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추상과 성미술/조광호신부

주혜1 2025. 10. 2. 18:55

추상과 성미술
― 보이지 않는 신비를 여는 길

서울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서는 지금 김인중 신부님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그의 유리화와 회화, 추상적 조형들은 빛과 색채와 여백을 통해 관람자를 맞이한다.

그 앞에 서면 우리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문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열려 있는 창이며, 종교적 초월과 신비의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길이다.

그러나 동시에 누군가는 이렇게 묻는다.

"무엇을 그린 건지도 모르겠는 이런 추상화가 과연 성전에 걸릴 수 있는 성미술인가?"

이 물음은 단순한 의문이 아니라, 오늘 한국 교회 안에 여전히 깊이 뿌리내린 오해와 무지를 드러낸다.
특별히 비문화적 보수 성직자들은
추상은 알 수 없으니 신앙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다고 단언 해 버린다

이런생각으로, 성미술은 반드시 알아볼 수 있는 성인의 얼굴이나 성경 장면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우리. 한국교회는 여전히 지배적이다.

이러한태도는 미술의 본질을 너무 좁게 이해하는 태도이고, 신앙의 신비를 표현하는 예술 언어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 때문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
단순히 "뭘 그렸는지 모르겠다"는 이유로 추상을 배제하는 것은, 사실상 교회의 문화적 깊이를 스스로 좁히는 무지의 폭력이 된다.

현대 추상미술은 이미 백 년을 훌쩍 넘어선 역사를 지니고 있다.

칸딘스키는 색과 선을 음악처럼 울려 영혼의 진동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의 그림은 눈으로 읽는 그림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영적 교향곡이었다.

몬드리안은 수직과 수평, 원색과 무채색의 단순한 구조 안에서 우주의 질서와 영원의 조화를 발견했다. 그의 작업은 단순한 기하학이 아니라, 영원의 구조를 향한 묵상이었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길을 걸었지만,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차원"을 표현했다.

추상은 이처럼 신비를 시각화하는 언어로 출발하였다.

지난 100년 동안 늘 새로운 길을 걸어왔다.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이 재현을 버리고 색과 선, 빛과 구조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려내면서 시작된 이 흐름은, 전쟁과 격동의 시대를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로 하여금 눈앞의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을 체험하게 한다.
.
한마디로 말해

현대 추상은 지난 한 세기 동안 끊임없이 “보이는 것 너머의 신비”를 표현하는 예술 언어로 발전해 온 것이다.

성미술 역시 단순한 재현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교회 문헌은 분명히 말한다.

"참된 성미술은 인간의 경건을 고양시키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가톨릭 교리서 2502). 중요한 것은 그림이 무엇을 닮았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신비를 드러내고 영혼을 어디로 이끄는가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도 성미술을 "하느님의 무한한 아름다움에 봉사하는 도구"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예술 언어를 배척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예술가들에게」(1999)에서 "교회는 예술가가 지닌 새로운 언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참된 영성을 표현한다면 그것은 곧 교회의 것이 된다.
사실 교회 역사 안에서 추상은 결코 낯선 손님이 아니었다.

비잔틴 성당의 황금빛 모자이크, 고딕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수도원의 기하학적 문양들은 모두 구체적 묘사보다 색과 빛, 구조와 여백의 추상적 언어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냈다.

추상은 교회 전례미술의 본래적 정신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제 용기 있게 직시해야 한다.

오늘 한국 교회의 많은 성당들을 채우고 있는 것은 예술적 진정성이 결여된, 조잡한 사실주의 그림과 조각이다.

그것들은 신앙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가 된다.

얕은 재현과 해설 위주의 성미술은 신비를 열기보다는 닫아버린다.

성인의 얼굴을 값싼 장식품처럼 반복적으로 모사해 내는 그림 앞에서 신자는 관상으로 들어가기는커녕, 피상적 감상에 머무르게 된다.

그 결과 성스러운 공간은 깊이를 잃고,

거룩한 신비는 얄팍한 설명으로 치환된다.

이러한 성미술은 결국 무지와 비문화적 태도를 드러내며, 교회의 예술과 영성을 퇴행시키는 퇴폐적 종교문화로 전락한다.

반대로 추상은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백과 빛, 색채와 구조로 신비의 문을 연다. 조잡한 사실주의가 신앙의 눈을 가린다면, 추상은 알 수 없음 속에서 신비의 창을 연다. 성체성사처럼 겉으로는 빵과 포도주일 뿐이지만,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처럼, 추상은 보이는 형상을 비워냄으로써 보이지 않는 신비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추상은 성미술에 합당하지 않다"는 주장은 오해이자 무지다.

진정성이 담긴 추상은 신앙의 본질인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길"과 가장 잘 어울리는 언어이다.

그것은 눈으로 읽는 그림이 아니라, 영혼으로 듣는 기도이며, 마음으로 체험하는 침묵이다.


추상미술은 오늘의 전례 공간 속에서 오히려 가장 깊이, 가장 강력하게 신앙을 증언할 수 있는 미술의 길이 된다.

추상은 단순히알 수 없는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와 이성이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향한 열린 창이다.

그 앞에서 우리는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고, 귀가 아니라 영혼으로 듣는다.

그렇기에 추상은 오늘날 교회의 성사적 공간 안에서, 신앙을 더욱 성숙하고 깊게 이끌어 가는 참된 성미술의 언어가 된다.

교회가  진정성이 담긴 조형예술로서
추상을 받아들일 때, 그것은 단순한 실험이 아니라, 전통의 본질을 오늘의 시대에 새롭게 살아내는 충실한 길이 된다.

ㅡㅡㅡㅡ
김인중신부의유리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