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신자 교리방

신학적 인간학

주혜1 2011. 7. 23. 13:57

1. 나를 찾는 인간

종교박람회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나스룻딘이라는 이슬람교 스승이 나귀를 타고 마을 거리를 휘달리고 있었다.  그때 제자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어딜 가시는 길입니까 스승님?"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내 나귀를 찾고 있소" 하고 휙 지나가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또한 일찍이 임제라는 선사가 있었는데 자기 몸을 찾고 있었다.  이것을 제자들이 보고는 미쳐 깨닫지 못한 체 마냥 우스워했다고 한다.  나스룻딘과 임제선사는 무엇을 찾고 있었는가?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이 찾고 있던 것은 바로 내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2.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유명한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젊었을 때 일어났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제자인 카이혼이 하루는 신전에 가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고 신에게 물었다.  그러자 신은 "그런 사람은 없다"고 대답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전해 듣고 대단히 놀랐다.  그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오히려 신이 자기를 제일 지혜있는 사람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 이유를 알아볼 생각에서 그 이튿날부터 아테네에 있는 모든 유명한 학자와 정치가와 예술가를 방문하여 그들의 지혜로운 의견을 들으러 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각 방면에서 각기 지혜있는 체만 하고 있었을 뿐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신이 자기에게 제일 지혜가 많다고 한 것은 자기는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이유로 칭찬해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일화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보잘 것 없음을 말해준다.  차라리 자기 자신에 대해 무지를 고백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이다.

 

3. 칸트의 질문

과학과 기술 및 세속화한 현대 세계에서 중심적인 위치와 관심의 대상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현대인의 중심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공할 수 없다.  임마누엘 칸트는 근대 철학의 기본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식화하고 이에 대답하였다.   "내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그는 이 물음에 대해 순수이성비판을 가지고 대답하였다.  "내가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그는 순수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를 가지고 대답하였다.  "인간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의 세 질문은 마지막 질문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이 질문들은 모두 인간학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네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결국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도 말이다.

 

4. 인간학의 종류

이처럼 인간에 대한 물음은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세월동안 반복된 물음이며 오늘날도 인간 존재와 함께 제기되는 보편적 물음이다.  따라서 인간에 관한 물음은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새로운 관심을 가지고 나타났다.  인간에 대한 연구를 인간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현대에 와서 주로 다음의 세가지 의미로 쓰인다.  1) 물질적이고 신체적 측면에서 인간을 연구하는 신체적 인간학.  2) 인간의 역사적 기원이라는 관점에서 연구하는 민속 지리학적 문화적 인간학.  3) 인간의 궁극 원리를 찾는 관점에서 인간을 연구하는 인간학이다.

생물학적 인간학에서는 해부학적 인간학, 생리학적 인간학, 병리학적 인간학, 동물학적 인간학, 고생물학적 인간학, 정신적 인간학, 심리학적 인간학, 사회문화적 인간학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외에도 각종 철학적 인간학 및 종교적 인간학이 있다.  신학적 인간학은 하느님의 계시에 입각한 인간학의 한 분야이다.

 

전 개

 

1. 신학적 인간학의 전제

 

현대과학 문명의 놀라운 위력을 발휘케 한 장본인인 인간에게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신학적 인간학은 하느님의 현존을 확신하며 하느님을 인간의 존재와 의식과 행위의 원리로 받아들인다.  다음의 통찰들은 그 전제가 된다. "인간에 대해 말한다 함은 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불트만), "무신론자는 인간을 놓친다."(브라운), "하느님 없이는 인간은 수수께끼로 머문다."(사목헌장).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스스로 신을 부르짖는다.  "신을 믿지 말고 내 주먹을 믿어라" 하던 인간 만능주의자들도 그들에게 불가항력적인 문제가 일어날 때 행운을 빌어 달라고 하며 축복을 빌어 달라고 한다.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도 범죄 후에 느끼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괴로워 한다.  윤리질서를 파괴한 마음의 상처이다.  이것은 곧 인간을 창조한 분이 인간이 가야할 길을 주셨고 동시에 그 방법으로 소위 양심의 질서를 주셨기 때문이다.  흔히 "운명에 맡겨라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라고 한다.  이것은 결국 인간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절대 능력을 긍정하는 약한 인간의 부르짖음인 것이다.

 

2. 하느님을 찾는 인간

 

1) 질문작용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인간은 자기의 원의와는 상관없이 특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 살게 된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기와 만나게 되는 모든 것에 대해 물음을 제기한다.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인가?  또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외의 다른 생물들은 자신에 대해 묻지 않는 반면 인간의 자기에 대한 물음은 독특한 것이다.  인간은 이 물음 속에서 질문자이면서 동시에 질문을 받는 자이다.  인간은 질문자이면서 동시에 질문을 받는 자이므로 인간 스스로가 그 해답을 제공할 수 없다.

그런데 모든 물음은 모르기 때문에 물어지는 것이지만 묻는 대상을 전혀 모르고서는 물을 수조차 없다.  즉 물음에는 묻는 대상에 대해 일종의 사전지식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묻는 경우에 대해서도 마찮가지이다.  인간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하기 전에 우리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선험적 지식이다.  이 지식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인간은 물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지식을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일 수가 없다.  그것은 인간의 질문작용을 가능케 하는 의미에서 절대존재인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선험적 지식 속에 이미 하느님은 그 원리와 능력으로서 우리 안에 현존하고 계신다.  인간이 인간자신을 질문의 대상으로 삼고 인식하기 시작할 때 이미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 함께 주어진 것이다.  이와같이 인간에게는 하느님을 아는 근본적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이 처음부터 인간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2) 인간의 자유행위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오늘날 인간은 자유를 부르짖고 있다.  그리하여 신은 인간의 자유에 반대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무신론은 인간자유의 요구라고까지 한다.  그러나 반대로 신은 인간자유의 방해나 경쟁자가 아니라 오히려 기초요 보장이다.  즉 참된 자유는 인간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을 말해주는 표지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어떤 구상을 따라 산다.  그는 이 목적을 향해 사는데 이 목적은 다시 인간이 자유로이 성취하려는 여러 목적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인간이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 외의 것들은 포기하거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게 된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게 목적을 정하기는 하였지만 결국 그 목표의 노예가 되고 만다.  이와는 반대로 하느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유한한 목적에서 자유롭게 하고 인간을 해방시켜 준다.  하느님은 인간을 속박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자유롭게 해주고 그 자유를 완전하게 해준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를 생각할 때 하느님은 그 기초로서 반드시 긍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훌륭한 음악을 들을 때 그것에 매혹된다고 말한다.  또 유명한 강론을 들을 때 연사가 우리를 사로잡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꼼짝없이 그들에게 묶이면서도 참된 자유를 체험할 수 있다.  음악이나 연극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어떠한 것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군중들이 그 말씀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완전히 매혹되었고 완전한 자유를 체험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처럼 그리스도에게 속하는데서 즉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데서 완성된다. 이와같이 인간이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본래의 인간이 되게 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데서 가능하다. 여기에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의 자유가 있다.

 

3) 인간의 의미추구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대부분의 사람은 절망을 체험한다.  일생동안 수고하여 이루어 놓은 일이 순식간에 허사로 돌아갈 때가 있다.  평화를 위해 수고한 필생의 사업이 전쟁으로 깡그리 망쳐진다.  순식간에 몰아닥친 회오리 바람은 농장을 결딴내고, 가옥을 부수고, 가축을 죽이며, 수확을 망치고, 토지를 앗아간다.  인간은 이러한 무의미하고 부정적인 체험 앞에서 쉽게 절망한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사건을 초래하기까지 한다.  오늘날 많은 사회적 비리의 현실도 우리를 절망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실들 앞에서 그래서는 안되는데 하는 어떤 염원을 가지게 된다.  어떤 온전한 세상을 찾는 것이다.  어떤 환경에 맞추어진 짐승과는 달리 인간에게는 그러한 절망을 넘어서는 희망이 주어져 있다.  인간은 그러한 절망에도 의미가 있기를 추구한다.  이처럼 인간은 아무리 부정적인 체험을 거듭해도 다시 새로 출발할 용기를 갖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진다.  인간의 이러한 태도는 결코 인생의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새로운 근거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세계를 하나의 전체로서 포괄하고 규정하며 인간에게 다가오는, 따라서 인격적이며 의미를 부여하며 기초해 주는 하느님이라는 현실에 근거하는 것이다.

 

4) 인간의 체험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인간은 체험을 통해 성숙한다.  그리하여 노년은 지혜가 무르익은 때라고 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지혜로운 자는 겸손하다.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신학자의 한 분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만년에 이르러 문득 글쓰기를 그만두었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때 비서 수사가 그에게 쓰고 있던 저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못마땅해 했다.  그러자 그는 대답하기를 "형제여 몇 달 전에 전례를 거행하는 도중 난 하느님의 무엇인가를 몸소 겪었는데 그 날 그만 글쓰고 싶은 의욕이 싹가셔 버렸소.  사실 지금 나로서는 일찍이 내가 하느님에 관해 썼다는 게 죄다 북더기 같이만 여겨진다네" 하였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자기의 유한성을 아는 자이다.  인간의 체험은 결국 인간이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인간은 체험을 통해서 진실로 자신이 무지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유한성을 고백하면서 자신이 하느님께 매달려 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인간의 체험은 유한성의 체험이며 하느님을 향하고 있다.

 

종합 심화 : 하느님 안에서만 밝혀지는 인간의 의미

 

우리 인간은 하느님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제외하면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만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러한 능력이 있다.  인간의 상황자체가 하느님을 나타낸다.  이러한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절대적으로 보여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시며 참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는 별도로 인간자신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질문과 이해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하게 밝혀진다.  그것은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는 것이다.

제임스 B. 프랫은 인도의 신앙에서 어느 인도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인도인은 1857 - 8년에 벵갈 원주민이 일으킨 반란 때에 어느 군인에게 총검으로 찔릴 순간에 닥쳤다.  그때 그 인도인은 자기를 총검으로 찌르려는 그 군인을 향하여 "그대 역시 신성을 지니고 있소" 라고 말하였다.  이 말에는 숭고한 뜻이 숨어 있다.  누가 만일 우리에게 "너는 고기 덩어리에 불과해"라고 말한다면 우리의 기분은 어떨까?  "당신의 조상은 원숭이인가?" 라면 어떤 기분이 될까 ....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존엄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의 고귀한 품위를 거스르는 모든 행위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각 사람은 이웃을 한 사람도 예외없이 또 하나의 자신이라고 생각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이웃의 생활과 그 생활을 인간답게 영위하기에 필요한 수단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현대에 있어서는 우리 자신이 그 누구에게나 이웃이 되어 주고 누구를 만나든지 적극적으로 봉사할 의무가 있다.  예컨대 모든 삶에게 버림받은 노인, 불의하게 천대받는 외국인, 노동자, 피난민, 불법혼인에서 태어나 부모의 죄 때문에 탓없이 억울하게 고생하는 사생아, 우리 양심을 재촉하는 굶주린 사람, 이런 이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그들을 도와 줄 의무가 있다.  또 온갖 종류의 살인, 집단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적인 자살과 같이 생명자체를 거역하는 모든 행위와 상해, 육체와 정신의 고문, 심리적 탄압과 같이 인간의 완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와 인간이하의 생활조건, 불법감금, 유형, 노예화, 매춘, 부녀자와 연소자의 인신매매, 또는 노동자들이 자유와 책임을 가진 인간으로 취급되지 못하고 단순한 수익의 도구로 취급되는 노동의 악조건과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모든 행위, 그리고 이와 비슷한 다른 모든 행위는 실로 파렴치한 노릇이다.  그것은 인간문명을 손상시키는 행위이며 불의를 당하는 사람보다 불의를 자행하는 사람을 더럽히는 행위로써 창조주께 대한 극도의 모욕이다.

 

실 천 : 나는 인간을 어떻게 대했는가?

 

◑  반성의 시간 :  나는 이웃을 어떻게 대했는가?  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웃을 이용하지는 않았는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손상되고 있는 부분은 어디인가?  하느님의 모습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겠는가? 이상에 대해 생각해 보고 글로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