 날아다니는 나비로 만들고, 하늘에서는 사자, 물속에서는 독수리가 되는 바람, 자못 동화적인 발상이다. 옷을 챙겨입은 "나"를 그리면서는 뼈를 그리고 뼈속의 간과 허파와 심장을 그리려 했다는 대목도 재미있다. 이 시의 절창은 그 다음이다. 그때 나는 서둘러 바람 앞을 도망치는데 그 까닭을 '나'는 자문한다. "바람은 내 안에 숨겨둔 그 사내를 그리려 했을까?" 라고. 이 반어는 단숨에 시의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결국"바람"은 자연의 그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고 인문적 "바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시는 理性만을 가지고 살 수도, 이성으로 제어될 수도 없는 사람살이의 편린을 보여주면서, 사람이란 바람이 그리는 대로 이파리가 되기도 하고 나비가 되기도 하고 사자가 되기도 하고 독수리가 되기도 하는것이 아닌가? 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나의 시인은 유리벽 안에 살고 있어. 뼛속까지 보이는 그곳에서 물레를 돌려 물방울을 잣고 있어. 투명한 물방울 틈에서 물고기들도 내장을 드러내며 살고 있어. 노골적인 말이지만 나도 수술한 인공 유방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그렇지만 그럴 수가 없어. 볼륨 있는 내 유방이지만 유리고기처럼 뼈를 내보일 자신은 없어. 나를 거쳐간 수많은 남자들의 손자국이 드러날까 저어되기 때문이야. 나는 기다리겠어. 나의 시인이 유리벽 밖으로 나올 때를. 그래서 색색의 무늬로 얼룩진 나의 가슴을 그가 키운 물방울들로 투명하고 원초적인 모습으로 빚어주기를.
-유리 고기 전문
이 시는 내장을 드러낸 채 살고 있는 유리고기와 함께 유리벽 안에서 살고 있는 '나의 시인', 인공유방을 드러내보이고 싶지만 거쳐건 수많은 남자들의 손자국이 드러날까 두려워 그리지 못하는 '나' 그리고 유리벽 안의 시인이 나와서 얼룩진 '나'의 가슴을 "그가 키운 물방울둘로 투명하고 원초적인 모습으로 빚어주기를' 기다린다는 바램의 세 이미지가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상과 현실의 대립 이상이 현실의 모순을 순화시켜 주기를 바라는 마은 등은 어쩌면 흔한 내용으로 사실 이 시의 주제는 진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신선하고 활기차다. 만약 '나를 거쳐간 수많은 남자들의 손자국이 드러날까 저어되기 때문이다' 라는 성적 상상력을 유발하는 다소 노골적인 표현이 없었어도 신선하고 활기찼을까?
2
이 시집에는 [아버지별] 연작시들로서 [산철쭉][사슴풍뎅이][굴뚝새][생인손] 등 가적사를 다루고 있는 시들이 여러 편이다. 그의 시 가운데서 반드시 우수한 쪽에 들어간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애틋했던 데 따른 듯 [아버지별]에 감동적인 시편이 많다.
내가 당신의 옷자락을 놓을라치면
당신이시여,
내 손 잡아주소서
그 손 마다하오면
내 손목 움켜잡으소서
그것마저 뿌리치면
내 겨드랑이 껴안으소서
그래도 앙탈을 부리거든
당신이시여,
내 몸 전체를 포옹하소서
나, 당신의 목 끌어안고 볼 부비오리다.
주여!
-[아버지별. 2 기도]
여기서 아버지와 주는 동격이다. 이 시는 작중화자가 일상에 묻혀 아버지(또는 주)를 떠나려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아버지를 떠난 삶이 값있는 삶이 아님을 아는 작중화자는 그것이 안타까워 견딜 수 없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또 이전의 이와 같은 정서의 시와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도 이 시가 호소력을 가지는 것은 이러한 갈등이 그의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를 포함 그의 가족시들은 지나치게 보편적인 정서만을 담고 있다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나 할머니는 자식을 위해 무조건 헌신적이고 잘났으나 못났으나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라는 이 고전적인 가족상은 조금은 식상한 면도 없지 않은데, 김주혜 시들도 그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컨데 아버지별이 되돌아올 수 있다면'그 돌밑에 얼굴을 묻고/눈뜨고/굳은 입 열리는/ 한 움큼의 신선한 물이 되고 싶다([아버지별.1])"의 깊은 사랑이나 아버지를 송림 속에 홀로 두고 떠날 때는 '산메뚜기는 코가 메어/푸들푸들 발목을 잡더구나(아버지별.7-일기)라는 아픔에도 불구하고 시로서 빛나는 대목은 많지 못하다. 오히려 요절한 오래비와의 갈등을 통해 자신으 모습을 조금 드러낸 [아버지별.15-사슴풍뎅이} 같은 시가 더 빛난다.
광릉 숲 속에서 사슴풍뎅이를 보았다. 투명한 밤색 뿔이 마치 뱃머리처럼 휘어졌고, 찌르찌륵 짝짓기를 하다 뿔을 들어 허공을 바라보는 그 눈이 오래비를 닮아 있었다. 불쌍한 오래비. 물대접에 젓가락을 담고 노 젓는 시늉을 즐겨 했다던 신동 오래비를 잃고, 어머니는 나팔꽃처럼 오므라들었다. 아궁이의 불꽃은 시야를 어지럽혔다. 잊어버리세요, 어머니. 오래비 잡아먹고 너는 뭐 될래? 나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난다. 기집애 동생만 여덟이나 보다니. 어머니의 눈에는 먼지와 나무가루가 소용돌이친다. 나 때문에 대가 끊긴 우리 집의 짐을 벗기 위해서 나는 평생을 어머니 어깨 위의 어둠을 걷어내야만 했다. 찌르찌륵 사슴풍뎅이는 짝짓기를 끝내고 붕붕 어디론가 사라져가고 있다. 나팔꽃이 활짝 피어 있는 새벽에.
-[아버지별.15 사슴풍뎅이] 전문
이 시에는 혓모션이 없다. 애정의 과장이 없고 눈물이 조작이 없다. 대신 죽은 오래비에 대한 연민이 있고, 인습에 짓눌린 연약한 인간의 초상이 있다. 사슴충뎅이의 눈에서 오래비의 눈을 떠올리고 이어 어머니와 자신의 갈등하는 모습으로 전개하는 과정도 실감을 다한다. 삼촌을 다룬 [산철쭉], 할머니를 소재로 한 [굴뚝새] 역시 할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노래한 [생인손]도 다른 시인들의 비슷한시와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별.4-목각인형]은 그 특별한 소재 탓인지 장황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재미았게 읽힌다. 그의 가족시는 이런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여름, 햇볕에 바싹 달군 홑이불을 덮었다. 태양의 맨살이 나를 받아 안는다. 달큰한 살내음, 태양의 흑점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간다. 계란 노른자위처럼 말랑한 그곳으로 기분 좋게 눈을 감으며 내 알몸을 맡긴다. 풀먹인 햇살이 까칠까칠 가슴께를 더듬는다. 봉싯 솟아오른 봉우리. 서서히 온몸이 달아오른다. 감이 부풀고, 대추 열매가 부풀고, 사과가....머지않아 나의 정원엔 태양을 닮은 자식들 쑥쑥 쏟아져 나오겠지? 두둥실 떠오르는 한낮.
-동침 전문
이 시를 처음 대하면 [동침]이라는 제목이 엉뚱하게 느껴진다. 이 시는 햇볕에 달군 홑이불과 "내"알몸의 접촉으로부터 출발한다. 홑이불을 달군 햇볕은 '나"를 태양의 흑점 한가운데로 끌고 가고, "계란 노른자위처럼 말랑한 그곳은 시를 정적 상상의 세계로 비약시킨다. 까칠까칠 가슴께를 더듬는 풀먹인 햇살은 더이상 햇살만은 아니다." 봉싯 솟아오른 봉우리.서서히 온몸이 달아오른다.감이 부풀고, 대추열매가 부풀고 사과가...."에서 햇살의 이미지만을 떠올리는 순진한 독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쯤에서 시의 제목이 [동침]이 된 점 깨달아진다. 실제로 이 시의 주제는 홑이불을 달군 햇볕이나, 두둥실 떠오르는 한낮이 아니라 동침이다. 어쩌면 모티브도 햇볕에 달군 홑이불과의 접촉이 아니라 동침일 가능성이 있다. 말하자면 실제적인 동침에서 거꾸로 홑이불을 달군 햇볕을 이끌어냈다는 얘기다. 이 시의 재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가령 이 시가 단순히 홑이불을 달군 햇살의 맑고 깨끗한 맛을 기리기 위하여 쓰여졌고 후반의 성적 상상도 그것을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밋밋하고 상식적인 시가 되고 말았겠는가. 동물적 이미지의 성행위를 식물적 이미지로 환치시켜 놓은 점도 이 시를 읽는 재미를 배가 시킨다. "풀먹인 햇살" 같은 감각적표현도 주목을 요한다. 짝해 읽을 또한 편의 시를 보자.
간통, 유죄 선고를 받고
숨을 훅 들이키니
누군가 손목울 잡아끌었다
내 입술에서 루즈를지우고
장신구를 하나씩 떼어냈다
새우처럼 등을 구부려 척추 한가운데
바늘을 꽂고는 내게 명령했다
-발가락을 움직여 봐
혈관 속으로 에테르의 방울이 흘러 들어가고
흰 벽이, 천장이 빙글 돌더니
차가운 공기가
홑이불을 들치고 나를 꺼냈다
개구리를 들고 있었다
아니 개구리가 내 손가락을 물고 잇었다
배를 가르고 오물오물
팔딱이는 숨골을 바늘 끝으로 톡톡 찔러댔다
버둥거리던 개구리 다리가
축 늘어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새구리도 눈을 감고 있었다
혈관 속을 흐르는 수액의 수런거림에 눈을 떴다
그리고 그들은 물러났다
주홍글씨를 남기고.
-[주홍글씨] 전문
[주홍글씨]는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 제목으로 불륜의 상징이다. 이와 간련하여 이 시를 불륜의 결과로 생겨난 씨앗을 제거하는 과정과 그 아픔을 형상화한 시로 읽는 독법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다. 그 과정을 "흰 벽이 천장이 빙글 돌더니/차가운 공기가 /홑이불을 들치고 나르 ㄹ꺼냈다/개구리를 들고 있었다/아니. 개구리가 내 손가락을 물고 있었다."라고 하드보일드체로 비유적으로 표현한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에는 불륜의 알레고리 속에 포착한 일그러진 현대문명이 있다. 자연의 섭리에 거스르는 현대문명에서 불륜의 알레고리 속에 포착한 일그러진 현대문명이 있다. 자연의 섭리에 거스르는 현대문명에서 불륜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 모티프였을 것이라 유추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 시는 행간을 가지고 성적 상상력을 자극한 요소가 없지 않다. 그 점을 놓쳐서는 재미있게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생텍쥐베리의 소설 제목을 차용한 [어린 왕자]도 김주혜 시를 읽는 재미를 맛보게 해준다.
바람은 그림쟁이다. 투명한 그림쟁이다. 보려고 할수록 꽁꽁 숨어 버리는 그의 그림은 눈을 감으면 확실해진다. 바람이 가리키는 대로 나무는 이파리가 되고 꽃은 나비가 된다. 하늘로 올라가면 사자가 되고 물 속에 가라앉으면 독수리 다리를 가진 물고기가 된다. 이것저것 섞어놓고 희희낙락 즐기는 바람의 그림을 보면 서늘해진다. 으스스해진다.
오늘 아침, 바람은 나를 그리겠다고 했다. 옷을 챙겨 입은 나를 그리면서 그는 가슴속의 뼈를 그리고 있었다. 뼈 속의 간, 허파, 그리고 심장을 그리려고 할 때 나는 서둘러 바람 앞을 도망쳤다.
바람은 내 안에 숨겨 둔 그 사내를 그리려 했을까?
-[어린왕자] 전문
나무를 흔들리는 이파리로, 꽃을 날아다니는 나비로 만들고, 하늘에서는 사자, 물속에서는 독수리가 되는 바람, 자못 동화적인 발상이다. 옷을 챙겨입은 "나"를 그리면서는 뼈를 그리고 뼈속의 간과 허파와 심장을 그리려 했다는 대목도 재미있다. 이 시의 절창은 그 다음이다. 그때 나는 서둘러 바람 앞을 도망치는데 그 까닭을 '나'는 자문한다. "바람은 내 안에 숨겨둔 그 사내를 그리려 했을까?" 라고. 이 반어는 단숨에 시의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결국"바람"은 자연의 그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고 인문적 "바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시는 理性만을 가지고 살 수도, 이성으로 제어될 수도 없는 사람살이의 편린을 보여주면서, 사람이란 바람이 그리는 대로 이파리가 되기도 하고 나비가 되기도 하고 사자가 되기도 하고 독수리가 되기도 하는것이 아닌가? 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나의 시인은 유리벽 안에 살고 있어. 뼛속까지 보이는 그곳에서 물레를 돌려 물방울을 잣고 있어. 투명한 물방울 틈에서 물고기들도 내장을 드러내며 살고 있어. 노골적인 말이지만 나도 수술한 인공 유방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그렇지만 그럴 수가 없어. 볼륨 있는 내 유방이지만 유리고기처럼 뼈를 내보일 자신은 없어. 나를 거쳐간 수많은 남자들의 손자국이 드러날까 저어되기 때문이야. 나는 기다리겠어. 나의 시인이 유리벽 밖으로 나올 때를. 그래서 색색의 무늬로 얼룩진 나의 가슴을 그가 키운 물방울들로 투명하고 원초적인 모습으로 빚어주기를.
-유리 고기 전문
이 시는 내장을 드러낸 채 살고 있는 유리고기와 함께 유리벽 안에서 살고 있는 '나의 시인', 인공유방을 드러내보이고 싶지만 거쳐건 수많은 남자들의 손자국이 드러날까 두려워 그리지 못하는 '나' 그리고 유리벽 안의 시인이 나와서 얼룩진 '나'의 가슴을 "그가 키운 물방울둘로 투명하고 원초적인 모습으로 빚어주기를' 기다린다는 바램의 세 이미지가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상과 현실의 대립 이상이 현실의 모순을 순화시켜 주기를 바라는 마은 등은 어쩌면 흔한 내용으로 사실 이 시의 주제는 진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신선하고 활기차다. 만약 '나를 거쳐간 수많은 남자들의 손자국이 드러날까 저어되기 때문이다' 라는 성적 상상력을 유발하는 다소 노골적인 표현이 없었어도 신선하고 활기찼을까?
2
이 시집에는 [아버지별] 연작시들로서 [산철쭉][사슴풍뎅이][굴뚝새][생인손] 등 가적사를 다루고 있는 시들이 여러 편이다. 그의 시 가운데서 반드시 우수한 쪽에 들어간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애틋했던 데 따른 듯 [아버지별]에 감동적인 시편이 많다.
내가 당신의 옷자락을 놓을라치면
당신이시여,
내 손 잡아주소서
그 손 마다하오면
내 손목 움켜잡으소서
그것마저 뿌리치면
내 겨드랑이 껴안으소서
그래도 앙탈을 부리거든
당신이시여,
내 몸 전체를 포옹하소서
나, 당신의 목 끌어안고 볼 부비오리다.
주여!
-[아버지별. 2 기도]
여기서 아버지와 주는 동격이다. 이 시는 작중화자가 일상에 묻혀 아버지(또는 주)를 떠나려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아버지를 떠난 삶이 값있는 삶이 아님을 아는 작중화자는 그것이 안타까워 견딜 수 없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또 이전의 이와 같은 정서의 시와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도 이 시가 호소력을 가지는 것은 이러한 갈등이 그의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를 포함 그의 가족시들은 지나치게 보편적인 정서만을 담고 있다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나 할머니는 자식을 위해 무조건 헌신적이고 잘났으나 못났으나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라는 이 고전적인 가족상은 조금은 식상한 면도 없지 않은데, 김주혜 시들도 그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컨데 아버지별이 되돌아올 수 있다면'그 돌밑에 얼굴을 묻고/눈뜨고/굳은 입 열리는/ 한 움큼의 신선한 물이 되고 싶다([아버지별.1])"의 깊은 사랑이나 아버지를 송림 속에 홀로 두고 떠날 때는 '산메뚜기는 코가 메어/푸들푸들 발목을 잡더구나(아버지별.7-일기)라는 아픔에도 불구하고 시로서 빛나는 대목은 많지 못하다. 오히려 요절한 오래비와의 갈등을 통해 자신으 모습을 조금 드러낸 [아버지별.15-사슴풍뎅이} 같은 시가 더 빛난다.
광릉 숲 속에서 사슴풍뎅이를 보았다. 투명한 밤색 뿔이 마치 뱃머리처럼 휘어졌고, 찌르찌륵 짝짓기를 하다 뿔을 들어 허공을 바라보는 그 눈이 오래비를 닮아 있었다. 불쌍한 오래비. 물대접에 젓가락을 담고 노 젓는 시늉을 즐겨 했다던 신동 오래비를 잃고, 어머니는 나팔꽃처럼 오므라들었다. 아궁이의 불꽃은 시야를 어지럽혔다. 잊어버리세요, 어머니. 오래비 잡아먹고 너는 뭐 될래? 나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난다. 기집애 동생만 여덟이나 보다니. 어머니의 눈에는 먼지와 나무가루가 소용돌이친다. 나 때문에 대가 끊긴 우리 집의 짐을 벗기 위해서 나는 평생을 어머니 어깨 위의 어둠을 걷어내야만 했다. 찌르찌륵 사슴풍뎅이는 짝짓기를 끝내고 붕붕 어디론가 사라져가고 있다. 나팔꽃이 활짝 피어 있는 새벽에.
-[아버지별.15 사슴풍뎅이] 전문
이 시에는 혓모션이 없다. 애정의 과장이 없고 눈물이 조작이 없다. 대신 죽은 오래비에 대한 연민이 있고, 인습에 짓눌린 연약한 인간의 초상이 있다. 사슴충뎅이의 눈에서 오래비의 눈을 떠올리고 이어 어머니와 자신의 갈등하는 모습으로 전개하는 과정도 실감을 다한다. 삼촌을 다룬 [산철쭉], 할머니를 소재로 한 [굴뚝새] 역시 할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노래한 [생인손]도 다른 시인들의 비슷한시와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별.4-목각인형]은 그 특별한 소재 탓인지 장황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재미았게 읽힌다. 그의 가족시는 이런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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