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혜 시평

김주혜 시인- 시의 도반으로서 한 마디- 시인 성찬경(예술원 회원)

주혜1 2008. 7. 13. 08:50

시의 도반으로서 한 마디

 

성 찬 경 (시인, 예술원 회원)

 

 

김주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연꽃마을 유성우』에 서문을 쓰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김주혜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87년 경 덕수궁 안에 있던 문예 강좌의 자리에서였다. 당시 시 창작을 맡았던 나는 시를 지망하는 수강생 중 두세 사람이 눈에 띄기 시작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김주혜 시인이었다.

김주혜 시인은 그제나 지금이나 성격이 밝고 깔끔하다. 특히 내가 감탄한 것은 이 시인의 우리말 발음이 아주 정확하고 시를 읽는 억양이 무척 자연스러웠다는 점이다. 우리말 발음은 누구나가 다 잘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발음이 바르고 단정한 사람은 내가 생각할 때 열이면 하나 둘 될까 말까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김주혜 시인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는데, 이 시인의 시도 그 성격과 일치하는 그런 시였다. 곧 낱말 선택이 적확하고, 문장의 뜻이 분명하며 정서의 표현도 모자라고 지나침이 없어 명확하고 우아하여 좋은 시의 본보기와 같은 그런 시였다.

여기서 또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이 시인의 이름 ‘주혜’는 ‘주님의 은혜’를 그대로 줄인 것이라 한다. 얼마나 순수하고 천진한 발상인가.

시의 기본적인 자세와 개성이 일단 이와 같으면 그것으로써 시의 큰 길에 오른 것이나 다름이 없고, 다음은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시인으로서의 먼 길이 열리는 것이다.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김 시인은 꾸준한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 왔다. 김주혜 시인은 「시와 함께」의 동인으로서 박승미, 전영주, 고옥주, 이창화와 같은 시인들과 더불어 응분의 활동을 해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김주혜 시인과 나는 개인적인 교류가 차츰 멀어졌고, 김 시인은 다만 먼 곳으로 물러난 은은한 향기 정도의 추억으로만 남게 되었는데 이럴 무렵 세 번째 시집의 원고와 함께 다시 김주혜 시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김 시인의 시를 읽어보니, 이 시인이 원래 지니고 있던 시의 바탕과 개성은 그대로이면서, 거기에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삶의 음영이랄까, 어둠, 우수 같은 것이 곱게 배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제행이 무상하며 또한 아무도 삶의 파란을 피할 수 없는 인생이기는 하나 김주혜 시인도 심각한 비극을 겪은 듯, 시의 음조가 전에 비해 많이 가라앉아 있다. 허나 비극적 체험이 시인이나 예술가를 성숙으로 몰아간다는 현실적 조건을 감안할 때 우리는 그러한 비극에 대해서 무조건 아파하기만 해야 할 것인지, 착잡한 심정이되기도 한다.

어쨌건 오랜만에 보는 이 시인의 시는 인생의 비극이건 희극이건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받아들이려는, 냉철함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점은 삶을 대하는 자세의 여유로 보여진다. 이런 여유에서 시행의 운율적 리듬이 살아난다. 리듬을 타고 경쾌하게 읽어나가게 된다. 아이러니건 유머건 가벼운 터치로 처리되어 시의 여기저기에서 가끔 기웃거린다. 이런 기법적 요소들이 모두 합주하여 차분한 서정적 분위기를 이룬다. 이만하면 김주혜 시인의 시가 그동안 진경을 이룩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번에 내가 읽은 시 중, 감명 깊었던 시를 몇 편 골라 나 나름의 촌평을 할까 한다.

 

「억장」. 제목이 시의 정서의 본질을 말해주고 있다. 비극적 아이러니의 시라 하겠다. 늙음과 죽음이 어쩐지 슬프기만 하다는 판단을 이끌어내기도 하는데, 이런 판단의 기준은 매우 현세적이다.

「매생이를 아시는지요」 뜨거워도 김이 안 난다는 매우 짓궂은 특성을 가지고 있는 식용 해산물이 매생이라 한다. 이런 특성을 여자가 몰래 품고 있다면? 역시 매우 반어적인 시다.

「부활」 부활성야 미사 때 깡마른 노인의 두 손에서 ‘경사진 빛이/ 특이한 슬픔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고 시인은 말한다. 이어 바로 이 노인이 ‘십자가를 깎은 노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쇠퇴에서 부활로 통하는 경건한 시다.

「피정」 ‘피정’이란 묵상과 수행에 전념하는 기간을 가리키는 천주교 용어다. 땀 흘려 애써 정상에 오르는 등산길을 피정의 비유로 풀고 있다.

「애인 바꾸기」 재미나는 수작이다. 청초한 여인 가슴에 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은은한 정염의 불꽃. 현실의 세계와 상상의 힘의 상호 간섭하는 작용의 한계가 어느 정도일까, 이런 점을 생각하게 한다.

「지루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 지루한 하루, 그러나 미묘한 변화가 잔 물결치는 하루. 삶에 대한 달관을 표현한 솜씨 있는 시다.

「은행나무 아래 비닐하우스 그 집」 역시 일상 쇄사(鎖事)를 재미있게 엮은 시. ‘행여 잊혀질까 두려워 싸매둔 지난 세월/ 풍성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면 … ’ 이런 시구의 재치가 눈길을 끈다.

「연꽃마을 유성우」 참선 수도하는 사람을 연꽃향기에 비유하고 있다. 상념의 깊이가 향처럼 퍼지는 시다.

「다산초당 가는 길」 표면으로는 무심히 지나가는 길을 읊은 듯하지만 가슴 안의 슬픔과 한이 스며있는 시다.

「달맞이 꽃」 ‘달맞이 꽃’ 이란 역시 시인 자신의 비유일 것이다. 이 시집에서의 백미편일 것이다. 사람의 (누구나가 비슷하겠지만) 실존적인 고독이 처절하게 표현돼 있다.

「영정 앞에서」와 「그 날, 그 시간, 그 어둠」 아마 사랑하는 이와의 영원한 이별을 읊은 시일 것이다. 담담한 고백이 오히려 섬뜩하리만큼 비극적이다.

이상 이 시집에 수록된 김주혜 시인의 시를 일별하는 동안 이 시인의 시적 체질과 특색이 다시 한 번 정리되어 드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이 시인은 어느 편이냐 하면 매우 지적이고 냉철하며 비극적 정서를 나타낼 때도 거기에 헤프게 휘말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제는 이 시인이, 시의 깊고 먼 길을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채비가 충분히 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축배를 드는 기분으로 이 글을 맺는다.  (2008.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