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퀴엠 속의 화염불꽃
박제천
모든 시는 하나의 碑銘이다. 그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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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어려운 묘비로 가는 한 걸음이자 우리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죽어가는 이와 함께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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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그들이 떠나고, 우리도 그들과 함께 간다.
우리는 죽은 자와 함께 태어난다.
보라, 그들이 돌아올 때 우리를 데리고 온다.
----- 엘리엇 [네사중주]의 [리틀 기딩]
1
중국의 당송시(唐宋詩)를 보면 대체로 [시경(詩經)]을 기본으로 삼는다. 처음에 그런 글을 읽고는 내심으로 적지 아니 의문이 일었다. [시경]의 표현은 대체로 담백하고. 질박하였다. 그러나 시경을 기본으로 삼았다는 당송시는 그와 달리 화려하기 그지없었으니 그 간극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 뒤로 [문심조룡]에서 [문식(文飾)]의 설명을 듣고서야 시경을 기본으로 삼는다는 것은 수식어가 아니라 그 뜻에 있음을 깨우친 것이다.
문식은 흔히 수식어를 활용하는 법 정도로만 잘못 알려져 있다. 문식은 그 활용법으로 세 가지를 거론한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을 사물의 형체에 빗대는 색채, 그 마음에서 솟구쳐 나오는 소리를 활용하는 운율, 그 마음의 울림을 표현하는 정서가 이른바 문식의 구체적인 방법론이다. 바로 말해 [문식]은 꾸밈말에 대한 활용법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와 같은 색채, 운율, 정서를 포괄할 수 있는 정황을 만드는 법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소월이나 만해, 미당의 명품,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을 보면, 하나같이 시인의 절실한 마음이어서 읽는 그대로 우리 마음에도 울림이 퍼져나간다. 그래서 대부분의 독자들은 시적 화자와 시인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실인즉 저들이 그런 정황에 처했기 때문에 그런 절실함을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정황을 연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장자 식으로 말하면 [말로 만물을 꾸미는] 것이니, 문자와 정황이 하나가 되어 시인의 심정을 향기롭게 빛내는 장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오해해 정황을 도외시한 채 문자에만 매달리다 보면 표현을 위한 표현으로 그치는 비문(非文)이 되고 만다. 이 때문에 당송의 시인들은 [시경]의 그 마음, 그 지극함을 본받고자 한 것이다. [시경]의 찬술자인 공자가 수록작품 300편을 선정한 이유로 [사무사]를 내세움도 그 때문이고, [시즉절(詩卽切: 시는 곧 절실함)]이라 정의함도 그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장이나 시의 골조를 만들고, 그 골조에 살을 입히는 언어 공학의 요체가 곧 문식이다.
바로 말해 문식은 곧 [표현의 장치]이다.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 그립고, 혼자서 쓸쓸하고, 남몰래 슬프거나 분하고 노여운 마음,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 무엇과 같은 오욕칠정에 매달려 산다. 이러한 사람의 정서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분야가 시 장르라면 문식은 그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실제적인 장치라 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표음문자를 상용하는 서양에서는 언어기호학의 발달을 기다린 근대에 와서야 비로소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차이를 시에 적용하는 형식주의문학이 대두했지만, 고대 동아시아권에서는 시의 발생초기부터 기표와 기의를 갖추고 태어난 표의문자(한자)를 상용하였기에 처음부터 언어의 다의적인 의미 활용은 물론 형식구조 또한 다중화할 수 있는 완벽한 시의 표현 장치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2
시를 읽을 때 시인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은 대체로 그 표현의 특징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아마도 시인의 천성과 방법적인 트레이닝의 결과물일 것이다. 개성이라 묶어 말할 수 있는 자가류의 고유한 특징은 뒤집어 말하자면 요즘의 DNA처럼 시인의 성장환경과 취향은 물론 그가 누구인가를 결정짓는 지문이라 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김주혜 시의 특징을 말하자면 우선 진솔하고, 재미가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단순 명쾌한 어법과 재치있는 반전이 재미를 가져오고, 재미삼아 읽다보면 그 행간과 배면의 사무침이 긴 울림을 자아내는 진솔함을 접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껏 발표한 첫시집 [때때로 산이 되어], 두 번째 시집 [아버지별], 등 두 권의 시집과 새로이 엮는 세 번째 시집 [연꽃마을 유성우]에 수록된 신작시들 역시 그러하다. 시어의 활용이나 표현구조에 장치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바로 [문식]의 방법론에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시인, 평론가들의 김주혜 시에 대한 이제까지의 평가나 주목도 대체로 [문식]의 표현장치가 잘 가동되고 있음을 증명해준다.
신덕룡은 첫시집 [때때로 산이 되어]에서 하찮은 일상적 현실에서 발견하는 삶의 진실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형상력에 주목한다. (특히 이 시집에 수록된 등단작 [스트레스]는 필자가 펴낸 시창작 지침서 [시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에 작시법의 모범답안으로 소개된 바 있다.)
김주혜의 두 번째 시집 [아버지별]에서 신경림은 [동침]이나 [주홍글씨]와 같은 작품에서 시 읽는 재미를 찾아낸다. 햇빛과의 동침이며, 수술대의 개구리처럼 예측을 벗어나는 상상력의 장치와 행간을 활용하는 서술법의 묘미를 주목한다. [아버지별]의 연작에서는 과장이나 조작이 없는 진솔함을 읽어내고, [목각인형]과 같은 특별한 소재의 읽는 재미에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이승하 역시 [동침]에서 외설도 아름다울 수 있으며, 진부함을 신선하게 바꾸어내는 시적 에너지에 주목하고 있다. 고광식은 [아버지별]에서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미학적 깊이를 감각의 촉수로 더듬어내는 방향성을 주목한다 주경림은 [억장]에서 비극적인 만남에서 절망적인 삶을 뜨겁게 껴안는 희망을 읽는다.
다시 말해 김주혜의 새 시집은 김주혜가 1990년에 등단한 이래 시인의 자작시해설에서 천명한 [세밀한 묘사와 분위기 연출]을 지속적인 시적 지표로 삼아왔고, 그에 따른 남다른 성취도와 눈부신 진경을 세 번째 시집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이번의 새 시집 [연꽃마을 유성우]는 1부 [매생이를 아시는지요] 2부 [연꽃마을 유성우] 3부 [에밀리 디킨슨에게] 4부 [어머니별] 등 네 묶음의 시를 주축으로 삼고 있다. 중간 표제작만 보아도 그 시의 성격이나 배경과 진전을 동시에 짐작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시작품 하나하나는 물론 작품들을 엮어 가르는 기준 역시 의도적으로 읽어달라는 시인의 장치다. 그러나 시인의 장치대로 시집 전편을 읽고 나면, 이중액자그림처럼 장치 속에 숨어 있는 시인의 또 다른 장치에 마주치게 된다.
3
제1부 [매생이를 아시는지요]의 수록작품들은 [억장]처럼 2시집 [아버지별]의 연속처럼 보이고, [매생이를 아시는지요]는 2시집에 수록된 [동침]과 같은 계열이며, [애인 바꾸기]와 같은 작품은 등단작 [스트레스]처럼 반전의 알레고리를 활용한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부활] [피정]은 가톨릭 신앙을 바닥에 깐 작품이다. [지루하지 않는 삶이 어디 있으랴] [은행나무 아래 비닐하우스 그 집] 등의 작품은 시인이 개인적인 번뇌와 이웃에 대한 연민처럼 시인의 삶을 짜나가는 피륙의 결과 무늬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제1부는 시인의 작품세계를 종합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축소판이다.. 수록작품 모두가 그에 걸맞은 전경과 후경의 이중적인 장치를 보여주지만, 그 중에서도 [억장]과 [매생이를 아시는지요] [애인 바꾸기] 를 새겨본다.
10년 동안 자리 잡힐 대로 잡힌 봉분을 파헤치기로 했다. 배산임수背山臨水 좌청룡 우백호左靑龍 右白虎 누가 봐도 명당자리에 아버지집을 짓고, 잊을 만하면 술 석 잔 뿌리고 효녀인 양 살다가. 죽을 듯이 삶에 지칠 즈음 아무래도 이 팔자가 꼬인 것은 명당값도 못하는 조상 탓인 것 같아 아버지집을 허물기로 했다. 한 삽 한 삽 퍼올리는 동안, 시간의 켜를 허물고 나는 아버지를 따라가겠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10년 동안 아무도 몰래 흘린 눈물로 흠뻑 젖은 채 오들오들 떨고 계신 아버지를 붙들고.
--억장
김주혜의 새 시집 1부의 첫머리는 [억장]으로 시작한다. 이 낱말은 사전에도 소상하게 풀이되지 않은 낱말이지만, 삶의 여러 마디마다 슬프거나 분하거나 허탈한 마음이 극에 달할 때 오히려 한숨처럼 오열처럼 저절로 [억장이 무너진다]고 쏟아져 나오는 말이다. 가슴이 무너지다니, 이보다 더 비극적이고 참담한 낱말이 어디 또 있을까. 우리말사전은 [억장]의 한자로 높이를 나타내는 [丈]을 쓰고 있다. 사전의 풀이에 성이 안 차 여러 용례를 살펴보았다. 대부분의 글이 억장은 억장지성[億丈之城]의 준말이기에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은 [까마득히 높은 성이 무너져 내리듯]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는 출전 미상의 뜻풀이에 의지한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러한 뜻풀이보다는 가슴 억[臆]과 마음, 창자를 가리키는 장[腸]의 합성어가 더 올바른 기술이라 생각한다. [가슴, 마음]이기에 그대로 붙여서 무너진다는 말을 쓰는 것이다. 김주혜의 시 [억장]을 보면 시인의 가슴이 무너지는 것은, [명당]이라 믿었던 아버지의 무덤을 이장하고자 봉분을 헤쳐 보았더니, 시신이 [물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다]는 기막힌 슬픔 때문이다. 봉분이 수맥 자리에 앉혀진 것이다. 풍수에서 가장 꺼리는 자리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나 고인이나 자손에게 다 좋으라고 [명당]을 찾는다. 현실적인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마음속에는 명당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런저런 어려움 끝에 확보한 [명당]이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되었으니 억장이 무너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작품이 끝나면 상식적인 귀결이 되고 만다. 이 작품의 초점은 [아버지를 따라가겠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는 세심한 반전의 장치이다. 잇달아 [오들오들 떨고 계신 아버지를 붙들고]로 마무리를 지어내는 솜씨야말로 참으로 정치한 테크닉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주듯 선명하면서도 직설적인 서술이다. 소리내어 시를 따라 읽다보면 마치 내 아버지의 참담한 사후를 보는 것 같아 슬픔이 차오르는 명치를 지그시 누르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가슴이 무너지는 억장과 창자를 끊어내는 듯한 [단장]의 슬픔이다.
가을 여행길, 대보름달이 뜨면 몸이 뜨거워진다고 했더니 남녘 시인이 화들짝 놀라며 매생이 같은 여자란다. 펄펄 끓는 국물에 매생이를 넣으면 퐁퐁퐁 뿜어져 나오던 뜨거운 열기가 사라지고 금세 새치름한 진초록빛 바다가 차갑게 펼쳐진단다. 그 냉랭한 자태에 속아 그만 덥석 떠먹다가는 영락없이 혓바닥을 데이고 만다니, 고게 바로 매생이국의 내숭이 아니고 무엇이랴. 매생이국 같은 여자!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건드리면 뜨거운 열정이 활활 살아나는 여자. 멋지다. 내가 그런 여자라니… 내게 데이고 싶은 사람, 어디?
----매생이를 아시는지요
그러나 [억장]에 이어 나타나는 [매생이를 아시는지요]에서 그 슬픔은 어디론가 다 날아가고, [내숭떠는 여자]의 위트에 끌려,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데이고 싶은 사람, 어디?] 하는 귀여운 시치미에 무릎을 치게 된다. [매생이를 아시는지요]는 1부의 표제작이다. 매생이는 김이나 파래 비슷한 남녘 해산물이다. 끓여도 차가워 보일 뿐아니라 떠먹어도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끌어당긴다. 먹은 흔적이 없으니 양을 가늠할 수 없다. 늪처럼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다. 시인은 그 온도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매생이]의 그 모든 것을 함축하지 않았을 리 없다. [내숭]이란 말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요즘 애인을 바꿨다
툴툴거리기나 하고 툭하면 소리나 지르는
옛 애인을 버리고
새 애인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눈부신 남자!
백색의 와이셔츠가 아주 잘 어울리며
반짝반짝 빛나는 까만 구두에선 구름도 머물다 갈 것 같았다
그는 참을성도 수준급이다
밤새도록 나를 기다리면서도 짜증 한 번 부리지 않고
윙크부터 하며 숨막힌 포옹을 해 온다
그의 열정에 달한 숨소리를 귓가에 들으며
가볍게 그의 손을 잡으면
그는 어김없이 내 허리를 바싹 조여온다
손을 맡기고, 가슴을 맡긴 채
나는 조용히 그를 위해 노래를 불러준다
그는 기분 좋게 소리 없이 출렁이며
알레그로로, 안단테로, 때로는 피아니시모로
내 영혼의 갈증을 적셔준다
그의 품은 넓고 아늑하다
그에게선 물씬 밤꽃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의 가슴에 안겨 온몸을 애무 받으며
나는 서서히 오르가즘에 이른다
그는 나를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고
나는 그가 있어 이 세상을 살아간다.
---애인 바꾸기
[애인 바꾸기]는 읽는 이의 시선을 단번에 붙들 줄 아는 시인의 재치로 넘쳐난다. 요즘 세태의 불륜 코드를 과감하게 도입하여, 읽는 이를 들뜨게 하는 분위기 연출력이 돋보인다. [2시집의 [동침]을 연상시키는 작품이지만, [햇빛]처럼 연상 모티프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눈부신 남자!]를 전면에 내세울 만큼 당당하다. [이 시집 1부와 2부를 연결하는 작품이다.
4
그러나 새 시집 2부 [연꽃마을 유성우]부터는 작품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장소도 다채로워지고, 작품 하나하나에 새겨진 내용도 인상적이다. 마치 로망스 소설을 읽는 것처럼 그림마다 스토리 라인이 액자를 만들어준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이별의 슬픔이 예리한 칼날처럼 읽는 이의 가슴을 에려나가는 프로세스 처리는 시로 바뀐 옴니버스 영화라 할 수 있다.
그가 보고 싶어 연꽃마을로 달려왔다. 숨은 듯이 참선參禪을 하고 있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부좌跏趺坐하고 앉은 그의 손가락 끝에 잠자리가 날아와 앉았다. 잠자리도 흠칫 몸을 떠는 것같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유성우 한 줄기,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하늘에서 내 안으로 곧장 날아왔다. 동쪽으로 갈까 서쪽에서 잠을 잘까. 이 하늘 저 하늘 떠돌던 유성우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한꺼번에 연꽃마을 내 가슴 어둠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울음덩이가 불로 타오르고 물보라로 꽃을 피웠다. 내 안에 연꽃 향기가 가득 찼다.
=== [연꽃마을 유성우]
여기서의 [그]는 연꽃이다. 연꽃이 보고 싶어 한달음에 달려온 시인은 문득 아직 꽃잎을 열지 않은 연꽃에서 가부좌한 채 참선에 들어간 그를 떠올린다. 여기서부터의 [그]는 이미 연꽃이 아니다. 아니 연꽃이 된 [그 사람]이다. 반가운 나머지 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시인의 손길보다 먼저 잠자리가 그의 손가락에 앉았다. 시인과 그를 마주보게 하는,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경계다. 절망해 눈을 감는 시인의 가슴에 유성우가 날아왔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하늘에서 내 안으로 곧장 날아온 것이다. 유성우 한줄기가 환히 불을 밝히며 시인의 가슴속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그 불의 빛과 뜨거움이 시인의 울음덩어리를 태우고, 그 눈물로 꽃을 피운다. [그]가 누구이지 시인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 하늘 저 하늘 떠돌고] 있는 그 누군가다.
다산 초당 가는 길
눈밭에 떨어진 동백꽃이
너무 붉어 슬프다
밤새 이슬 맞고 더욱 청초한
여인의 속살처럼 윤기 나는 봉오리 속
노오란 꽃술이 못 다한 말 하려는지
애절하게 고개 떨구고 있다.
다산도 알았을까. 이 여인의 속내,
알고도 모른 척했을 다산을 향해
툭!
그를 향한 가슴 끌어안고
하얀 눈밭에서
요절한 붉은 동백꽃.----다산초당 가는 길
[다산]은 정약용의 호다. 다산초당은 강진에 있다. 시인이 왜 그곳에 가는가는 작품에 나오지 않는다. 다산초당에 도착한 것도 아니다. 그 가는 길에서 동백꽃을 보고, 그 동백꽃을 다산이 알았을까, 아마 알고도 모른 척했을 거라는 자문자답이다. 시인과 다산 사이의 거리감, 다산과 동백꽃과의 거리감, 이미 땅에 떨어진 동백꽃과 시인의 거리감, 이 거리감의 경계에 서 있는 시인에게 다산은 [그 사람]이고, 동백꽃은 시인 자신이 아닐 수 없다.
보름달이 뜨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작 보름달이 떠오르면 서성이다 놓쳐버린 사람, 보름달이 스러질 때 지구 반대편으로 사라진 사람. 자작나무 숲보다 깊은 가슴을 가진 사람. 해바라기 긴 그림자보다 더 외로운 사람. 어둠 속에 갇힌 나에게 심보르스카의 시를 읽어주며 달빛 천지로 만든 사람. 가끔 꿈속에 빙하가 되어 벌겋게 벗어진 상처를 달래주며 흘러흘러 서쪽으로 사라진 그 사람을 위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부르며 밤마다 바다를 건너갑니다.
----달맞이꽃
시인에게 그사람이 심보르스카의 어떤 시를 읽어주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것은 바슬라바 심보르시카의 [끝과 시작]이라는 시집이 아니었을까. 그의 시 중에서 자장 많이 알려진 [프롤로그도 에필로그도 없이 펼쳐진 운명의 책]이란 구절이 아니었을까. 아니 어떤 작품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시인과 그 사람을 심보르스카는 동시에 존재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2부의 시편에는 수많은 추억의 장소가 점묘화처럼 새겨져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풍경 속에 숨어버리는 그곳, 시인만이 아는 그곳, 시인과 그 사람만이 아는 그곳, 경계를 뛰어넘으려는 자의 끝없는 시도로 점철되어 있다. 연꽃마을은 물론,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 강원도 산길 냇가의 낡은 초가집, 기차역, 신두리 달빛, [측백나무 아래 고흐의 그림이 들어 있는 늦가을 하늘 끝자락, 날개가 길어 날 수 없는 까마귀쫑나무 그늘의 슴새, 김주혜의 시편이 그려낸 문학지도는 너무도 선명하지만, 거기 씌어진 등고선이며 색채며, 지명들은 동시에 암호화된 추억제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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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의 시편은 3부 [에밀리 디킨슨에게]로 넘어가면서 더욱 절절해진다. 만남과 헤어짐의 미학적 장치가 아니라 바로 말해 반려자를 여읜 시인의 자전적인 기록이다. 뿐만이 아니라 제4부 [어머니별]은 [죽은 어머니]에 대한 추모의 장이다. 풀어 말하자면 이 시집은 문자 그대로 시인의 개인사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시인의 2시집 표제가 제시하듯이 [죽은 아버지]의 기록이듯이 김주혜의 이번 시집은 그가 연이어 겪어낸 육친과 반려의 죽음을 몸으로 마음으로 작품으로 견뎌내고 새겨나가는 기록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혼자 사는 자의 책읽기로 연결된다. 혼자서 바라보고 만나보는 세상과 사물은 낯설기도 하고 새롭기도 하다. 해독이 불가능했던 구절의 뜻이 저절로 터득되고, 익숙했던 낱말들은 겹그림 속으로 몸을 감춘다. 시인된 자로 명치를 지그시 누르며 한땀한땀 살이며 마음, 그 자신의 삶에 문자를 새기고, 다시 그 문자를 되풀이 읽는 일은 필자도 겪어본 일이지만 업보라 할 수 있다.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지만, 슬픔은 때로 두 다리 뻗고 엉엉 울어제치는 것이 제격이기 때문이다.
해가 저문다.
주위에 빛나던 것들 서서히
빛을 추슬러도
모든 사물들 제자리에 그대로 있다
적막이 길게 가로지르고,
새들도 둥지를 찾아 떠났다
어둠이 내리나
둘레의 꽃들은 향기를 잃지 않고 있다
바람은 대낮보다 더 싱그럽고
풀 향기는 새벽처럼 짙게 속삭인다
차라리 흐르는 눈물방울
그 투명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
한 마리 반딧불이가 되고 싶다
----그 날, 그 시간, 그 어둠
[그날, 그 시간, 그 어둠]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김주혜는 그 슬픔을 반딧불이로 바꾸고, [연꽃마을 유성우]의 불이 연꽃을 피우듯, 혹은, 그 화염의 혀들이 한데 겹쳐져 불과 장미가 하나가 될 때까지 노래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버리면 모든 것은 잘 될 것이다. 엘리엇의 [네사중주] 중 [리틀기딩]으로 이 해설의 서두와 마무리를 짓는 것은 시인된 자의 다짐은 누구나 그와 같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기다려 보자. 레퀴엠 속에서 겹져진 저 화염의 혀들이 연� 화엄을 이루어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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