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은 남자의 발명품이다. 광개토대왕의 조국이든 윤도현의 조국이든 그것은 죄다 남자의 것이다. (21살의 내가 군대에 가기 싫었던 이유는, 내 실존이라는 ‘발견’을 조국이라는 ‘발명’ 속에 구겨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효도가 부모들의 발명품이고 우정이 약소자의 발명품이며 연애가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사실과 다를 바 없다.
여자에게는 워낙 조국이라는 게 없다. 물론 대부분의 여자들도 조국이라는 게 마치 존재한다는 듯이 살아간다. ‘인생연극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혹은 프로이트 식의 ‘마치 ~처럼(as-if)’의 철학에 기대지 않더라도, 조국이 있다는 듯이 사는 것은 꽤 중요한 근현대적 삶의 조건이다. 그리고, 국민의 통상적 의무를 위해서라면 그것만으로도 넉넉해 보인다. (나 역시 조국이 있다는 듯이 선선히 입대했고, 그 조국을 위해서 32개월의 젊음을 바쳤다!) 그런 점에서는 유관순 열사나 한명숙 총리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여자들 역시 충량한 국민으로서 별 손색이 없다.
그러나 이 조국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베네딕트 앤더슨)에 전념/투신하기에는 사회적 약소자로서의 여성은 너무 현실적이다. 반복하지만, 잘난 남자는 대개 추상적으로 흐르지만, 아무리 잘난 여자라도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부권제 사회이기 때문이다. (가령 사형수들의 유언을 견주어 살펴도 여자의 것이 훨씬 현실적이다.) 공적, 사적 의사소통에서 여자와 남자가 달리 반응하고 운신하는 이유 중의 한가지는, ‘조국은 남자의 발명품이며 여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명제 속에 숨어 있다. 애국심이라는 것도 결국은 어떤 제도와 관행에 대한 일련의 반응양식일진대, 무릇 여자는 다르게 반응하며, 그로써 실존적 무국적자로서의 여성적 정체성을 설핏 드러낸다. 아, 명심할지라, 남자들이여, 여자는 남자들의 제도와 체제에 ‘직접’ 순종하지 않는다는 사실.
요지는, 여자는 사회적 유력자인 남자를 사랑함으로써만 비로소 그의 제도를 승인한다는 것이다. (물론 시속과 세태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지적은 아직 별무소용!) 남자의 세계 속에 여자의 조국이 없다는 말은, 결국 여자의 조국은 사랑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남자는 세계를 지배하고 여자는 그 남자를 지배한다’는 통속의 격언은, 공적 영역을 빼앗긴 여자의 약소자적 위상에 대한 반어적 지적만을 담고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여자는 사랑을 매개로 비로소 남자의 세상과 화해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확실한 것을 버리고 불확실한 것을 쫓아 헤맬 이유가 어디에 있겠어요?” 이 말은 스승이자 동무였고 또한 연인이었던 아벨라르(1079∼1142)에 대한 엘로이즈(1098∼1164)의 사랑을 요약한다. 그것은 남자의 세상(제도)과 남자(사랑) 사이를 가로지르는 여자들의 기초적 동선(動線)이기도 하다. 한 걸음 나아가, 그것은 루 살로메나 엠마 골드만처럼 신과 조국과 남자의 제도를 뚫어내고 제 자신만의 현실을 찾아내는 여성적 현실주의와 곧장 이어진다. 물론 엘로이즈는 살로메도 아니며 엠마 골드만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엘로이즈의 사랑법은 남자의 세계와 묘하!게 어긋나는 여자의 동선을 증거한다.
아벨라르가 누구던가? 스승 기욤(Guillaume de Champeaux, 1070~1121)과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까지 논파하던 당대 최고의 논객이 아니던가? 사랑이 그의 숙명통(宿命痛)이 되기 전, 그는 당대 정신계의 좌장으로 입신의 탄탄대로를 밟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20살 연하의 제자 엘로이즈의 살을 살살 만지다가 급기야 임신시킨 후, 이를 사련(邪戀)으로 치부한 그의 친지들로부터 궁형의 테러를 당한다. 졸지에 좆을 뽑힌 이 천재적 지식인은 육체의 허약에 따라붙는 만고의 보수주의로 회귀한다; 그의 신앙은 더욱 근엄해지며, 그의 학문은 더욱 추상적으로 변한다. 여담이지만, 실연한 지식인은 더욱 추상적인 학문에 몰두하는 법이라던 바르트, 그리고 자신의 동성애를 숨기기 위해 철학 속으로 도피했다는 누명을 쓴 바 있는 비트겐슈타인 등의 얘기를 참고할 만하지 않은가?
단숨에 좆의 그 초절한 맛을 잃어버린 아벨라르가 신과 예수를 더 가까이 하려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자신의 아이를 낳은 여자를 갑자기 ‘예수의 신부’라고 강변하면서 종교적 회오의 마조히즘에 빠진다. 또 여담이지만, 이들의 사랑은 종교의 현실적 기능에 대한 좋은 방증이다: 종교는 예방이 아니라 참회의 기능이 보다 현실적인데, 이로써 종교가 왜 늘 모자란 사회철학일 수밖에 없는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모든 종교의 핵심적 기능은 애도’라는 엘리아스 카네티의 지론도 여기에서 멀지 않다.
육욕의 쾌락을 잃은 아벨라르가 발밭게 경건해지지만, 여전히 젊고 열정적인 엘로이즈는 현실적이다: “확실한 것을 버리고 불확실한 것을 쫓아 헤맬 이유가 어디에 있겠어요?”라든지, “제게는 아내보다는 늘 애인이라는 호칭이 훨씬 달콤했어요”라고 단언하는 엘로이즈에게 유일한 실체는 연인 아벨라르뿐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황후가 되기보다 오히려 당신의 창녀가 되겠어요.” 아니, 수녀인 그녀에게 아벨라르는 그리스도에 버금가는 ‘나의 주님’이 되는 판국이니 차라리 점입가경.
연인과 동무의 관계를 살피면서 그 현명한 분별과 실천을 꾸려갈 때, ‘조국’의 문제는 그 관계의 판도를 결정하는 지렛대 역할을 한다. 요컨대, 남자들은 조국과 명예(<인형의 집>의 가부장 헬머처럼)를 빌미로 사랑에서 멀어지지만, 여자들은 조국을 통해 사랑으로 나아간다. 여자들에게는, 조국이 확실한 게 아니라 확실한 것이 조국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사랑이며, 그리고 여자들은 종교와 신조차도 사랑을 대하듯 접근해가는 것이다.
김영민/전주 한일대학교 교수·철학 jajaym@hanmail.net /한겨레 200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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