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입하기 전까지 많이 망설였던 책이다.
왜냐하면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크리스마스 캐럴/가면고" 책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읽은 소설이고, 또 내용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책도 집에 있는데 굳이 산 이유는, 바로 최인훈과의 대담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소설가 중에서 단 한 명만 고르라는 무리한 질문이 따른다면 나는 조금 고민은 하겠지만, 거의 주저 없이 최인훈을 선택할 것이다. 최근에 나온 '바다의 편지'를 제외하고는 그의 소설은 다 읽었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그의 "광장"부터 시작하여, "총독의 소리" "태풍" 등등.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그의 전집을 모두 읽고 참 대단한 작가구나 했었는데... 그 때 이 "가면고"도 읽었는데...
그런데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가면고"가 그렇게 난해하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너무도 난해해서 인기가 없는 작품 운운해서, 정말 그런가 하고 다시 읽고, 또 작가의 대담에서도 그런 말을 하나 하는 것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 소장하기로 결심한 책.
나는 난해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작가가 난해하게 썼다고 하고, 평론가들도 난해하다고 하면 내 소설읽기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찾아보니, 그렇지 않다. 이상하게 안심이 된다. 별로 어렵지 않은 소설을 어렵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도 든다.
이태동 : "선생님께서 이 작품을 저와의 '대담 시리즈'를 위한 텍스트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가장 아끼는 작품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너무나 난해한 작품으로 생각하시기 때문입니까?"
최인훈 : "같은 주제를 번복한 형식이 주제 전달에 흥미 있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우선 저는 이 작품을 난해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제 의견이긴 하지만 "가면고"는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94-195쪽
이거다. 이 소설에 대해 비평가들의 평론을 읽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소설은 모두가 자신의 이해에 맞게 읽을 수밖에 없고, 어떤 소설도 결국 자기 것으로 재해석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최인훈이 말한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말은, 읽는 사람에 따라 계속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고,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또 언제 어디서 읽느냐에 따라 같은 사람에게도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말로 받아들이면 된다.
재미있는 소설은 언제 읽어도 새로운 맛이 나는데, 이 "가면고"도 그러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가면고" 한자어로 보면 가면에 대한 고찰인데, 가면은 결국 무엇인가? 우리의 얼굴이다. 그런데 얼굴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우리의 정신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이다.
뭐 전후세대의 방황, 이런 말들을 신경쓰지 말자. 오직 얼굴, 그리고 우리의 정신에만 집중하자. 우리는 자신만의 얼굴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자신만의 얼굴은 자신의 내적 영혼이 밖으로 표현되는 형식이다.
정신의 형식이 바로 얼굴인 것이고, 그 얼굴을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 바로 가면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얼굴이라고 하지 않고 가면이라고 한 이유는 변화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고정된 것이 아닌, 자신의 행동, 노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뜻에서 가면이라는 말을 썼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가면을 쓰느냐에 따라 자신이 달라지는데, 가면을 쓰는 것보다는 가면을 내면에서부터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이 소설이 말해주고 있지 않나 싶다.
즉, 자신의 얼굴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 소설을 읽어도 된다는 얘기다.
외부의 화려함, 언뜻 보면 좋아보임, 겉으로만 꾸밈 등이 아닌, 내부로부터 흘러나오는 내용들이 얼굴이라는 형식 속에 드러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 소설 속에서 또 하나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다문고(多聞苦) 왕자는 상징적이다. 많이 듣는 고통은 결국 외부로 시선이 향해 있다는 얘기다. 그런 그가 외부의 탈이 아닌 자신의 내적 성찰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얼굴을 갖게 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럼 현실에서 주인공인 민이 만나는 두 여자를 생각해 보자. 물론 작품에는 세 여자가 등장한다. 가슴 가운데 기미가 있는 여자, 미라, 정임. 첫여자를 제외하고, 그가 깊이 사귄다고 할 수 있는 미라와 정임은 민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미라는 화가이고 정임은 무용수다. 그들은 둘 다 예술을 하는데, 예술은 표현을 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표현을 하는 행위에서도 미술은 매개를 필요로 한다. 즉 몸과 정신 사이에 그림이라는 매개가 개입한다.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고 한 번 굴절되어 나타나게 되니, 이 과정에서 왜곡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정신과 얼굴의 일치를 추구하는 민이에게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무용은 자신의 몸으로 정신을 표현하는 행위다. 몸으로 표현하는데 중간 매개항이 없다. 오직 자신의 몸으로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중간에 왜곡될 가능성이 없다.
정신과 얼굴이 일치할 가능성이 많다. 이러니 민이 누구를 선택할지는 이미 이들의 직업에서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 이 소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이다.
현대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정신을 겹겹으로 가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중국의 예술인 '변검'처럼 수많은 가면들을 지니고 때에 따라 계속 가면을 바꿔가고 있지 않나?
맨얼굴로 살기 힘든 세상이 되지 않았나? 이런 때 정신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길 원하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을텐데...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얼굴에서 내면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대하고도 있다.
내면과 얼굴이 일치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을 자연스레 지니게 된다. 지금 우리가 갖지 못한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가면이 아닌, 자신의 행동과 내면에서 우러나와 만들어진 얼굴이기 때문이다.
비록 수많은 가면들을 지니고 사는 현대인들이지만, 이들 역시 본능적으로 영혼이 얼굴을 만든 사람을 알아본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존중한다.
이 소설은 그래서 현대에도 의미가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는 내적 영혼이 얼굴을 만들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깥에서 오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서만 올 수 있음을... 그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람임을 이 소설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
다시 읽어도, 다시 샀어도 후회되지 않는 소설이다.
시와 과학에 관해 읽은 세 번째 책.
그렇게 눈에 띠지 않던 책들이 이상하게 한꺼번에 다가오기도 한다.
시와 과학에 관한 책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한 이십여 년 전에 "시인을 위한 물리학"이라는 책을 본 적이 있다. 물론 끝까지 읽지 못하고, 책꽂이 한 켠에 얌전히 꽂혀 있지만 말이다.
시인들은 과학하고 워낙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쉬우니, 그런 시인들에게 과학, 특히 물리학을 쉽게 설명해 준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 또 시인이나 물리학자나 동떨어진 사람이 아니고, 서로의 지식을, 감성을 나눠야 한다는 생각에 그런 책이 나오지 않았나 추측을 할 뿐이었다.
그러다 하도 통섭, 통합, 융합 하고 있으니, 이런 종류의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
시를 읽으며 시 속에 푹 빠져 그 속에서 나오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를 거리를 두고 보면서, 시에서 어떤 과학적 사실들을 찾아내고 설명해내는 일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책을 읽으니 시와 과학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을 알 수 있고, "과학실에서 읽은시"라는 책들이 시인이 과학과 접목시키려는 노력을 한 책이라면, 이 책은 그런 시도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화학자인 저자가 시를 읽으며 시 속에 나타나 있는 과학 용어들을 찾고, 그 용어들에서 과학적 설명을 해놓고 있는 책이니 말이다.
그러니 시인이 이렇게 과학을 표현했다가 아니라, 시에 표현된 시어에서 과학 용어를 찾고, 그 과학용어를 바탕으로 과학적 지식으로 확장해 나가는 서술을 하고 있다.
과학자라서, 특히 화학자라서 화학분자식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과학적이라는 생각, 시도 읽고 과학 지식도 얻었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마음을 가장 함축된 언어로 표현한 문학 작품이 '시'라면, 자연이 법칙을 담고 있는 가장 짧은 단어들이 '과학 술어'다. 그러기에 이들은 오히려 짙은 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시에게 고학을 묻다'라고 하기보다 '과학에게 시를 묻다'고 바꾸면 어떨까라는 질문도 던져본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시와 과학은 '창조'로 통한다. 그러기에 시 속에서 과학을 캐려는 어떤 시도가 독자들의 상상력과 독창성을 자극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 저자의 말에서 6-7쪽
총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우주의 비밀, 사랑과 인생의 아름다움, 자연의 신비다. 그리고 많은 시들이 등장하고, 그 시들에서 발견하는 '과학 술어'. -이 말이 좀 어렵게 다가오니 과학 용어라고 하자- 를 찾고, 그 과학 용어를 중심으로 과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가령 시에 '원소'라는 말이 나오면 원소에 관해서 과학적 지식을 이야기하고, '태양'이 나오면 태양과 관련된 과학 이야기를 한다. 또 '석유'라는 말이 나오면 석유와 관련된 다양한 과학적 사례들을 이야기해주고, 비단, 거미줄, 나무 등과 같은 우리가 흔히 만나는 시어들을 가지고 여러 과학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그래서 과학과 시의 융합이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어쩌면 시를 통해서 과학으로 지식을 확장해 나감을 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를 통해서 감성을 충분히 자극했으니, 이제 시를 통해서 이성도 자극해 보자 하는 듯하다.
이런 책을 읽으면서 이제는 반대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과학적 사실이나 발견을 시로 표현하는 것.
세상은 늘 한 방향으로만 작동하지 않으니, 또 여러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이 더 좋으니, 시에서 과학을 발견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과학을 시로 표현하는 작업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과학실에서 읽은 시2" 권이다.
첫번째 책을 흥미롭게 읽었기에 이 책도 이어서 읽게 되었는데, 1권보다는 과학에 대해서 좀 약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 지식이 무궁무진하겠지만, 시에서 그 과학 지식을 찾아 함께 설명하기는 쉽지 않은 일일텐데, 그런 일을 한 시인이자 교사인 작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번 2권은 과학적 지식보다는 시인의 감성이 더 많이 나타난 책이다. 시에서 객관적인 과학적 사실을 찾아내서 설명해주기보다는 감성적 설명이 더 많아졌다. 그만큼 이 책은 건조한 서술보다는 작가의 감성이 들어간 표현을 더 많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특히 2권에서는 천문학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시에서 '해' '달' '별'이 많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우주에 관한 서술이 많은데, 우주는 과학적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시적이기도 하니, 자연스레 책 내용에 감상이 더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다 저렇다 해도 과학과 시를 연결시키고, 독자들에게, 특히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시인답게 청소년들에게 다정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으로 책을 쓴 것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요즘 청소년들 하늘을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하늘을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거나 우주를 향해 자신의 꿈을 펼쳐보려는 생각을 하는 청소년들이 얼마나 있을까?
마찬가지로 요즘 청소년들 시를 몇 편이나 읽을까? 시를 읽으며 마음을 넓고 깊게 하고, 세상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청소년들이 몇이나 될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과학과 시를 융합하여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전해주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 시 한 편.
이 시에서는 과학을 찾아도 되지만 우리 사회의 모습을 찾아도 된다. 정말 시는 우리가 찾을 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보물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공손한 손
- 고영민
추운 겨울 어느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공손히
손부터 올려 놓았다
하상만 엮고 씀, 과학실에서 읽은 시2, 2014년 1판 1쇄. 193쪽
이 책에서 발견하는 과학은? 바로 열의 이동 방법. 열의 이동 방법에는 복사, 대류, 전도가 있다고 하는데, 밥뚜껑에서 느껴지는 열은 바로 전도. (175쪽 참조)
열은 뜨거운 데서 차가운 데로 이동을 한다. 이런 과학적 사실에 작가는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추운 겨울 밖에서 일하느라 몸과 마음이 얼어버린 사람을 데우고 있는 따듯한 밥 한 공기를 생각해봐. 이 세상의 추위를 나누려는 열의 의지가 느껴지지 않니? (196쪽)라고 말이다.
우리는 연말이면 온갖 자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더 자선에 대해서 강조한다. 왜 연말에. 추우니까. 추우면 더 힘든 사람이 있고, 추우니 열의 전도가 필요하니까. 따뜻한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열이 이동해야 더 세상이 훈훈해지니까.
밥 한 공기에서, 그 밥뚜껑에서 과학적 사실과 그리고 우리가 사회에서 할 일을 찾아내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시 읽기이고, 시의 존재의미라는 생각이 든다.
유독 추운 올겨울, 이 시처럼 열의 이동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뜨거운 태양이 아니더라도, 따뜻한 밥뚜껑 정도는 되어야겠다.
지금 우리나라 교육현장에서 이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이 있을까 싶다.
과학을 좀 잘한다 하는 아이들은 시라면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고 진저리를 치고 있고, 시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과학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는 현실이니 말이다.
오죽하면 학교 교육 현장에서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곧 통폐합이 된다고 하는데, 이도 교과목 간의 의견 차이가 커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 교육은 정권과 상관없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백년지대계는 커녕 십년지소계도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니, 원) 태양계와 안드로메다 성운과 같이 동떨어지게 교육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교육현장의 현실과는 다르게 자꾸 통합, 통섭, 융합이라고 하여 무슨 STEAM교육을 하라고 학교에 공문이 자꾸 내려오나본데, 세상에 과학과 시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지 않고, 그냥 하라고 하니, 제대로 될 턱이 없다. 그것도 대학입시에 목 매달고 있는 교육현실에서.
이 때 책이 나왔다. "과학실에서 읽은 시"
과학실에서 읽은 시라는 제목을 보고, 시와 과학을 접목시키려는 책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시에서 어떻게 과학 이야기를 풀어갈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사실 시와 과학이 동떨어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시와 과학은 우리 삶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시 따로, 과학 따로 생각하고, 교육하는 현실에서, 시를 좋아하는 아이는 과학을 멀리하고, 과학을 좋아하는 아이는 시를 멀리하는 이런 현실은 사라져야 하는데도, 그것이 쉽지 않다.
그 쉽지 않음에 이 책은 도전하고 있다. 시를 제시하고 그 시에서 과학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설명하면서 다시 시와 만나게 한다.
즉 시인은 감성으로 세상을 만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과학자는 이성으로 세상을 만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심장과 머리라고 표현한다면, 어떤 사람 말대로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머리에서 심장까지의 거리일 수도 있지만, 가장 가까운 거리가 심장에서 머리까지일 수도 있으니.
학교 수업시간에 시 한편을 놓고 과학교사와 국어교사가 함께 수업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얼마나 좋은가. 시를 통해 감성과 이성을 동시에 자극하는 그런 수업.
시를 읽으며 감성을 채우고, 감성을 통해 이성을 자극하고, 이성의 힘으로 분석하고 정리하고, 다시 이를 감성에 적용하는 그런 수업.
과학과 시는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하는 그런 것임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지금 머리와 가슴(심장)까지의 거리를 가장 가깝게 해야만 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 책, 시에서 찾아낸 과학. 비록 시인이 시를 통해 과학을 이야기해서 과학자가 보기엔 과학적 지식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겠지만, 시와 과학이 만나는 접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자, 시 한 편을 보자.
이 시에서 찾아낼 수 있는 과학은. 또 그런 과학으로 다시 우리 가슴을 울릴 수 있는 내용은 무엇인지. 이 책에 나와 있는 내용 말고 더 많은 것들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연습. 지금 필요하다.
궁금하면 이 책을 읽어 보라.
내 목구멍 속에 걸린 영산강
- 손택수
두엄자리에서 지렁이가 운다. 지렁이 울면 낭창한 대 하나 꺾고 낚시를 가시던 할아버지.
그날 붕어조림을 삼키면서 나는 붕어가 샄민 지렁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는데
지렁이가 할아버지를 삼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할아버지가 삼킨 붕어와 붕어가 삼킨 지렁이 잘디잔 흙알갱이가 되어 지렁이 주둥이 속으로 빨려들 줄은 몰랐다.
비 내린 뒤의 영산강변 할아버지 무덤가에 지렁이가 기어간다. 그래 지구상의 모든 흙은 한 번쯤 지렁이의 몸을 통과했다.
머잖아 저 몸속에서 붕어를 삼킨 할아버지와 내가 머리 딱 부딪치며 우르릉 쾅쾅 천둥번개 치는 시간 있겠구나.
주물럭주물럭 시간대를 마구 뒤섞는 장운동, 저 몸속으로 산맥 하나가 통째로 빨려 들어가고 말랑말랑한 반죽물 밭이랑 논이랑이 되어 꿈틀꿈틀 빠져나올 수도 있겠구나.
강 주둥이에 아침부터 누가 철근을 박고 있다.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멘트를 퍼붓고 있다. 컥컥 헛구역질을 하며 강이 움찔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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