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명대사 모음
벤자민이 일곱 살 때쯤 세상을 궁금해 하는 벤자민에게 “너와 내가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을 뿐... 결국은 끝은 같단다... 내가 비밀 하나 알려 줄까 뚱뚱하던... 깡마르던... 키가 크던... 백인이던...각자 자기의 길을 가는 거란다 그런데 그 길은 말도 못하게 무섭지“ 발레교습소에서 베자민이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데이시의 독백 “결국 죽는 건 똑같지... 죽음에 이르는 길이 다를 뿐이지...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벤자민)에 대해 “영원한 것도 있어” 벤자민이 딸에게 남긴 편지중 “가치있는 것을 하는데 있어서...늦었다는 건 없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데 ... 시간의 제약은 없단다. 넌 변할 수 있고 같은 곳에 머물 수도 있지... 규칙은 없는거니까 최고로 잘 할 수도 있고 최고로 못 할 수도 있지 난 네가 최고로 잘 하기를 바란단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갖기를 바란단다“ 중간 중간의 벤자민의 나래이션 “누군가는 강가에 앉는 것을 위해 태어난다 누군가는 예술가이고... 누군가는 수영을 하고... 누군가는 단추를 잘 알고... 누군가는 셰익스피어를 잘 알고... 누군가는 어머니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춤을 잘 춘다“
시간은 공간이다 1.시간은 역류한다
매 순간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1초, 1초가 쌓여 하루가 되고, 한 달 한 해가 되며, 우리 각자의 한 평생이 됩니다. 한 마디로 인생이란 시간이요, 시간이 곧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시간에 대해 더 깊고 정확한 이해가 요구됩니다. 시간을 바르게 이해하는 자가 자기 생명, 즉 자기 인생을 바르게 구축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시간을 유수, 다시 말해서 흐르는 강물에 비유합니다.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의 순으로 흘러간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이런 인식은 부지중에 시간이 인간의 의지 밖에 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강물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흐릅니다. 내가 멈추기를 바랄 때도 강물은 흐르기 마련이고, 돌아가기 원할 때에도 제 갈 길을 따라 흘러갈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유수에 비유되는 시간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시간은 내 의지를 좇아 멈추거나 속도를 조절해 주지 않습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밤과 낮은 흐르고 계절은 바뀝니다.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백발은 돋으며, 내 의사를 아랑곳하지 않고 이마엔 깊은 주름이 팹니다. 이런 관점에서 시간을 유수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해 보입니다.
그러나 《고백록》저자로 알려진 아우구스티누스는 정반대의 시간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시작된 시간이 현재를 향해 다가왔다가 과거로 역류한다는 인식이었습니다. 이처럼 시간의 역류를 믿는 자는 시간을 유수로 간주하는 자보다 휠씬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유수 앞에서는 사람들이 구경꾼이나 방관자가 되기 쉽습니다. 강둑에 앉아 무심코 강물을 바라보거나 시를 읊을 수도 있고, 강 위에서 뱃놀이를 즐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근처의 둑이 터져 집채 같은 강물이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아, 강물이 덮쳐 오는구나’ 하며 그 상황을 느긋하게 감상하거나 방관하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그 물살을 뚫고 나가든지 아니면 피해 달아나든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입니다. 동일한 이치로 시간의 역류를 믿는 자 역시 자신을 향해 정면으로 밀려드는 시간 앞에서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입니다.
또한 시간이 미래에서 과거로 역류한다는 인식은 시간이 유수처럼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간다는 인식에 비해 더 사려 깊은 삶을 가능케 하는 장점도 지니고 있습니다.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 간다는 시간관을 지닌 자들 중에 자신의 미래에 남다른 가진 자는 자기 꿈과 비전을 미래에 투사, 자신이 소망하는 미래의 자기 모습을 그려냅니다. 그리고 그 미래의 모습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현재의 시간 속에서 부단한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그 미래의 모습이란 자신이 꿈꾸는 허사일 뿐 자신의 실상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런 자를 장래성이 있다고 평하지만, 실은 허상에 불과한 허구의 섦을 좇느라 인생을 허비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요행히 자신이 그린 미래의 모습과 자신으 일치시키는 데 성공한 자라할지라도, 과거에 그가 미래를 향해 투사했던 꿈과 비젼의 뿌리가 대부분 욕망이거나 야망인 탓에, 그가 가시적인 업적을 이루면 이룰수록 그의 인생은 더욱 허망하게 끝나기가 쉽습니다. 본래 욕망이란 것 자체가 물거품처럼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욕망에 사로잡혀 미래를 향해 치열하게 내달린 사람일수록, 죽음 앞에서 자기 생에 대해 더 회한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미래에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역류한다는 시간관을 지닌 자는 현재의 시점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바라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그때 조금 더 열심히 할 걸, 그 때 최선을 다할 걸, 하며 이미 지난 과거를 아쉬워합니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미래의 어느 날 후회할 과거가 된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그 결과 일평생 지난 시간을 후회만하다가 인생의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의 역류관을 지닌 자는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자신을 관조하면서 미래에 후회하지 않을 현재의 자신, 즉 허상이 아닌 현재의 자기 실체를 곧추 세우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시간의 역류를 믿는 자는 시간을 유수로 여기는 자에 비해 더 사려 깊게 살 수 있습니다. 2.시간을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변할 뿐 시간의 역류관과 유수관 사이에 이와 같은 뚜렷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간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유수처럼 흘러가든, 혹은 미래에서 과거로 역류하든, 단지 흐름의 방향만 틀릴 뿐 시간이 움직인다는 데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는 방향으로든 시간 자체가 움직인다는 인식 속엔 하나의 대전제가 이미 깔려 있습니다. 즉, 흐르고 움직이는 시간이 늘 변하는데 반해 그 시간을 맞는 우리는 불변한다는 전제입니다. 앞으로 흐르든 거꾸로 역류하든 움직이는 것은 강이요, 강둑에 서서 그 강을 바라보는 나는 멈추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진정 올바른 인식이겠습니까? 흐르고, 움직이고, 변하는 것이 시간이요, 그 시간을 맞는 우리는 과연 불변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흐르고 변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자신입니다.
지금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애초에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시간이란 인간의 편의에 따라 인간이 만든 것으로, 그 기준은 만물이 변하는 속도입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번 공전하는 변화의 속도를 1년, 지구가 자전하는 변화의 속도를 하루, 하루의 변화 속도를 24시간, 1시간의 변화 속도를 60분, 그리고 1분의 변화 속도를 60초로 정한 것은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은 항상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고, 그 고정된 시간판 위에서 우리가 하루하루 변해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디지털 시계든 아날로그 시계든 시계를 들여다보면 지금도 초침이 1초 1초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움직이거나 변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그 1초 1초의 속도로 우리 자신이 지금 이 순간 변해 가고 있습니다. 1년의 시간이 흘렸다면 시간 자체가 변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1년의 길이만큼 더 변하고 쇠퇴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시간과 관련하여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시간이 흐르거나 역류한다는 인식 속에서는 스스로 움직이는 시간이 주체요, 그 시간의 변화를 제어할 수 없는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변하는 시간의 객체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시간의 객체에 불과한 우리는 시간의 흐름과 시류, 세상풍조에 떼밀려 살 수밖에 없습니다. 객체는 언제나 객체일 뿐, 어떤 경우에도 객체가 주체를 주도적으로 이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항상 불변이요, 고정된 시간판 위에서 우리 자신이 하루하루 변해 가는 것이 인생임을 자각하면 우리 자신이 곧 시간의 주체가 됩니다. 시간의 주체인 우리는 자발적으로 우리 변화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할 수 있고, 쇠퇴의 의미와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우리의 의지와 무관한 시간의 변화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시간과 관련하여 흐름과 변화의 주체를 시간 자체로 인식하는 자와 자기 자신으로 자각한 자, 다시 말해 시간의 객체로 살아가는 자와 스스로 시간의 주체가 된 자의 인생이 내용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고정된 시간판 위에서 우리 자신이 변하는 것이 인생임을 깨달은 자에게는 시간과 공간이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시간이 곧 공간이 됩니다. 우리가 말하는 시간이 실제로는 우리 자신의 변화 속도를 의미한다면, 그 변화의 구체적인 내용과 결과는 우리 각자의 공간을 통해 가시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를테면 생명이 시간이요, 시간은 곧 공간이기에, 생명과 공간 역시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생명, 시간, 공간은 셋이 아닌 하나입니다. 3.생명, 시간, 공간은 하나다. ≫ 콘크리트위의 벌레의 죽음 : 자신의 변화와 자신이 거하는 공간의 변화 ≫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 영화 -사랑의 블랙홀-을 통해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 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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