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침묵의 향기로 치유를/조광호신부

주혜1 2025. 9. 23. 13:02

침묵의 향기로
치유되는 세상

언제부터인가 TV 켜기가 두려워졌습니다.

뉴스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을 켜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흉한 먹방과 끝없는 정치인들의 고성과 악다구니가 연속되기 때문입니다.

끝도 없는 먹기와 끝도 없는 말다툼 속에서 우리는 점점 지쳐갑니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채우듯, 비워지지 않는 욕망과 이기적 자존감으로 세상은 말과 소란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 모습은 TV 속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여 있으면서도 각자 자기 이야기만 쏟아냅니다.
다섯 사람이 동시에 말하고, 두 사람의 대화마저 한쪽이 쉬지 않고 이어가면 그것은 더 이상 대화가 아니라 상대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조용한 폭력이 됩니다.

웃음과 말소리가 넘쳐나지만, 남는 것은 이상한 피로와 공허뿐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6세기 우리 교회의 수도생활을 창시하고 그 규범을 집대성한 성 베네딕토의 영성은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는 이런 태도를 물무라치오(murmuratio)라 불렀습니다.

불평과 중얼거림, 끝없는 자기 말하기는 공동체를 허물고 평화를 잃게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생각해보면 물무라치오의 뿌리에는
미성숙과 열등감, 시기와 질투, 그리고 이기심이 숨어 있습니다.

이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우리는 더 많이 말하지만, 정작 더 적게 듣게 됩니다.

성 베네딕토는 '듣는 것'(ausculta)을 영성생활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수도규칙서 첫 문장은 "들어라, 아들아"Ausculta o, fillii"로 시작됩니다.

이는 단순한 청각적 행위가 아니라, 마음과 영혼을 열어 하느님의 음성을 받아들이는 전인격적 태도를 의미합니다.

베네딕토 영성에서 침묵(silentium)은 공허한 무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내면의 소음을 가라앉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거룩한 공간을 마련하는것입니다.

침묵 속에서만 우리는 자신의 교만과 이기심을 직시할 수 있고, 겸손(humilitas)이라는 영적 토양 위에서 진정한 성숙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교양은 화려한 언변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를 존중하며 귀 기울이는 태도, 비난보다 이해를 택하는 마음, 침묵 속에서도 은은히 풍겨 나오는 사랑과 진실입니다.

"Silentium est humilitas" - 침묵은 겸손이고, 그 겸손 속에서만 평화가 자랍니다.

베네딕토는 끊임없는 불평과 중얼거림이 공동체의 조화를 깨뜨리고 개인의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다고 보았기에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순명(oboedientia) 을  강조했습니다

즉 겸손한 마음으로 타인과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권했던 것입니다.

베네딕토의 영성은 극단적 금욕이 아닌 '중용의 길'을 제시합니다.

일과 기도, 침묵과 말, 개인의 영성과 공동체 생활의 조화로운 균형 속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이는 현대인에게 성찰과 관계의 지혜를 동시에 선사하는 시대를 초월한 영적 유산입니다.

먹방의 허기와 정치의 소란으로 가득한 시대일수록,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더 많은 말이 아니라 침묵의 향기입니다.

불평 대신 감사, 시기와 질투 대신 존중과 사랑, 이기심 대신 평화를 심을 때, 우리의 침묵은 세상에 작은 치유와 평화를 흩날리는 향기가 될 것입니다.

"Pax"(평화)라는 베네딕토회의 인사말처럼, 그의 영성은 내면의 평화에서 시작되어 세상 전체를 품는 하느님의 평화로 이어집니다.

소음으로 가득한 현대에서 성 베네딕토의 침묵과 경청의 영성은 우리에게 진정한 소통과 평화의 길을 제시하는 영원한 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