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에서
ㅡ블루 로고스(Blue Logos)
“숲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침묵은 가장 깊은 말씀이다."
1. 숲, 하느님의 첫 성전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든다고 시인은 노래했다. 빛마저 느려지는 가을,
나는 강화 정수사 숲 오름길을 걷는다.
이 길은 세상의 시간보다 느리게 흐르고, 발끝마다 이끼가 오래된 기도를 품고 있다.
숲속에 들어서면 세상의 소음이 멀어진다.새소리조차 조심스럽고, 바람은 향기처럼 흐른다.
그 안에서 나는 깨닫는다 —
숲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우신 첫 번째 성전이라는 것을.
하느님은 인간이 말을 배우기 전,
이미 세상에 숲을 만드셨다.
그분은 언어로 말하지 않으시고,
빛과 바람, 흙과 이슬의 언어로 당신을 들려주셨다.
숲은 신이 만든 최초의 성전이요,
모든 언어를 초월한 하느님의 음성이 깃든 공간이다.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언어를 초월한 말씀을 침묵으로 듣는다.
그래서 침묵보다 더 깊은 신의 음성은 없다.
숲의 고요는 조물주와 그 피조물이 함께 부르는
가장 오래된 침묵의 찬미다.
그곳에서 나무가 제사장이 되고,
바람이 복음이 되며,
햇빛이 성체처럼 흘러내린다.
2. 숲의 고독과 귀향의 길
독일 사람들은 이러한 체험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 —
Waldeinsamkeit(발트아인잠카이트).‘숲(Wald)’과‘고독(Einsamkeit)’이 결합된 이 말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숲속에서 신과 하나 되는 고요한 일치를 뜻한다.
숲의 고독은 인간이 피조물로서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성스러운 순간이다.
독일 유학 시절,
심신이 지칠 때마다 나는 남독의 흑림(Schwarzwald)을 찾아가곤 했다.
그곳에서 당시 독일 젊은이들이
‘숲을 관찰하고 그 상태를 기록하는 일’을 가장 선호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비로소 알았다.
그들이 기록하는 것은 나무의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의 상태였다는 것을.
숲속의 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라 귀향이다.
세상의 소음이 사라지고, 존재의 맥박만이 남는 순간,
나는 내 안의 중심으로 되돌아갔다.
그곳에서 신의 침묵은 내 안의 고요로 스며들었다.
3. 회광반조 — 빛이 되돌아오는 순간
동방의 사유는 이 귀향을 *회광반조(回光反照)*라 부른다.
밖으로 흩어진 시선을 거두어,
내 안의 빛으로 되돌아가는 일.
그 빛은 멀리 있지 않다.
숲의 그늘 속에서도,
내 영혼의 어둠 속에서도,
이미 은은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 빛은 신이 내 안에 남기신 흔적이다.
그 빛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하느님의 눈길과 마주한다.
그때 알게 된다.
빛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기억이 깨어나는 것임을.
4. 푸른빛 — 말씀의 색
그 빛은 푸르다.
푸른빛은 깊이의 색이자, 자비의 색이다.
하늘과 바다, 먼 기억과 가까운 숨결이 만나는 색.
나는 그 빛을 Blue Logos — 푸른빛으로 드러난 말씀이라 부른다.
푸른빛은 신의 침묵이 가시화된 언어다.
그것은 인간의 말을 거부하면서도,
모든 존재에게 들리는 고요한 음성이다.
그 빛이 내 안에 스며드는 순간,
교리는 사라지고 감응만이 남는다.
신앙은 이해가 아니라 사랑의 떨림이 된다.
5. 고독의 끝, 사랑의 시작
고독은 세상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서는 문이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신의 온기를 배운다.
그 온기를 배운 사람만이
세상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
숲의 고요는 속삭인다.
“너의 고독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곳은 내가 기다리는 자리다.”
그 순간, 고독은 어둠이 아니라
사랑의 빛으로 변한다.
숲 속에서 침묵의 음성을 듣게 되면
숲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다.
숲은 내 안에서 다시 자라나는 성전이 된다.
그 성전 안에서 하느님은
나를 또 다른 나로 빚고 계신다.
고독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고독은 더 이상 나를 고립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다시 창조하시는 자리,
그분의 손길이 들리는 거룩한 공간이다.
푸른빛은 나를 비추던 빛에서,
내가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변한다.
그 빛은 나를 넘어,
타인의 어둠을 밝혀주는 사랑으로 흘러간다.
그리하여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
숲을 성전으로 만드신 하느님 곁에서
인간은 또 하나의 성전이 된다.
“너는 나의 성전이다.
내가 네 안에 거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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