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신자 교리방

에수님의 부활

주혜1 2011. 7. 7. 14:59

부활성야란 오랜 교회의 관습에 따라 주님의 지나가심, 즉 죽음의 삶을 끊고 참 삶으로 지나가심을 기억하는 밤이며 당신 백성을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구출해 내신 주님의 자비로운 지나가심을 기억하는 밤입니다.  즉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는 부활로 건너가게 하신 크나큰 사랑을 기억하는 밤입니다.

그래서 이 예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앞날을 밝혀주시고 희망으로 이끌어 주시는 비추어 주신다는 제 1부 빛의 예식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인간 역사에서 살펴보는 제 2부 말씀의 전례, 그리고 제 3부로 새로이 그리스도교 신자로 입교하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세례식과 이미 세례를 받은 이들이 세례의 다짐을 확인하는 성세서원 갱신 예절, 마지막으로 제 4부 성찬의 전례로 이어집니다.

 

도 입

 ◐ 시작기도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수난과 죽음을 당하게 하시고 마침내 부활로 이끄시어 우리에게 무한한 희망을 불어 넣어 주시는 하느님, 당신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여기 당신을 더욱 가까이 하고자 하는 예비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하고 당신의 사랑을 깨달아 이제 세상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여 당신을 찬미하고 있나이다.  이제 이 예비자들이 예수님의 생애를 배워 알고 생활로 증거하여 온 세상에 당신의 구원의 뜻을 전하려 하오니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도우시고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 성가;  가톨릭 성가 134번 (거룩하다 부활이여)

◐ 부활의 신비를 나타내는 자연의 표징 등을 소개. 

 

한 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강생하시어 당신의 말씀과 기적으로 참된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화를 이루기 위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외치시다 당시의 권력자들의 위기감과 백성의 무지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음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지난 봄날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문득 창밖을 바라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전날까지만 하더라도 갸날픈 가지만을 축 늘이던 나뭇가지에 새싹이 돋고, 꽃망울이 막 터질듯이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습니다.  사실 그 전날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봄이라는 것을 전혀 실감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에는 사람들에게 봄이 온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됩니다.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옵니다.

그리고 겨울이 꽉 차면 봄이 옵니다.

 

부모에게 마냥 귀여움만 받고 자라던 아이가 어언 2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나면 결혼을 하여 이제 그들도 아이들을 두고 부모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변신이 단순히 이름만 바뀐 것일까요?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밤은 밤의 특성이 있고, 예를 들면 어둡다든지 사람들이 쉰다든지 물건이 바깥에 드러나지 않는다든지, 낮은 낮의 특성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환히 드러나는 특성 말입니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는 다 나름대로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연계에서는 하나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돈다는 것,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나름대로 하나의 법칙을 가지고 알맞게 순환하는 것입니다.  비가 오고 물이 모여 내를 이루고 내가 모여 강이 되고 강이 모여 바다가 되고 넓은 바다에서 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구름이 무게가 되면 비로 다시 떨어집니다.  또 생태계라는 것, 먹이사슬이라는 것만 보아도 나름대로의 법칙을 가지고 순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어떻습니까?  세상을 살면서 모진 고행을 다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기도 하면서 삶을 다하였을 때 그 껍데기는 비록 땅에 뿌려져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인격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장막에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밥을 먹어야 했고 잠을 주무셔야 했으며 고통을 느끼시고 기쁨과 슬픔을 가지며 마침내 죽음도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것도 참혹한 고통의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해야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좀 특별한 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으로 인류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신 것입니다.  바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최초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법칙이 아니라 더 큰 우주의 법칙을 따르신 것입니다.

 

전 개

 

 하느님이신 예수님, 그리고 인간을 사랑하시어 인간의 고통을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고 함께 고통을 당하시려 인간 세계에 오신 분, 이제 그 예수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1) 묵시문학에서의 부활의 의미

 

예수께서 세상에 살아 계시기 약 200년 전부터 발전해 온 유다교 문학의 하나로 '묵시문학'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러가지 천체의 상징을 사용해서 말하는 특별한 문학인데 이 묵시문학 중에는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내용이 여러번 나옵니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세상의 종말에 모든 의인들이 하느님에 의해서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상은 당시의 유다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사상으로 예수의 제자들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예로 구약의 묵시문학인 마카베오 하권 7장에서 일곱 형제들을 둔 어머니와 그 형제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그 영토가 네개로 분활되는데 그 중 하나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영토로 유다는 그 영토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안티오쿠스왕은 유다인들에게 그들의 전통을 떨쳐 버리고 헬레니즘화 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 중 하나가 유다 율법에 금지되어 있는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덥석 먹어 버렸겠지만 그 당시에 유다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을 포기하고 이교의 신에게 복종하는 의미였습니다.  이에 일곱형제들은 하나같이 처참한 고문과 모진 형벌을 당하면서도 왕에게 "너는 우리를 죽여서 이 세상에서 살지 못하게 하지만 이 우주의 왕께서는 당신의 율법을 위해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라고 자신있게 부활을 믿고 죽어갑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일곱 형제의 어머니도 마침내 부활을 희망하며 죽어갑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설명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자기의 지금까지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이 경험을 어떻게든 표현하려고 생각하였고 결국 자신들이 친숙해 온 유다교의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원래 유다교에 있어서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개념은 세상의 종말에 나타나는 것인데 예수님께 있어서는 이 종말이 선취된 즉 먼저 얻게 된 것입니다.

 

2) 부활을 가능케 하는 죽음

 

어느 가정이든지 죽음을 경험해 보지 않은 가정은 없을 것입니다.  죽음은 슬픈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구슬픈 통곡이 있고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그냥 대충 지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불길한 것으로 똑바로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인간의 죽음은 반드시 오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사람이 흙으로부터 와서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인류는 아득한 옛날부터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을, 부활을 염원해 왔습니다.  그래서 언제가 죽은 이가 되살아 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시신을 곱게 싸서 매장해 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끝이라고 종국이라고 생각하는 이 죽음을 뛰어넘는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있어서도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부활이 있기 위해서는 죽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쉽게 볼 수 있듯이 꽃이 피고 꽃이 지면 그 씨가 땅에 묻혀서 다음 해 봄이면 다시 새싹이 돋게 하고 꽃이 피듯이 말입니다.  새벽이 오려면 밤이 있어야 하고 부활이 있으려면 죽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을 흔히 고통의 바다, 고해라고 합니다.  삶의 온갖 고통과 괴로움, 정신적 육체적 아픔, 슬픔과 그리고 어려움으로 가득차 있는 세상이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고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인간을 사랑하시어 마침내 이 고통의 바다에 뛰어드셨습니다.  고해의 끝은 죽음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고통의 바다에서 숨을 몰아쉬며 허적거립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깊은 심해에 빠져 숨을 그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 고통의 바다에 뛰어드시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인간들에게 죽음이 끝이 아님을, 우리의 세상이 고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시고 우리들을 생명의 세계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3) 한알의 밀알이 썩음의 의미

 

씨앗이 땅에 떨어져 자신의 몸을 발효시킴으로써 그 열과 양분으로 씨앗의 눈이 자라나 새싹이 되고 줄기가 자라고 잎이 돋으며 꽃이 피는 것은 우리가 언제라도 확인할 수 있는 자연의 섭리입니다.  또 우리는 흔히 자신을 던져 여러 사람을 구하고 자신은 결국 죽고 만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화제로 올리곤 합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을 가르켜 세상을 지탱해 주는 뿌리며 세상의 꽃을 피우기 위해 썩는 밀알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또 하나의 세상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제한된 세계가 아니라 그야말로 영원한 세계에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생전의 예수를 뵙고 또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남으로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죄와 죽음의 세력이 지배했던 세계가 이제는 하느님의 영광에 의해 변화하는 세계의 모습을 잠시나마 보게 된 것입니다.  그토록 인간을 사랑하신 분이 맥없이 돌아가셨음을 체험하고 좌절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와 만남으로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 충실한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과 설령 인간의 눈에는 처절한 죽음이요, 참담한 실패로 보이는 것이 하느님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세상의 창조이심을 새롭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참으로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은 사람이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형제들을 사랑했느냐 하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은 예수의 일생을 바친 봉헌, 더구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기를 썩힌 예수의 사랑을 받아들이시고 그치신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는 것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앙입니다.

 

4) 새 아담으로서의 예수

 

여러분 모두 이미 창세기의 인간의 창조를 배우셨습니다.  창세기에서 최초로 인간이 된 원조는 아담입니다.  아담은 최초의 정리된 상태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됨으로 혼돈을 야기한 즉 죄와 죽음의 세력에 이 세상을 속박되게 한 장본인이었습니다.  이 아담에 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질서와, 정리된 상태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천지창조가 가능하게 하신 분으로 교회는 예수를 첫 사람, 부활한 사람, 새 아담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천지창조는 하느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이후에 마치 밧데리를 넣은 시계처럼, 태엽을 감은 장난감 인형처럼 자동적으로 움직여 가는 세상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세계의 존재 자체를 유지하는 분으로 만일 그 일을 그만두신다고 하면 그 순간에 세계는 존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지창조는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의 종말에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의 종말은 파국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천지창조의 완성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 이 종말에 있어서의 천지창조의 완성이 이제 역사 속에서 시작하는 것이며 예수부활은 하느님의 새로운 천지창조의 역사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새 세상의 시작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마치 순례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목마름과 지침의 괴로움에 있을 때 앞장서 간 한 사람이 물을 발견하고 그 물 맛을 보고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하느님의 창조의 완성이 지금 여기서 선취, 즉 후에 올 것을 미리 알리고 그 훌륭함을 보증하고 희망을 주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천지창조의 첫 사람, 새로운 질서와 희망의 시작으로서 새 아담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부활을 시체가 관을 부수고 나타나는 괴기영화의 한 장면으로 이해해서는 그 근본적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고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통하여 그 영광 중에 드러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바로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구원의 새 생명의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주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 합

 

이제까지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그리고 그 부활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사건인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그리스도교의 신앙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고통을 받으며 죽었을 때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고 아무도 남지 않았으며 다만 역사의 한 페이지 정도에 당시의 예수의 행적이나 적혀져 있으면 다행이고 그나마도 의문시되었을 것입니다.

전 생애를 통해 하느님을 충실히 따랐던 예수께서 이렇게 비참하게 처형된 자 제자들은 크게 실망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사람이며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지없이 패배의 쓴 잔을 마시고 죽었다고 그들은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이런 사람과 자신들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도망하였고 패배의 쓴 잔을 마신 예수의 제자라는 것이 부끄럽고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두려워 가만히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체험을 하게 되고 이 체험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제일 먼저 교회를 이룬 사도들은 우선 첫째로 예수의 부활의 증인들이고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 그들의 첫째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이 사도들의 이야기를 듣고 세례를 받을 것인지의 여부나, 그리스도인이 되어 교회에 입교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부활을 믿느냐?  안 믿느냐? 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는 그리스도교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교의 신앙이란 바로 부활신앙인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앙에서 교회가 생기고 또 교회 안에서 신약성서가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성서는 그 전체가 바로 예수 부활의 증언서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든 것은 바로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로마총독에게 나타나셨다거나 대사제나 당시의 떵떵거리던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당신을 믿고 따르던 사람에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과 함께 계시려고 세상에 오시어 고난을 당하시고 마침내 부활하신 것입니다.

 

심 화

 

1) 아버지 하느님의 자기 계시

 

 막달라 마리아도 그 밖의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도 예수를 만나서 이해한 것이 무엇일까요?  이는 예수의 부활이라는 사건이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전 생애를 바쳐 전파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의 중심적인 메시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상을 생각하시고 가장 중요한 것을 헤아려 주시는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사건은 실은 이 예수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서 나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그리고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최대의 사랑을 보여 주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은 죄의 세력에 얽매여 그 죽음의 가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영원히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져 하느님의 생명을 받을 그릇으로서의 자기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 죽음의 두려움을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이 도구로 삼으시어 인간과 함께 하시고 이 고통을 극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2) 예수의 주님으로서의 계시

 

두번째 의미는 예수의 부활이 우리의 주님이고 이 예수를 통해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계시하십니다.  예수의 부활은 모든 죽은 자의 부활의 시작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의 보증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와 결합됨으로써 아버지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고 이 예수와 함께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할 수 있는 보증을 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대행하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와 결합됨으로써 하느님과 결합되는데 이것이 '예수는 주님이시다' 는 신앙선언의 의미입니다.

 

3) 우리 구원의 계시

 

   세번째 의미로 예수의 부활은 우리의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가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행복이라는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천지창조때 인간 편에서는 사랑만이 참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이 밝혀지며 이때에는 지금 눈부시고 화려하게 보이는 것들도 이것이 사랑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아무리 비참하고 추하다 할지라도 사랑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하느님에 의해서 변용되고 하느님의 영광 속에 빛을 발하고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이며 이것이 예수의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밝혀진 진정한 구원의 의미입니다.

 

 실 천

지금까지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여러 의미를 즉 하느님의 자기 계시,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표지, 또 가장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의지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세상에서 부활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 자신의 부활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한 가지 숙제를 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16절지 종이에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에 대하여, 그리고 이 상황에 처하게 된 원인과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그리스도를 믿으려는 사람으로 부활을 생활로 이끌 것인가?  이렇게 세가지 난을 작성하여 각자의 의견을 적어 다음 교리시간까지 제출하여 주십시요.  중요한 것은 이 작업이 나와 깊은 연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의 얘기나 책에서 감명깊게 읽은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일 때 우리는 부활의 의미를 더욱 더 충실하게 알아듣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

원인

부활로 이끄는 방안

기타

 

 

 

 

 

 

 

 

 

끝기도

 

고린토 전서 15장 14-18절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는 우리는 결국 하느님을 거스리는 거짓 증언이 되는 셈입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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