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기도
부족한 인간에게 끊임없이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 오늘도 당신의 그 징표를 잘 알아보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저희에게 배운 바를 믿게 하시어 척박한 이 세상에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게 하시고,어려움 중에 있는 우리 이웃에게 열린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도록 은총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도 입
어느 전철 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무엇인가에 열중하는 사람들 사이로 또렷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종말이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여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십시오...." 여러분들도 많이 들었던 소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한 번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칸을 왕복하며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어떤 중년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여보시요 조용히 좀 하시오,너무 시끄럽지 않소." 이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그 선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분 회개하십시오, 왜 하나님의 말씀을 방해합니까" 전철 안은 그만 한바탕 웃음으로 가득찼습니다. 이외에도 우리는 종말을 강조하며 가가호호를 방문하는 여러 전도자들을 만난 경험이 있습니다.또 요즘 사이비 종교에 빠져 다 버리고 가출까지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접합니다. 종말이 과연 무엇이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고 집을 뛰쳐나가게 할까요?
흔히 종말은 모든 것의 끝장이며 비참한 최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는 종말을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차원이 있는데 하느님 나라는 각 개인의 종말로서 죽음과 심판입니다. 또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종말입니다. 오늘은 지금까지 배운 것을 바탕으로 하느님 나라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나라'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시작되었고 그 분이 다시 오실 때(재림) 완성됩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알아봅시다.
전 개
1. 그리스도의 재림
역사학자 E.H 카아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이유는 역사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배우며 그 위에 현재를 건설해 갑니다. 인류의 역사는 지금까지 보다 올바르고 보다 행복하기 위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발전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는 인간만의 역사가 아닙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간섭이 담겨져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온갖 죄와 압제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시는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실현된 場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역사라고 합니다. 이 구원의 역사가 크게 고양되었던 정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이런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사도 1, 10-1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쌓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자에게 그 행한대로 갚아 줄 것이다."(마태16:17) 예수님은 종말 때에 다시 오셔서 선과 악이 뒤섞여있는 현대의 역사를 끝내시고 새로운 역사의 場을 여실 것입니다. 즉 재판관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악이 결정적으로 파괴되고 정의가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하느님만이 아시며 "도둑처럼"(2베드로3:10) 생각 지 않을 때 닥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준비하며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세상의 종말(완성)과 하느님 나라
그럼 예수님의 다시 오심으로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일까요?
여러분은 비장하게 한 생을 살다간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요한을 아실 것입니다. 그 요한의 설교를 상기해 봅시다.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하고 선포하였다." (마태 3,1) 이 설교의 핵심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하신 행적과 말씀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이었습니다. 그 분은 마귀가 들린 병자를 고쳐주신 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있는 것이다"(마태12,18) 또 그분은 여러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마태13장).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누룩,보물과 진주에 비유했습니다. 즉 하느님 나라는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화될 때 즉 가난한자, 착취당하는 자, 억압받는 자에게 정의가 실현되기 시작할 때를 말합니다. 친교와 조화, 참여 그리고 모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경이 이루어질 때 하느님 나라는 그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이 세계 속에 현존하며 옛 것을 새 것으로, 불의를 정의로, 질병을 건강으로 변혁시키는 하느님의 능력과 권위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격속에서, 즉 그 분의 말과 실천 속에서 실현된 현재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그 분의 삶을 따르는 우리 가운데서 지금 이루어지는 것이며, 동시에 미래에 완성될 약속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때가 바로 종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하는 과정에 있으므로 우리는 종말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사람이 열심히 살아있으면서도 죽음을 향해 죽어가는 것과 비슷한 것이지요.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에 살면서 종말에 참여하는 삶을 '종말론적 삶'이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훌륭하게 변해가고 아름다운 것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것도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열심히 진실하게 살아 가려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에 대해 실망한 사람들, 착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독재자들, 악덕 기업주들, 점점 심각해지는 공해문제, 태어날 때부터 불구인 사람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며 이 세태에 항변한 여학생의 죽음 등, 죄에 찌들린 절름발이 세상을 보게 됩니다. 이 절름발이 세상이 성한 세상이 되는 것이 바로 종말입니다. 어떤 병자의 병만 고쳐지고 어떤 사람만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다 불만없이 사는 세상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의 성격이 잘 드러난 공동체를 초대교회의 모습 속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인간들 사이를 가로막고 분리시켜 온 사회적 장벽들이 철폐된, 성과 신분의 차이가 없는 평등한 공동체이었습니다.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에는 당시 사회에서 제외되거나 종교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소외된 사람들이 조건없이 수용되었습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이어내려 온 우리의 교회도 역시 지상에서 현존하는 종말론적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를 전하며, 모든 민족들 가운데 건설할 사명을 받음으로서 지상에 있어서 천국의 시작과 싹이 된 것이다. 교회는 서서히 자라면서 천국의 완성을 갈망한다」(교회헌장 5항).
따라서 무엇보다도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은 곧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 사이를 가로막아 분리시키고 불화와 부조리의 원인이 되는 집단적 이기주의 현상이 지양되고,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계층도 차별도 없는 공동체가 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례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면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바로 이 사명에로 불리운 것입니다. 종말은 예수님에 의해 시작되었고 교회를 통해 계속되어 온 하느님 나라, 세상 속에 작게 감춰진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때입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언제인지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주님, 주님께서 메시아 왕국을 세워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그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결정하셨으니 너희는 알 바가 아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사도 1,7)
성서에 요한 묵시록이 있는데 종말에 관해 말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책의 문자 그대로를 현실에 적용시켜 많은 오해를 낳고 있습니다. 이 책은 "묵시문학"이라는 문학유형인데 지극히 상징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언론통제가 너무 심해서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는 이교도들의 침략과 재난 그리고 종교박해로 말미암아 신앙의 위기가 다가왔던 때였습니다. 이 온갖 사악한 세력을 하느님께서 물리치시고 하느님이 직접 정의롭게 세상을 다스리리라는 기대와 희망이 이 책의 주된 내용입니다.
종합 심화
지금까지 종말과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종말은 모든 것이 끝장 나는 최후가 아니며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종말은 이세상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현대세계를 보십시오. 자기들의 이념과 사상을 고집하고 더 나아가 다른 나라에 강요하며 이를 위해 전쟁을 불사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필요, 또 충족을 위해 서슴없이 다른 사람을 도구로 삼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것은 자연을 파괴시키고 지구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과 함께 가장 커다란 사회적 죄악입니다. 종말에는 이런 대립과 갈등이 사라지고 불공평한 현세의 질서가 하느님의 정의로 재편되어 완성되는 것입니다. 주의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세상 그것이 종말이며 완성입니다.
전철이며 여러 동네를 돌아다니며 종말과 회개를 외치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젠 이해가 가시는지요. 그런데 그들에게서는 종말에 있을 완성보다 징벌과 심판을 강조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매우 소극적인 태도입니다. 살아가면서 정당하지 못한 처사, 강요된 가난등 불이익을 당할 때, 종말 혹은 내세에는 복을 받겠지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이것도 소극적인 태도입니다. 종말은 조화로운 완성입니다. 종말의 의미를 잘 깨닫고 현세의 삶을 충실하고 진실하게 살다보면 종말을 맞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그 징벌을 피하려는 자세보다 예수님도 한 생을 살다 가신 이 세상의 삶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종말 때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는 분명히 이 세상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는데 참여할 때 종말의 일부를 맛보게 되고 또 종말(완성)을 만들어 가는데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종말론적인 삶의 핵심은 '희망'입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확신과 그 나라에 대한 희망이 우리를 모든 불의와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 남게 합니다. 절망과 좌절을 딛고 작지만 차근차근 나부터 정의와 사랑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저의 중학교 동창생 중에 대학 1년때 학생운동을 하다가 강제징집을 당해 군대에 간 후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채 죽은 친구 1명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보통의 개신교 신자였는데 외아들인 아들이 죽자 거의 광신적인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강한 절망과 체념, 억울함 등이 복합된 신앙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가정을 돌보지 않기 시작했고 동창생보다 3살 아래인 큰딸을 학대하기 시작했으며 몇년 후 딸은 불치의 병이라는 전신 류마치스에 걸려 약혼도 파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몸이 아프고 애인에게도 버림받은 그 여동생은 그야말로 삶의 큰시련에 봉착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잘못된 신앙에서 비롯된 하느님의 시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88년봄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보편화되면서 군대에서 규명되지 않거나 의혹스런 죽음을 당한 대학생들의 가족들이 사인을 규명하자는 모임을 만들었고 그 어머니는 그 모임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의심조차 품기 힘든 아들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활기차게 규명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정에 애착을 쏟게 되었고 때문에 그 가정엔 잊혀졌던 평화가 되찾아 왔습니다. 그때쯤 놀랍게도 하루에 20알이 넘는 약을 먹던 그 여동생의 병세가 차츰 낫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다시 건강해진 모습으로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도 이젠 건강한 신앙생활과 가정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죽음은 이제 절망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희망과 의미로 변화되었습니다. 저는 이 과정을 보면서 절망은 죄악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크리스찬의 삶의 본질은 희망입니다. 그 친구의 어머니가 죽음과 종말에 대해 보다 올바르게 알고 신앙생활을 했더라면 그런 시련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종말을 믿고 희망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일이며 우리에게 닥친 어떤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응용 실천
지금까지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배운 바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어떻게 실천하며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올바로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스승 예수가 죽자 그들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들에게 부활한 주님이 나타나셨고, 또 오순절 날 사도들과 함께 성령을 받은 그들은 기쁨과 확신에 차 주님의 부활을 방방곡곡에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차이는 기도를 하느냐에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로 살수 있도록 기도할 때 성령은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쁨과 확신에 찬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신의 도우심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동창생의 어머니처럼 절망에 찬 사람에게 희망을 갖게 하고 어떤 시련도 이겨내게 합니다.
1.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누리는 지위나 명예등에 대해 오늘 배운 것을 기준으로 가치질서의 중요한 순서를 지워봅시다.
2. 절망했던 체험과 희망에 찼던 체험을 비교해 보고 앞으로 다시 그런 상황에 빠지게 될때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계획해 봅시다.
3. 현대세계 혹은 지금의 사회활동속에서 종말을 앞당기는데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는데)있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무엇인지 자기 처지에서 생각해 봅시다.
4. 육체와 영혼의 합일체인 자신의 완성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노력합시다. 특히 육체의 것에만 힘쓰지 말고 영혼의 양식을 갈망하고 채우는 노력을 합시다.
끝 기도
사랑이신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부족한 저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 어느 때라도 절망하지 않게 하시고, 배운 바대로 실천하여, 지금 여기서의 삶이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 하느님의 말씀
* 전에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
옥좌 앞은 유리바다 같았고 수정처럼 맑았습니다. 그리고 옥좌 한가운데와 그 둘레에는 앞 뒤에 눈이 가득 박힌 생물이 네 마리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첫째 생물은 사자와 같았고 둘째 생물은 날아 다니는 독수리와 같았습니다. 그 네 생물은 각각 날개를 여섯 개씩 가졌고, 그 몸에는 앞 뒤에 눈이 가득 박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시로다 !"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옥좌에 앉으시고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에게 그 생물들이 영광과 영예와 감사를 드리고 있을 때 스물 네 원로는 옥좌에 앉아 계신 그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에게 경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금관을 벗어서 옥좌 앞에 내놓으며, "주님이신 우리 하느님, 하느님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누리실 만한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만물이 주님의 뜻에 의해서 생겨났고 또 존재합니다". 하고 찬양했습니다』. [요한 묵시록 4,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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