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문득

주혜1 2008. 11. 19. 07:11

문득 ... 이미산



  청소기의 소음에서 따르릉 따르릉
  쏟아지는 수돗물에서 딩동딩동
  스위치를 끄면 침묵뿐인데 
  누가 자꾸 나를 부르나

  생각에 잠긴 빛살 좋은 오후,
  처음과 끝이 만나고 있다, 소음이 고요로, 고요가 소음으로

  언젠가 내 몸을 떠나간 목소리인가
  수없이 발설한 호흡인가
  빛으로 소리로 몸을 바꿔 돌아왔나

  한 소리가 고요가 되기까지, 다시 소리가 되기까지
  길고 짧은, 밝고 어두운, 무겁고 가벼운, 서로 다른 그 주기가 나를 만든다

  토막 난 생선을 씻을 때
  피가, 내장이, 비늘이, 몸에서 분리될 때
  물소리에 집중하는 생선의 눈알, 파도에 맡겨진 몸과 분리되어 떠나가는
몸 사이에 남겨진
  생각들 몰려든다 이 눈알에 갇혀
  나는 오래전 어떤 행위를 기억해낸다
  그곳에 두고 온 내 영상의 안부, 그리고 지금 한 몸을 분리시키는 구실의
당위성과 저 지극한 눈동자의 역설
  쉼 없이 흐르는 물의 감촉에서, 지루했던 한 얼굴과 초점 잃은 눈동자 속에서
삭아가는 나를 만난다

  초인종을 누르고 숨어서 지켜보는 아이의
  몸속에 차오르는 초조 같은,
  멀쩡한 대낮이다  

 


 

화냥기




영정사진 속에서 외숙모가 웃고 있다

벚꽃처럼 날리는 화냥기 붉게 칠한 입술

만개한 꽃잎이 양쪽 볼에서 살아나고 있다

마을을 휩쓸었던 폭풍의 위력을 증거하고 있다

스스로 준비했음이 분명한 저 사진

저리도 눈부신 젊음으로 떠나고 있다

그녀가 뿜어내는 청춘의 향기가 영안실을 뒤덮는다

서로 성이 다른 자식들 담담하게 손님을 맞는다

나는 겹겹이 접어두었던 소문을 꺼내 기억 저 편으로

조용히 던져버린다

햇살이 비치면 맥없이 스러지는 안개

소문은 몸뚱이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이내 잊혀질 그 기억으로 하여

한 순간 죽음은 더욱 고요하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 그 오랜 시간이

반나절이면 걷히는 안개 같은 생애였다고

스물 세 살 새색시 되어 떠나는 외숙모

여든 살의 육신을 감추고

영정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다

은밀히 뿜어내는 저 붉은 안개의 정체를

이제야 알겠다 죽어서도

핑크빛 흘리며 떠나는 하루살이의 비행,

외숙모가 웃고 있다







게으르게 누워 있던 칼이

내려꽂힌다, 도마 위의 고등어를 향해

배고픈 매의 눈알처럼 번쩍이며

피가 튄다 붉은 내장이 끌려나온다

도마 위에서 피 맛을 즐기는 저것은

칼의 혀

칼의 살 속으로 저며드는 칼의 날


고등어를 자르고

고등어 속 바다를 자르고

바다 속 어둠을 자르고

어둠의 실핏줄을 자르고

검붉은 녹을 자르고 불안을 자르고

피묻은 옆구리를 자르고

환한 중심 속에 입맛을 다시는

칼의 눈


시장의 소음들, 단잠을 삼킨 바다가 가라앉는다

고요하게 잠든 칼

제 잠을 베고 제 어둠을 베고 제 몸을 베고

하얗게 빛나는 허기

누군가 날을 벼리고 있다




지하상가 옷 수선 집




재봉틀이 밟고 지나간 길들은

깊고 아득한 동굴 속으로 내려간다

막다른 골목 출입구도 없다


한 발 비껴난 어둠이 시계처럼 조용히 지켜보는 방

돋보기를 낀 여자가 한 뜸 한 뜸 경전을 읽어내듯

바느질 중이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세상 꿈속인 듯

끊어진 실을 이으며 부지런히

옷을 돌본다


구겨지고 찢긴 것들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 위로 낡고 때묻은 시간들 그림자처럼 겹쳐진다

바람에 삭은 어깨 사나운 햇빛에 찔린 옆구리

장마에 탈진한 호흡들

서로 엉켜 이명처럼 잦아드는 소리에 뒤척이며

순서를 기다린다

여자는 헐거워진 몸을 만져보고 불빛에 비춰보고

숨어 있는 틈을 찾아낸다

휘어진 뼈를 세우고 새 살을 채워 넣는다

전신을 허물어 새로운 체형을 만들기도 한다

좁은 길처럼 나 있는 곡선의 솔기가 미어지지 않게

촘촘한 박음질로 고정시킨다

수선을 끝낸 것들 등뼈를 곧게 세우고 거울 앞에 선다

총총히 사라진다


사람들은 조용히 낡은 옷을 놓고 간다

온갖 낡은 것들의 어둠침침한 집은

세상의 시선 밖에서 분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