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차창룡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제사를 지내다보면
갑작스레 나는 과일에 관심을 갖는다
왜 대추와 밤과 배와 감을 필수적으로
제사상 맨 앞자리에 놓는가
생각해보니 이 제사상에서 과일만이 죽지 않았다
죽은 사람의 식탁에 산 생명이 앉아 있는 것이다
죽은 듯이 순응하는 대추의 씨앗은
잠시 쉬고 있을 뿐
대추나무 꽃은 반드시 열매를 맺고야 만다
꽃만 떨어지는 경우는 없으니
꽃같이 차려입은 색시에게 시어머니는
대추를 한움큼 집어던진다
애기 많이 낳고 잘 살그라이
땅 속에 밤을 묻어놓으면
땅 속의 씨밤은 생밤인 채로 뿌리에 달려 있다가
나무가 자라서 씨앗을 맺어야만 썩는다
사람이 자식을 다 키운 후
자식들이 혼인하여 애기를 낳을 때까지 살아 있듯이
이렇게 나는 아버지의 제사상 앞에서
과일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커다란 배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배는 과일 중의 과일이고
크고 수분이 많으며 영양도 풍부하다
과일의 왕을 제사상에 어찌 빠뜨리리
이런 궁색한 해석으로 넘어가면서
고욤나무에 감나무 가지를 끼우고 접을 붙이던
아버지를 생각한다
고욤나무에 접을 붙이면 그 나무는 커서 감나무가 된다
여자는 남자를 만나야 어른이 되고
남자는 여자를 만나야 어른이 되듯이
서로 만나 자식을 만들듯이
나무들은 과일을 만든단다
과일 속에는 씨가 있으니
자기가 먹지도 못하는 과일 속에 씨를 감추고
동물들도 먹을 수 없는 씨를 감추고
나무들은 동물들에게 먹어보라고 하지
부모가 다 키운 자식을 세상에 내놓듯이
나는 죽은 아버지를 이미 오래전에 버리고는
살아 있는 과일들에게 넙죽 절을 했다
시집 .... 벼랑 위의 사랑 (민음사 )
올해로 등단22년을 맞는 중견 시인차창룡의 다섯 번째 시집 "벼랑 위의 사랑 "
이번 시집은 시인이 승가에 귀의하기 전에 정리한 속세에서의 마지막 시집이다.
그는 지난3월13일, “끊임없이 길을 갈 것이고, 길에서 꿈을 펼칠 것이며,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하겠다.”라고 출가의 소회를 밝힌 후 해인사에서 행자 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앞으로1년가량 행자 생활을 거쳐 조계종 강원이나 승가대학에서4년 동안 교육을 받은 후
비구계를 받아 정식 스님이 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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