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그리는 남자
- 로만 오팔카
김주혜
바닷가, 검은 물떼새 날아가는 모래사장
한 남자가 흰 물감을 흠씬 묻힌 붓을 들어
검은 캔버스에 하얀 숫자를 풀어놓는다
로만 오팔카를 닮은 남자,
검푸른 바닷물에서
하얀 시간을 끄집어내려는 듯
그의 흰 셔츠 등판에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까지
흰 붓끝이 되어 눈부시게 흔들린다
막 가라앉기 시작하는 검은 시간들이
붓끝으로 몽땅 끌어올려져 하얀 시간이 되어
검은 캔버스에 쌓인다
어두운 내 시간도 꺼내 그의 붓끝으로 던져버렸다
하얗게 채워지는 희망의 숫자들
하얀 나비 떼가 검은 캔버스에 가라앉자
하얗게 드러나는 숫자, 숫자들
마침내 그가 붓을 놓는다
비로소 완성되는 다가오는 시간,
-전문 (p. 191)
* 로만 오팔카(Roman Opalka, 1931-2011, 80세), 무한 소멸을 그린 화가
♣ 시작노트(발췌)_ 김주혜(필자)/ 시인
시간을 그리는 남자, 로만 오팔카, 수많은 숫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존재이고, 무한으로 구성하여 확대한 화가! 결국 하나(1)에서 시작하여 무한대(∞)로 이어지는 그의 그림을 보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무의미하며 무한을 세는 행위를 결심한 그의 그림 앞에서 삶이 허무함이 덮쳐올 때 무한대에 이르는 삶의 질량을 캔버스에 담는, 살아있는 동시에 죽음의 국면에 있는 그림이다. 죽음을 인식하면 삶은 무거워진다. 죽음에 다가가는 과정, 우리는 무용한 숫자들을 하루하루 살아가며 임시성에 영원성을 부여한다. 종교인은 부활, 천국, 지옥으로 죽음을 말하고 과학자는 원자가 분자로 되어 우리 곁에 머문다고 설명한다. 1로 시작한 삶이 무한대로 이어진다는 결론은 종교인이나 과학자의 말이 일치가 되는 것 같다. 결국 '우리'로의 확산과 '나'로의 회귀의 반복이 시사詩史의 양상이라는 면에 주목한다. (p. 198)
▶조명(발췌)_ 자아통합에 대한 열망_ 고명수/ 시인
사람은 자신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시인은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을 창조하기 위해 시를 쓴다. 항상 타인의 시간 속을 방황하던 햄릿이 마침내 "나는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다"라는 자각에 이를 때 비로소 참된 자신의 시간에 살 수 있었다. 위의 시에는 화자는 "검은 시간"에서 "하얀 시간"으로의 변신을 꿈꾸고 있다. "무한 소멸"을 그린 화가인 로만 오팔카를 매개로 하여 화자는 자신의 "어두운 시간"을 "그의 붓끝으로 던져" 버린다. 흑과 백의 시각적 효과가 두드러지는 위의 시는 예술작품과의 동화를 통하여 희망과 통합의 시간을 꿈꾸는 화자의 내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시의 이미지들은 상처의 흔적을 재구성한다. 상실의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생산되는 보상으로서의 희열은 '고통스러운 쾌락' 혹은 영원히 만족시킬 수 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데서 발견되는 역설적인 만족이다. (p.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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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창작』 2022-가을(175)호 <신작시/ 시작노트/ 조명>에서
* 김주혜/ 서울 출생, 1990년 『민족문학』으로 등단, 시집『때때로 산이 되어』『아버지별』『연꽃마을 별똥별』
* 고명수/ 199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마스터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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