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는 것과 시를 아는 것, 이 둘은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서로 다른 것이라
시를 안다고 다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시를 쓰는 시간은 나를 만나는 일이다.
한 줄 한 줄 내 삶의 한 부분을 도려내는 살갖이다.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한 방편이니
시는 내 분신이다.
시가 넘쳐나고 시인이 늘어나는 이 시대에
나의 넋두리가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해 주고 기억해 준다면 아웃사이더는 면하지 싶다.
어렵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천부적인 감성과 디엔에이가 필요한 것이라고 번번이 나는 뒷걸음질 친다.
이집트 종살이하듯 어두운 , 미련하고 공허함으로 이루어진 나의 공간들이 내 심신을 갉아먹고 있을 때
끊임없는 사랑을 준 이들이 있어, 그 어두운 심연에 낚싯줄을 던져 메타포를 건져 올리고,
오브제로 채우며 나를 찾으려 다시금 길을 나선다.
무엇을 시작하기에 충분할 만큼 완벽한 시간은 없다.
어차피 인생은 완성하는 데 있지 않고 정직히 살아가는 데 있다고 본다면,
옹이 진 나무가 가장 오래 타고 상처 많은 나무의 무늬가 아름답고,
꽃은 피기 때문에 아름다운 게 아니라 꽃이 지고 열매를 맺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라는 기막힌 말을 기억하고 걷는다.
어떤 신부는 사제로 사는 것보다 사제로 죽는 게 더 힘들다고 고백하였다. 시인으로 사는 일보다 시인으로 죽는 일이 더 힘들지 않으려면 시인으로 사는 삶도 거룩해야겠지. 시인답게 자신의 글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겠지.
우리 삶을 돌아보면,주위가 모두 시로 되어 있어 여기서 불쑥 저기서 불쑥 튀어나온다고 보르헤스는 일찍이 말하였다.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끼는 풀베개에서는 이 세상에 사랑이 사라지지 않듯 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인은 인간 세상을 느긋하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는 까닭에 존경받아왔다.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살기 어렵게 하는 번뇌를 뽑아내고 고마운 세계를 직접 묘사해 내는 작업, 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내게 시는 경연이 아니고 비교가 아니었다. 그저 보기만 하면 저절로 가슴속에서 사랑이 일어난다.
사람처럼 가릴 일도 아니고, 차별할 일도 아니다.
내게 시는 위안이었고, 고백의 상대요, 참회의 대상이었다.
책을 읽으며 영화를 보며 문득문득 생각나는 단어들이 잃어버린 내 정체성을 되찾게 해 주었으며
다시 느낌으로 다가와 나를 돌아보게 한 순간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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