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신자 교리방

연옥, 지옥, 천국 , 심판

주혜1 2012. 7. 8. 07:09

그리스도교는 특히 죽음과 죽은 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은 종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산자들에 대한 관심 역시 많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오늘의 강의는 내용적으로 죽음 이후의 사건들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바로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여러분은 오늘의 시작 기도 때에 묵상한 마태오 복음을 통해서 잘 이해하였으리라 짐작합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에서 제외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젠가 우리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직시하기를 두려워 합니다.  이런 두려움은 실제적으로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하루 앞을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체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의 교리 내용은 바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전 개

 1. 천국

천국이란 죽은 이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한 때는 이 행복의 상태가 어떤 장소로 이해되기도 하였는데, 교회는 1950년에 성모님의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면서 장소적 개념에 대한 언급이 없이 그분은 천상 영광 안으로 들어 올려지셨다는 표현으로 천국을 설명하였습니다.  즉 천국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 신비체의 모든 구성원들과 성삼위의 일치를 통해 우리는 완전하고도 영원히 행복한 상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천국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라면 그것은 인간이 범죄로 인해 하느님과 함께 누리던 낙원에서 쫓겨났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여정의 종착지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두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그 첫째 단계는 죽음을 이기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이며, 둘째 단계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다섯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1) 행복

행복이란 현실적이고 감각적이거나 육체적 욕구의 만족만은 아닙니다.  참된 사랑의 체험을 통해 우리는 생명의 기쁨을 느끼고, 완성된 행복을 맛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은 모든 물질적, 육체적 만족을 초월한 전인적인 사랑이 완성된 상태인 것입니다.

 

2)  공동체

사랑은 만남과 나눔의 신비입니다.  즉, 고유한 각자의 개성을 조화시키고 공동체를 이루는 원동력인 것입니다.

 

3)  지복직관

인간만이 향유하는 행복은 깨달음입니다.  인간의 번민은 우주의 법칙과 생명의 원리를 깨달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깨달음이란 어떤 사실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폐쇄된 한 존재가 생명의 연관성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며, 진리를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 변화입니다.  완전한 깨달음은 생명의 근원이시며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을 온전히 뵈올 때에 이루어 집니다.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대하는 상태, 이것이 천국입니다.

 

4)  영원

완전한 행복이라면 그것은 시간이 흐름을 따라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21,4)"이라고 전해줍니다.  즉 천국은 아무런 걸림도 없는 영원한 기쁨의 상태입니다.

 

5)  육신의 부활

몸은 모든 생명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몸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따라서 몸이 죽고 썩어버릴 때 생명의 소멸을 연상하기가 쉽습니다.  또한 소멸되지 않은 생명은 육신의 부활로 표현됩니다.  천국이 완전한 자유상태라면 몸을 통한 존재방식이 갖는 공간적, 시간적 제약이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였을 때 그분의 몸은 여러 곳에서 동시에 출현하셨고(요한 21,1-14; 마르코 16,12-13; 마태오 28,16-20) 또 닫혀있는 문을 통과하여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다고(요한 20,19)성서는 증언합니다.

썩어 없어질 현세의 몸을 통해 존재하는 우리의 제한된 생명은 천국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은 자유롭고 영광스러운 육신을 통해 영원히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국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애벌레에게 나비가 될 소양과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듯이, 현세의 삶 속에는 이미 천국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져 있습니다.  애벌레의 삶이 곧 나비의 삶을 누리는 준비이듯, 현세의 삶은 천국을 얻는 준비이고 또한 천국의 행복은 현세의 삶 속에서 예고됩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을 겨자씨와 같은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루가 18,18-19)  우리는 현세에 살아있을 때에 선택의 자유를 갖습니다.  그 선택이 사랑을 향한 것인지 또는 사랑을 거슬린 것인지가 문제입니다.  겨자씨와 같은 작은 선택에서 천국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천국이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의 신비체로서 생활하는 우리들이 자신 안에서 꿈틀거리는 이기심과 밖에서 널름거리는 세파의 유혹에 지금 이 시간에 마주쳐서 결단하고 성취하는 승리의 상태입니다.

 

2. 지옥

지옥에서 사용하는 숟가락은 길이가 사람 키만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로 마주 앉아 자신의 숟가락으로 상대방에게 먹여주면 좋으련만,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만 먹으려 하기 때문에 서로 먹지 못하고 배고픔에 울부짖으며 거듭거듭 죽어간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지옥의 상태를 단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즉 이 비유는 이기심에 사로잡혀 자신을 철저히 폐쇄한 인간의 끝없는 고통을 묘사하면서 서로의 관계를 단절하여 생명의 실패 속으로 빠져든다는 경고를 전해줍니다.

 

1)  구약에서의 지옥표상

죽은 사람들은 생전에 선했거나 악했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땅 밑의 세계에 내려가서 살게 된다는 믿음이 거의 모든 구약시대에 걸쳐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을 침묵과 암흑과 망각의 세계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사흘동안 지내셨다는 고성소도 이런 사상을 반영합니다.

구약시대가 끝날 무렵에 와서는 죽은 이들은 생전의 선,악 행위에 따라 건널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두고 갈라지며, 하느님을 모독한 이들은 죽은 이들의 부활이전에 이미 불 속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믿어왔습니다.

 

2) 신약에서의 지옥표상

신약성서에서는 죽은 이들이 가는 곳은 Hades(마태 11,23)로 불렀고, 악한 이들이 벌받는 곳은 Gehenna(마태오 2,29)로 불렀으나, 우리 말로는 모두 지옥이라 번역합니다.

예수께서는 당대의 용어를 사용하시면서 통회하지 않은 죄인에 대해 강경한 경고를 내리셨습니다.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마태 3,12) 또는 "영원한 불"(마태 18,8)로 묘사되거나, "어두운 곳에 쫓겨나 땅을 치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곳"(마태 8,12)으로 가게 된다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인간의 호기심을 겨냥하여 지옥에 관한 정보를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복음을 선포하시며, 인간의 응답과 결단을 촉구하시기 위해 지옥의 무서운 가능성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지옥을 이해하려면 먼저 예수꼐서 선포하신 복음과 인간의 응답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3) 자유와 선택

구원이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재결합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의지를 수락함으로써 이루어 집니다.  따라서 지옥은 천국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 속에 이미 들어있는 논리라 볼 수 있습니다.  지옥은 하느님이 세상 종말에 가서 죄인들에게 화풀이하려고 준비해 둔 형벌이 아닙니다.  매 순간순간 인생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맞서는 인간의 허황된 교만과, 그분의 사랑을 거부하는 폐쇄가 끝까지 계속될 때 일어나는 완전한 파멸이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랑은 일치와 연대성의 힘이므로, 사랑 속에서 창조된 생명은 본질적으로 우주와 이웃과 하느님과의 연대 속에서 유지됩니다.  생명의 충만은 곧 연대성의 완성이며, 생명의 실패는 연대성의 파멸입니다.  그러므로 이기와 욕심으로 인한 고립은 우주 질서에 혼란을 일으켜 불화와 투쟁을 일삼아 질서와 평화를 잃어버린 생지옥을 만듭니다.  성서는 이 고립을 잔치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표현하며 고립의 결과를 어두움 속에서 통곡하는 것(마태 22,13)에 비유합니다.

 

   3. 연옥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 중에 죽었으나, 죄를 완전히 보속 하지 못했을 때 이러한 영혼은 하느님께 나가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연옥에서 씻는다고 교회는 전통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연옥의 근거

연옥이란 말과 교리가 성서에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연옥에 관한 믿음은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근거로 오랜 동안 지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즉 연옥에 대한 믿음은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성덕이 필요하고 용서 받은 죄에 대해서도 현세적 잠벌이 있다고 하는 교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부의 가르침과 교회의 관습에는 연옥에 대한 가르침이 명확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성인은, 죽은 자리에서 회개하여 보속의 시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후세에서 정화의 불로 성화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도 자신이 저술한 시편 주해서에서 죽은 후에 정화의 불을 당하지 않도록 현세에서 자신을 정화하여 주십사고 하느님께 청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연옥의 존재에 대해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2) 연옥 교리의 올바른 이해

성서에서 보면 인간이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을 엄청난 상황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몹시 두려워 떨며 감히 대하기 무서워하는 모습들은 인간이 본래 나약한 것으로 자신의 무능함, 부당함, 죄악성을 하느님 앞에서 깊이 깨닫게 된다는 것으로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과의 만남이 죄인에게는 무엇보다 두려운 심판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이미 작고하셨지만,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칼 라너( K. Rahner)는 연옥의 상황을 심리적 측면에서까지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삶 속에서 회개하더라도 여태까지 저지른 죄악과 그 결과는 간단히 없어지지 않고 자신의 태만과 과실로 영적 능력이 폐쇄되어 버렸기에 연옥의 시련을 면하기 위해서 현세에서 미리 매 순간 노력을 하여 본래의 모습대로 자신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연옥은 하느님과 만나는 상태라고 설명하는 편이 낫습니다.  피조물인 우리들이 조물주가 사랑으로 알려 주신 방향을 알려하지도 않고 완전히 무시하고, 한 생명의 시한이 다 끝나 버린 다음에서야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고 사랑의 원천이신 아름다운 그분을 알게 되고 만나게 된다는 것이 곧 연옥이라는 것입니다.

 

3)  연옥의 고통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연옥의 고통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그 어느 것보다도 더 고통스럽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옥의 고통에 대해서 교회가 분명히 규정하거나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연옥에서 인간의 영혼은 하느님의 무한히 선하심을 완전히 깨달았지만, 이미 자기가 지은 죄의 장애로 말미암아 잠시나마 그 아름다움 자체를 지복 직관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옥은 지옥과 달리 평화는 느낄 것입니다.  이제 구원은 아주 확실하여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정화'가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카타리나 성녀는 "영옥의 불은 매우 효과적으로 영혼을 태우는 사랑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영혼이 하느님을 만나게 될 때 겪어야 할 큰 공경이 연옥벌이라는 것 외에는 연옥벌에 관해서 더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교회의 오랜 전통입니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신앙의 아름다운 한 표현으로써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신자들이 관계를 맺고 있다는 희망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통해서 사랑의 구체적 실현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만남은 결코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만남이 됩니다.  이 만남은 기도와 희망으로 나타나며 신자들과 성인들의 청원 기도로써 지원을 받아 교회 안에서 즉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업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과 유대를 맺고 있음을 명심하고 끊임없이 죽은 이를 위해 기억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헌장 50)

 

4. 심판

심판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성서의 구절은 오늘 우리가 시작기도에 묵상한 마태오 25장의 구절과 고린토 후서 5장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고린토 후서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는 날에는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한 일들이 숨김없이 드러나서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못한 일은 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고린토 5,10)

 

1)  사심판

사심판이란, 죽은 후에 하느님으로부터 개인적으로 받는 심판을 말합니다.  사심판이란, 육체를 떠난 영혼(나 자신)이 자신이 세상에서 자유로이 선택해 가며 살아온 결과 따라 상이나 벌을 받는 것입니다.  사심판의 판관은 하느님이시며, 결과에 따라 천당이나 연옥이나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즉, 사심판은 사람이 죽는 즉시 자신의 생활에 대한 결산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루가 16, 19-31 참고).

사심판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의 시간이 끝나고 살아 있었을 때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 후부터는 범죄하거나 공로를 쌓을 수도 없습니다.  은총 중에 죽은 이는 더 이상의 정화를 요하지 않고 죽자마자 천국에 들어가고, 은총 상태에서 죽었으나 약간의 정화를 요하는 이는 그 정화가 끝난 후에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Denz. 1000-1002).

 

 2)  공심판

   공심판이란 세상 종말에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최후의 심판입니다.  이 최후의 심판의 뜻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이 완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공심판의 대상은 모든 인간 즉, 선한 자, 악한 자, 생존자나 사망한 자들 모두입니다.  이 시기는 하느님이신 성부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심판의 기준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알려 주신 사랑의 법을 어떻게 실천했는가에 의합니다.

   주님의 심판은 국가 법정의 재판처럼 제절차를 밟아가는 그런 형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죄가 많기 때문에 주님의 심판을 아주 무서운 것으로 잘못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심판을 절망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희망적으로 바꾸어 보는 것이 참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사랑에 대한 수업을 마치고 이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되는 것이 주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종합 심화

 아침 저녁으로 전철을 이용해서 출 퇴근을 하시는 분들은 서울의 전철을 일컬어 "지옥전철"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시골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살던 분들이 서울 나들이에 나서면 으례히 서울의 오염된 공기를 일컬어 "지옥공기"라고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지난 주에 이어서 죽음을 자세히 공부하는 시간을 갖었습니다.  즉 우리가 죽은 후에 맞서게 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인 천국, 지옥, 연옥, 심판에 대한 교리를 함께 공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의 교리를 통해서 우리 교회의 종말교리가 단순히 우리의 처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즉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돕기 위해서 우리에게 계시된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교리를 통해서 우리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고, 심지어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죄악에 빠져있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깊은 배려를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종말에 대한 교리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삶의 가치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하기 보다는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 죽을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다가 오는 죽음을 의식하며, 지금 이순간 나에게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지금 이순간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응용 실천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셨을 리가 없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는 우리는 결국 하느님을 거스르는 거짓 증인이 되는 셈입니다』(Ⅰ고린 15,13-15).

 

이제 종말을 맞이할 우리 믿는 이들의 윤리적 정립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육신의 의미는 다시 살아난다는 데에 그 가치가 극치에 달하고 있습니다.  사용 후 폐기 처분될 그런 몸이 아닙니다.  사용 후 그 결과를 영원히 누릴 그런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들의 주위에 있는 동료 예비자들을 서로 바라 보십시요.

지금 여러분이 바라보고 계신 분들은 바로 죽음을 이기고 새롭게 부활에 대한 희망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서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나를 구체적으로 나눌 때 우리는 종말의 순간에 서로서로에게 누구보다도 소중한 벗이 될 것입니다.

이번 주간에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실천해 보도록 노력해 봅시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위타적인 삶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합시다.

 2.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부모, 형제, 친척...)를 자주 하도록 합시다.

 3. 초상당한 이웃을 방문하고 기도하며,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