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난처한 양심의 고백/조광호신부

주혜1 2025. 9. 14. 20:43

난처한 양심의 고백

ㅡ교회 첨탑에서 십자가를 내려야 할까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는 처음부터 인간의 지혜와 권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저주의 나무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미련함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모순과 수치가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이 드러나는 자리였습니다.

십자가는 권력과 탐욕을 단호히 거부하고, 정의와 사랑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피 묻은 길이었습니다. 이익 추구와 욕망에 혈안이 된 오늘 이 세상에서, 십자가는 여전히 어리석음과 수치의 상징이 됩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오늘 이 시대 예수를 따른다고 소리치는 자칭 기독교 신자들 자신이 십자가를 어리석음으로 만들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내세우고 지붕에 높이 달아 붉은 네온으로 불을 밝히지만, 예수의 이름을 팔아 이익을 취하고 권력과 영화를 탐하는
수많은 MAGA식 기독교 신자들에게 고통과 수난의 상징인 십자가는 사실상 어리석음과 수치가 될 뿐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국가의 이익과 민족의 영광을 위해서, 물질적 축복과 건강, 성공만을 탐욕스럽게 좇는 신앙 속에서 고난의 상징인 예수의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 아니라 실패와 패배, 수치와 어리석음의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상징이 아니라, 그저 공허한 허상과 수치일 뿐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했듯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 사람에게는 걸림돌이요,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다"(고전 1:23).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걸림돌이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로마의 압제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재건할 정치적 해방자였는데, 가시면류관을 쓰고 조롱받으며 죽어간 예수는 그들이 그려온 메시아의 모습과 정반대였습니다.

헬라인들에게는 십자가가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철학적 지혜와 논리를 중시한 그들에게, 신적인 존재가 가장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형을 당한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십자가가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이라는 것이 복음의 핵심 역설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선언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가치관과 권력구조를 뒤엎는 혁명적 폭탄선언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충격은 하느님의 아들이 정말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배고픔을 느끼셨고, 목마름을 아셨으며, 친구들의 배신에 상처받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실 때, 그분은 죽음 앞에서 한없이 두려워하는 한 인간이셨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약함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완전한 연대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만나는 그분의 모습은 단순히 고난받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원수를 용서하고, 강도를 낙원으로 초대하며,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는 그분의 모습에서 우리는 완성된 인간의 원형을 봅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 자신이 피를 흘리며 고통당하신 것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만약 전능하신 하느님이 인간의 절망적 아픔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신다면, 그런 하느님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지옥 같은 절망의 세상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 요즘 말로 하자면 하느님께서 죄많은 인간에게  아주 모질게 당하신 사건입니다

인간의 죄가 하느님의 아들을 죽일 수있을 만큼 잔인하고 끔찍하다는것을드러낸 사건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심연으로 내려오신 것은, 오직 그 자리에서만 인간을 회복시키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멀리서 구원하지 않으시고, 인간 존재의 처절하고 잔인한 밑바닥, 그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오심으로써만 참된 구원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 이성을뛰어넘는
하느님 사랑의 본질입니다

골고다 십자가는 가장 큰 인간의 죄에 대한 가장 큰 하느님의 자비가 서로 만나는 최후의 극점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자기비움의 극치"로 드러나는 모습이며, 하느님 사랑이 발가벗은 모습으로 인류 역사에 드러난 사건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와 완전히 구별되는 결정적 차이점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고통을 모르는 차가운 초월자가 아니라, 고통을 온몸으로 통과하신 뜨거운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 그어느 종교 보다도철저히 역사를 눈여겨보는 종교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도 너의 지옥 같은 아픔을 뼈속까지 아신다! 너는 절대 혼자가 아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주는 가장 강렬한 위로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을 마법처럼 사라지게 해주지는 않지만, 그 고통에 불타는 의미를 찾아 피 묻은 동반자를 주십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분명 십자가는 완전한 실패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처절한 어리석음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혁명적 생명의 길을,
부활의 삶을 우리에게 전해주셨습니다.

힘으로 짓밟아 정복하지 않고, 무력으로 제거하지 않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밀씨의 희생을 통해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혁명적 지혜입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십자가는 여전히 우리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습니다.

십자가 보혈 은혜만을 찬양하는 탐욕으로, 무의미하게 얻은 껍데기 십자가이고
가짜 기독교입니다

가짜 십자가를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슴에서 내리고, 바로 그 텅 빈 자리에 고통과 수치를 온몸으로 껴안고 정의와 사랑을 위해 피 흘리신 나사렛 예수의 진짜 십자가를 불타는 마음으로 내 가슴에 안고 다시 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권력과 부를 번쩍이는 금빛으로 포장하는 값싼 액세서리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세상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절대 꺼지지 않는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의 타오르는 눈물겨운 정의의 횃불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가슴이 미어지도록 불편하고, 때로는 죽을 만큼 수치스러우며, 미친 듯 어리석게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로 그 피 묻은 길을 걸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불타는 지혜를 뼈속까지 체험하며, 부활의 신비를 경험하고, 나사렛 예수를 목숨 걸고 따르는 진짜 제자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으늘 우리는 가슴을 치며 다시 물어야 합니다.

저 도심의 잿빛 하늘에 무수한 십자가는 진정 예수의 피 묻은 십자가 일까, 아니면 인간의 더러운 욕망을 감추고 있는 가짜 십자가일까?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이 냉철한 물음 앞에
이 불편한 진실앞에. 홀라당옷을 벗어던져야
새릅게 태어 날 수 있을것입니다

이 불편한 질문 앞에 스스럼없이 우리를 세워야만 우리의 미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더 이상 안락한 취미가 아니라 삶 전체를 뿌리째 뒤흔드는 생사를 건 결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는 오늘도 우리를 불타는 목소리로 부릅니다.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십자가는 어리석음과 수치의 상징이 아니라,

구원과 생명의 맹렬한 빛으로 우리 가슴속에 부활의 생명으로.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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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년
십자가현양축일  동검도새벽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