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내 이름은 빨강-오르한 파묵

주혜1 2008. 5. 15. 13:47

                                                         

    내 이름은 빨강                                                                                                                         저자 오르한 파묵


   이 소설의 배경은 16세기 말, 오스만의 전통회화인 세밀화가 절정을 이루다가 베네치아 풍의 서양화풍이 조금씩 밀려들어오면서 서서히 절정기를 내려가는 바로 그 시기의 이야기이다. 에니시테 에펜디는 수년 전 베네치아를 여행하다, 우연히 베네치아 궁정에서 초상화를 보게 되고 그 매력에 푹 빠져버리고 만다.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스탄불로 돌아와 이러한 화풍으로 당신께 책을 만들어 바치겠다고 술탄에게 은밀히 이야기를 꺼낸다. 그리하여 술탄을 설득한, 에니시테는 술탄의 세계를 서양화풍으로 그린 책을 비밀리에 만들라는 명을 받고 궁정화원에서 가장 기예가 뛰어난 장인들을 선발해 작업에 착수한다. 이 과정에서 세밀화가들은 에니시테를 통해 알게 된 서양 화풍에 충격을 받게 되고, 이것은 그들 사이의 불안과 갈등을 불러일으켜 소설에 처음 등장하는 시체가 되어버린 엘레강스를 만들어 내게 된다. 우물바닥이 된 엘레강스에 이어, 1권 종반부에 다다르면 에니시테 마저 살인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그 죽음과 맞닿아 카라와 세큐레는 결혼을 하게 된다.

 

  또한 술탄은 에니시테 마저 살해된 것을 알고 자신의 권력에 대응하려는 자가 있다며 크게 분노하여, 화원장과 카라를 불러 범인을 색출해내도록 명을 엄한다. 그들은 ‘비밀스러운 서명’에 기인해 범인을 잡으려고 말 그림을 그리도록 하는 덫을 놓지만, 자신을 잡기 위해 떨어진 명임을 알고, 범인은 교묘하게 수를 써 빠져나간다. 그리고 결국 국고에 들어가 밤새워 조사를 한 카라와 화원장은 말 그림의 주인이 올리브임을 알게 되지만 화원장은 그를 감싸고 황새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그리고 그는 컴컴한 곳에서 경탄에 마지않는 경이로운 작품을 마지막으로 보고 황금바늘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다.


   한편, 카라는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하산의 집으로 간 세큐레와 아이들을 설득해 데리고 나와,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는 과정에서 에르주룸 파들이 커피숍을 습격한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커피숍에서 만난 나비를 의심하고, 오해를 푼 나비와 황새 집을 수색하게 되나, 종국에는 올리브가 범인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카라와 그 일행은 올리브를 찾아가 범인과 함께 ‘스타일과 개성, 서양화풍’에 대해 언쟁을 벌이지만, 끝내 올리브는 카라를 찌르고 인도로 도망치기 위해 달아나고 만다. 그러나 불행한 올리브는 사랑의 열정으로 미친 듯이 화 난 하산에 의해 처참한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이렇듯 이 이야기는 진정한 ‘독창성’과 예술에 대해서 고뇌하는 전체적인 맥락과 함께, 세큐레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올리브, 카라, 하산의 삼각구도와 아버지 에니시테의 애착도 양념되어 쓰고 두렵고 은밀한 예술가들의 인생을 말하고 있다.


   전통 세밀화는 신 중심, 그림의 의미중심의 시각이었다. 그림은 그 아름다움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속에 삶의 풍요로움과 사랑, 신이 창조한 세계의 다채로움에 대한 존경심과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이었다. 때문에 화가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술탄 역시 베네치아 화풍을 소개하려고 간 에니시테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야기를 보완하지 못하는 그림은 결국 우상이 될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는 우리가 믿지 않을 것이므로 결국은 그림 자체를 믿게 되지 않겠느냐. 나중에 그대는 난쟁이를 한가운데 그려 넣은 그림을 벽에 걸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림은 벽에 걸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든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벽에 건 그림을 숭배하기 시작할 테니까 말이다.”

 

   그럼 정말, 하찮은 난쟁이나 개 그림을 가운데 그려 넣고 본다면 우리는 종내에는 그것을 숭배하고 말 것인가? 이미 더 발달된 사진까지 나온 현대에서도 그렇지가 않다는 게 그 결론 일 것이다. 이런 견해 차이 역시 그림을 이해하는 의미에 그 단서가 있다. 세밀화를 그리던 사람들은 신의 세계와 그 다채로움을 나타내기 위해, 즉 종교적인 ‘숭배’의 의미가 깊은 그림을 그려왔고, 또 그 그림에 교훈적인 이야기를 같이 실어왔었다. 따라서 신성한 것만 그려지던 그림 중심에 그것 외에 다른 것을 그려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런 시도를 하고, 사람의 얼굴을 그리고 있는 베네치아 풍이 이교도적인 것이며,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베네치아의 초상화를 보고 온 에니시테는 두려움 속에서도 다음과 같은 말을 했었다.

“그들처럼 그림을 그리기만 하면 내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더 잘 알게 될 것 같았다.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걸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걸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 어떻게 말해야 하나.... 그건 마치 죄악과도 같은 갈망이었다. 신에 대항해서 내가 위대하고, 내 자신이 중요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 세상의 중심에 내 자신을 놓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의 이러한 말은, 자신을 종교화시키고 신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인공으로 그려 넣고 싶어 하는 예술 이상의,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접목되어져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 중심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욕망인 것이다. 사람들이 서서 수다 떠는 거리를 그릴 때 내 눈에 보이는 그림자들을 그려 넣고, 내가 보이는 대로, 멀리 있는 것은 작게, 가까이 있는 것은 크게 그리는 것이 내 눈에 의해 보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에 대한 반란이자 모독이 아니며, 달리 생각해서 신이 단지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는 것만이 아니라 ‘나를 통해 신이 세상을 보는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도 있는 문제다. 아마 에니시테도 종교를 거역하는 행위라는 두려움 속에 있었기 때문에, 또 그가 이슬람교도였기 때문에 술탄에게 바쳐질 책에 그의 초상화뿐만이 아니라, 그의 내면세계도 표현하려고 시도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세밀화의 가장 큰 특징은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 여러 명의 세밀 화가들이 나누어 작업을 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그림에 있어서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으며, 다 같이 노력한 그림에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 도제시절부터 호되게 야단과 매를 맞으며 엄격하게 교육되어 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옛 장인들의 그림을 보고 그 화풍과 기법을 그대로 모사 하여 철저히 익혀오고 있었다. 따라서, 한 장의 그림 중 어느 한군데가 튀거나 특출 나서 도 안되고 모자라서도 안 되었으며, 자신이 그린 부분이 전체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중국인들과 서양인들의 영향으로 일어난 새로운 유행을 따라 자신만의 개성적인 화풍을 가지고자 하고, 다른 화가들과 구분되기 위해 서명을 새겨 넣는 행위는 철저히 금기시 되고 있었다. 그래서 진정한 화가와 평범한 화가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이것에 대해 어떻게 여기는지 질문을 하곤 한다고 한다.


   나비는 이 개성과 서명에 대해서 스타일은 곧 불완전함이고, 완벽한 그림이라면 서명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또한 서명과 스타일이란, 결함 있는 그림을 그리고도 뻔뻔하고 어리석게 자만하는 자의 변명일 뿐이라는 것이다. 세밀화의 장인정신을 가진 나비도 또 화가는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다던 궁정화원의 화가도 개성과 서명에 대해서 한치의 의심도 없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후세에 영원히 재능 있는 화가로 남고 싶어 하는 서양화가들이 자신의 그림에다가 서명을 하고 또 누구의 그림인지 한눈에 보고 알 수 있는 독특한 화풍을 지니고 싶어 하는 것과는 확실히 반대되는 생각인 것이다.


  먼저 그토록 혼란을 겪고 있던 세밀 화가들의 고뇌 속에는, 자신의 재능을 지극히 잘 아는 탓도 분명 들어 있었다. 확신에 찬 자신의 재능으로, 다른 세밀 화가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 기예에 빠져 오만함이 보일 때도 있었다. 에니시테가 설명하듯, 그의 세밀 화가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인간적인 이유를 찾아내서라도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면, 본인의 마음을 진심으로까지 사랑하게 만드는 영특(?)하고 교활한 자들이었다. 처음엔 이익을 위해서였지만 나중엔 진심으로 섬기게 되고, 존경하고 또 서로에 대한 칭찬을 하면서도 그만큼의 타오르는 질투를 하는, 새빨간 빨강색으로 비유될 수 있는 이들의 마음은 ‘변신’을 의미하는 빨강이다.


   이 빨강은 우리 인간들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색이다. “그들이 얼마나 유일해지고 독특해지고 싶어하는지, 그것을 얼마나 치열하게 원하는지 보아라. 이 죽음의 눈동자를 보아라. 인간은 궁극적으로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특별하고 예외적인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더냐. 특별하고 예외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 그 튀고자 하는 마음은 어느 곳에 놓아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새빨간 빨강이다.


   또 하나의 빨강은, 올리브를 살인자로 만들어버린 검붉은 빨강이다. 악마의 유혹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넣고, 그 기예의 부족함에 좌절하고 두려워하는 공포. 그것은 죽음과 맞닿아 있고 또 실제로 두 명을 죽음으로 인도한 올리브의 두 손에서 나오는 두렵고 떨리는 ‘공포’의 모습이다. 죽은 에니시테도 세밀 화가들이 그려온 그림에 검붉은 빨강으로 덕지덕지 서양 화풍의 흉내를 내려고 덧칠을 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그림자의 표현이었으나 신에 대항하는 두려운 행위였고 그래서 그 역시도 불안해했었다. 공포와 신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나타나는 검붉은 빨강은, ‘피’를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며 실제 살인피해자의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보이던 색이기도 했다.


   그리고 책 이야기 속 내내 선홍빛으로, 분홍에 가깝게 옅어졌다가 치열하게 끓어올랐던 ‘정열’의 빨강은 세큐레를 향한 카라의 사랑으로 책 위에 내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범인을 색출하고 올리브를 도망가지 못하게 용감히 잡으려 했던 것은, 예술에 대한 열정이 아닌 세큐레에 대한 열정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로 인해, 이스탄불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녀를 위해 책 제작을 완성하려 하고 그녀를 위해 어깨를 다쳐 불구가 되었으며, 그녀를 위해 그는 일생을 살았다.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일이라 불리던 그들이 했던 사랑은, 치열한 예술가들의 고뇌에서 어쩌면 여유였고, 행복이었고, 사랑이었다. 그렇게 변화무쌍하게 자신을 사랑하던 남자들을 저울질하던 세큐레 역시 그런 그를 남편으로 맞아 그가 죽을 때까지 옆에 있어주지 않았던가.


   또한 이 빨강은 세큐레가 책 끝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행복을 대변하는 ‘따뜻한’ 빨강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행복의 그림에 있는 미소가 아니라, 삶 자체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평범한 식사를 하고 입맞춤을 하는 모습 속에서 난롯불처럼 따뜻하고 조용한 빨강이 우리 생에 스며드는 것이다. 세밀 화가들도 알고 있었지만, 그리지 못한 이런 행복은, 그렇게 찾아다니던 파랑새처럼 늘 곁에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따뜻한’ 빨강은 수줍게 말해주고 있다. 그걸 안 영리한 세큐레는 아마도 오르한에게 이 이야기를 모두 쓰라고 했었을 것이고….


   이렇듯 내 이름은 빨강은, 여러 명의 화자가 나와 이야기를 했듯이 갖가지 독특한 빨강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사랑을, 예술을, 질투를, 변화를, 배신을 나타내는 변화하는 이 빨강은, 왜 이 책의 제목이 ‘내 이름은 빨강’이었는가를 단숨에 대답해주는 현명한 것이었다.

그들이 지녔던 슬픔이나 이별, 질투, 외로움, 적대감, 눈물, 소문은 에스테르가 말한 것처럼, 집 안의 살림살이들처럼 항상 서로 비슷한 것 이었나보다. 이들의 정체성을 고뇌와 피(血)로 찾아가는 과정에서 같이 고민했던 나도, 따뜻한 빨강을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과 미소가 번지니 말이다.


   재미라기 보단 추리소설로서 긴장감과 흥미로움이 많이 있었다. 어찌 보면 내 자신이 살인자가 되어 보려 노력했던 점이 일반적인 상황에선 경험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읽을수록 빠져들게 하는 작가의 글에 매료되어 또 다른 그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는다.


[내 이름은 빨강]에 대한 세계 각국의 평가]

 

* 오르한 파묵을 생존하는 세계 최고의 작가 중 한명으로 만든 작품(인디펜던트)

* <내 이름은 빨강>은 현대의 가장 독특한 작가 중 하나이자 최고의 소설가 파묵의 기억할 만한 성공작이다. (타임스)

* 이야기의 형식으로 그려낸 한 폭의 세밀화, 그 속에 재현된 16세기 말의 이스탄불은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 절대적으로 문학적이며, 문학의 승리다 (시드니 모닝 헤럴드)

* 내 이름은 빨강은 대단히 밀도 높은 아름다움을 가진 작품이며, 동시에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3세 시대를 숨 막힐 정도로 박진감 넘치는 시점으로 재현해 냄으로써, 우리에게 동양과 서양의 긴장을 생생하게 체험하도록 이끈다. (인터네셔널 임팩 더블린 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