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일로부터 사십일 째 되는 날 목요일을 교회는 주님의 승천을 기억하는 승천일로 지킵니다. (올해는 6월 2일) 주님의 승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좀 더 깊어져야 합니다. “믿어야 하지만 납득하기는 어려워” 결국 형식적으로 무덤덤히 지내고 마는 수준을 벗어나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후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신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과 교회가 말하는 ‘하늘(Heaven)’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창공(Sky) 곧 대기권이나 우주공간이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기도할 때의 그 ‘하늘’ 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승천은 예수님의 몸이 하늘 공간 어딘가로 가셨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 예수님께서 이제 그리스도로서 하느님의 차원으로 높아지셨다는 의미입니다. 승천(昇天)은 승귀(昇貴) 또는 즉위(卽位)를 뜻합니다. 사도신경은 이를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 편에 앉아계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다시 오시리라”고 표현합니다.
주님의 승천은 그 자체 별도의 기적 사건이 아니라, 전체 구원사건의 초점을 잡아주는 신앙의 사건입니다. 무엇보다 승천은 예수님의 부활이 단지 몸의 소생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생명으로 변화되신 것임을 확증해줍니다. 주님이 우리의 그리스도이심을 삶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비록 부활하신 몸일지라도 예수님의 가시적인 모습들에만 집착하는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다스림이 우리 내면과 우리의 삶과 세계 속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 곧 이 땅위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실 임금으로 높여지셨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승천사건을 믿는 일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육신적 삶이 형통하는 일이 아니고, 개인의 영혼이 천국입성의 자격을 얻는 일도 아닙니다. 참된 구원은 주님의 영적인 다스림을 통해서 영적으로 변화되고 그렇게 변화된 영으로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러한 영적 성숙을 위해서는 육신의 주님을 떠나 주님의 부재(不在) 가운데 성령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래야 “아니 계신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곳에 계시고,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주님을 영적으로 깨닫고 볼 수 있게 됩니다. 승천사건은 이 깊은 깨우침, 영적인 눈뜸의 열쇠인 것입니다. *
주님 승천이 주는 우리의 기쁨
교회는 예수님께서 구름에 둘러싸여 하늘로 오르신 것을 큰 축일로 정하여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분께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이유는 무엇일지, 그리고 교회는 왜 오늘을 홍보 주일로 정했을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다가 죽어 하늘나라에 가면 그곳에서도 우리의 주님이 되어주시기 위해서, 최후의 심판 때 우리 편이 되어주시기 위해서, 하늘나라에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궁금증은 사라졌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는 모습을 묵상하면서 그 궁금증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저 인간들에게 참 기쁨과 행복을 주고 싶습니다. 그러하오니 제가 그들을 위해 무엇이든 할 힘을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겠습니다”라고 청하시는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그래, 아들아. 참으로 네가 인간을 사랑하는구나. 너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했던 그들을 위해서, 내가 가진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을 가지고 이미 하늘나라에 있는 이들과 아직 지상에 있는 이들을 다스리도록 하여라.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기 때문에, 잘하리라 믿는다. 나는 좀 쉬겠다”라고 응답하시는 모습을 묵상하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승천이 기뻤던 또 다른 이유는, 내가 그분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나를 바라보시고 마음을 다해 애쓰시는 예수님,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나를 위해 봉사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니, 큰 행복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겠다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좋으신 예수님께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고 나에게 주신 사명에 충실하고자하는 마음이 더욱 커졌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이런 사랑을 나누어 많은 이가 체험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야 함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고, 교회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그 도구(매개체)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며칠 전 수업시간에 신학생들과 ‘매스 미디어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하면서, 요즘 매스 미디어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잘못 활용되고 이용되는 부분의 정화를 위해 기도하고 세례를 베풀어야 함을, 매스 미디어의 문제를 넘어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하느님 나라 확장을 위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함을, 그리고 이에 종사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함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어떤 학생이 ‘예수님은 참다운 매스 미디어 자체이시다’라는 말을 꺼냈고, 이어서 다른 학생들이 ‘예수님은 하느님을 보여주시는 TV이시다’‘예수님은 기꺼이 전파(電波)가 되셨다’ ‘예수님은 성령의 전파를 보내시는 분이시다’ 등의 이야기를 나누며 분위기가 고조됐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전하고 나누는 또 다른 ‘매스 미디어’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늘과 땅을 왔다 갔다하시는 예수님께 감동을 받습니다. 하느님이시면서도, 자신의 모습이나 자존심, 명성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오직 우리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신 예수님, 정말 멋쟁이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물’[水]에 비유해봅니다. 담긴 그릇에 따라 모양이 변하는 물처럼, 우리를 한없이 유연하게 대하시고 우리 상황에 맞게 가르치시는 예수님.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삶에 그늘지고 힘들어하는 이들을 찾아오시는 예수님. 목마른 사슴에게 갈증을 풀어주는 물처럼, 지쳐 있는 이들에게 기쁨이 되어 주시는 예수님. 거침없이 용틀임하며 바위를 부수고 산을 넘어뜨리는 바닷물처럼, 불의에 항거하시는 예수님. 숨어서 온갖 식물을 성장시키고 열매 맺게 하는 물처럼, 우리 모두를 하느님 아버지께 이끄시는 예수님. 서로 엉겨서 드넓은 바다를 향해가는 물처럼, 우리 모두를 하느님 아버지께 이끄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께서 오늘은 우리를 위해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이 사실을 어찌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뻐 손뼉을 치고 환호하며 나팔소리 울려 이 사실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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