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가난을 낭만화하지 말라/조광호신부

주혜1 2025. 11. 15. 11:21

가난을 낭만화 하지 말라

ㅡ이 시대 가난을 바라보는
    새로운 복음의 눈

가난한 이를 축복하신 예수께서 가난을 축복하신 적은 없다.

가난은 꽃이 아니다. 가난은 미학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고통이다.

말없이 주저앉는 마음이며, 밤마다 스스로를 탓하게 만드는 고립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이상 가난을 영성의 언어로 포장하거나 순수함의 이미지로 미화할 수 없다.

오늘의 가난은 잔혹하다. 먹을 것이 부족한 시대의 가난이 아니라 삶의 기반이 무너지는 시대의 가난이다.

주거는 붕괴되고, 교육은 벽이 되고, 일자리는 흔들리고, 가난은 대물림되고, 희망은 끊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의 가난은 혼자 견뎌야 하는 고립의 가난이다.

이웃도 보이지 않고, 가족도 무너지고, 도움을 청할 관계조차 사라져 버린 깊은 침묵의 가난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말한다.

"가난한 마음이 복됩니다." "가난은 영적인 길입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오늘의 현실을 모르는 이들의 안전한 언어가 되어 가난한 사람의 상처에 겉포장만 덧씌우는 잔인한 일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이렇게 말해야 한다.

가난을 낭만화하지 말라. 가난은 영성의 배경이 아니다. 가난은 치유해야 할 상처이자 우리가 함께 져야 할 짐이다.

오늘의 가난은 철저히 사회구조가 만든 상처이다

옛날의 가난은 흉년과 시대의 조건이었다면, 오늘의 가난은 사회 구조가 만든 인위적 가난이다.

불안정 노동, 주거 위기, 교육의 격차, 자산 세습, 돌봄의 불평등—이 모든 것은 사람의 인격이나 노력과 무관하게 누군가의 삶을 서서히 무너뜨린다.

가난을 낭만화하면 우리는 이 구조를 보지 못한다.

가난한 이의 고통은 '그 사람의 문제'가 되어 버리고, 사회는 교묘히 그 책임을 면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말해야 한다.

가난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가난을 아름답게 말하는 순간, 우리는 책임을 잃는다.

가난의 진짜 고통은 돈이 아니라 고립이다

현대의 가난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단절이고, 존엄의 붕괴이며, 혼자만의 싸움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외로움—이것이 오늘의 가난이다.

성서가 말하는 가난은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비움이지만, 오늘의 현실 가난은 사람들에게서 밀려나고 사회에서 지워지는 절망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현실의 가난을 영적 가난과 결코 혼동하지 말라.

성서의 청빈은 고립을 선택하는 길이 아니라 고립된 이들을 품기 위한 선택이다.

수도자들의 청빈이 받는 이 시대에 큰 도전이 된다
수도자들의 청빈은 아름다운 길이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 , 가난한자들은 수도자들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가난은 선택이지만, 우리의 가난은 선택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렇다. 수도자의 청빈은 공동체의 보호 안에 있는 선택이다. 그러나 현실의 가난은 안전망조차 없는 생존의 벼랑이다.

따라서 오늘의 청빈은 이렇게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청빈은 덜 가지는 미학이 아니라 더 많이 연결되고 더 많이 연대하는 사랑이 되어야한다.

청빈은 소유를 버리는 개인의 미덕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의 자리에 가까이 가려는 복음적 결단이 되어야한다.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청빈의 참된 의미의 성서적 가난은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비움이며, 동시에 가난한 이들을 향한 연대의 열림이 되어야 한다.

가난한 이들은 축복받았다. 그러나 가난 자체는 결코 축복이 아니다.
이를 혼동하면 죄가된다

떨어진 옷을 꿰매입고 작은 차를 타고 남 한데 신세지며 사는
사유재산포기선언이
오늘 우리시대 성서적 청빈이 되어서는 안된다

가난한 이들의 존엄을 위해 내 자리를 조금 낮추고, 내 소유를 조금 줄이고, 내 시간을 조금 나누는 것—그것이 오늘의 청빈이다.

하느님은 비운 마음에 들어오시고, 낮아진 자리에서 만날 수 있으며, 가난한 이들의 눈물 속에서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신다.

가난의 낭만을 버리고 가난한 이들 곁으로 가야한다

가난의 낭만은 현실을 가린다. 그러나 가난의 진실을 바라보는 눈은 복음의 심장을 회복하게 한다

가난을 쉽게 낭만화 해서는 안된다
그것보다 잔인한 착각은 없다
가난은 미학이 아니라 치유해야 할 상처다.
가난한 이를 축복하신 예수께서 가난을 축복하신 적은 없다.

오늘 우리가 부름받은 길은 가난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의 존엄을 지켜 주는 일 그것이 오늘 우리가 지켜낼 청빈의 가치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가장 밝은 빛을 볼수가 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