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름의 미학
예술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정의가 존재하지만, 그 본질을 꿰뚫는 하나의 통찰이 있다.
예술이란 '같아지기를 거부한 것'이라는 명제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동조의 압력 속에서 살아간다.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규범을 제시하고, 관습을 따를 것을 요구하며, 다수의 취향에 순응하기를 바란다.
같아지는 것은 편안하다. 튀지 않고, 비난받지 않으며, 외롭지 않다.
그러나 예술은 이러한 안온함을 거부한다.
예술가는 모두가 오른쪽으로 갈 때 홀로 왼쪽을 향해 걷는 사람이다.
그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반복하기보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하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며,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에 물음표를 던진다.
뒤샹의 변기는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예술이 되었다.
차이가 생길 때, 예술이 시작된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은 종교적 신념 이전에, 누구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을 가리킨다.
이 세계에는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나뭇잎 하나, 강변의 돌 하나, 인간의 얼굴 하나까지, 창조된 세계는 반복을 허락하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 존재의 핵심을 복수성이라 불렀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서로 닮았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 다름은 불완전함이 아니라 시작의 조건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때 세계에 이전에 없던 무엇을 들고 등장한다고 말할 수있다.
"모든 사람을 예술가다".라는 보이스의. 말은
창조성은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태어남 그 자체의 사건성에 있다는 의미가 될것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사회는 이 창조적 차이를 두려워해 왔다. 질서와 효율, 속도와 성과를 위해 차이는 제거되어야 할 불안 요소로 취급되었다.
특히 한국 사회는 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며 동질성과 서열을 발전의 조건으로 내면화했다.
우리는 오랫 동안 사회 통염적으로
같은 교복, 같은 시험, 같은 답.같은 색깔 같은 모양의 것을 강요받았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달릴 때 사회는 빨리 전진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인간은 점점 자기 고유의 방향을 잃어갔다.
질 들뢰즈는 단호하게 말한다. 차이는 결핍이 아니라 생산의 힘이라고.
동일성에서 벗어난 차이가 세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생성한다는 것이다.
문화의 창조성이란 기존의 규범을 더 정교하게 반복하는 능력이 아니라, 차이가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다.
이 진리는 예술 교육에서 특히 선명하게 드러난다.
독일의 예술대학 입학시험에서 "하루 동안 무엇이든 자유롭게 해보라"는 과제는 창조의 질서를 신뢰하는 태도였다.
반면 당시 한국의 미대입시에는 수백 명이 똑같은 명태를 그린다음
우열을 가려 내었다.
평가에는 유리했을지 모르나 미술교육의창조성에는 치명적이었다.
우리는 흔히 그림은 구상에서 시작해 묘사를 거쳐 추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단계적으로, 순서대로 발전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육의 질서이지, 창조의 질서가 아니다.
추상은 구상에서 발전한 다음 단계의 형식이 아니다. 처음부터 가능한 예술 형식이다.
창조는 언제나 예측을 배반한다.
처음부터 추상으로 시작하는 그림, 처음부터 내면의 감각으로 시작하는 형식은 충분히 가능하며, 오히려 인간 존재의 본질에 가깝다.
습관은 빠르게 형성되지만, 그 습관을 벗어나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
그리스도교신학은 우주의 완전성이 하나의 완벽한 존재에 있지 않고, 다양한 존재들의 충만함에 있다고 보았다.
하느님은 동일한 피조물을 반복하지 않으신것은 하느님의 풍요는 오직 다양성으로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획일성은 신학적으로 말해 가난한 세계다.
예술은 동일성의 사회에 대한 비동일성의 항의였다. 예술은 사회가 요구하는 '같아짐'에 저항하며, "나는 다르다"고 말하는 형식 그 자체다.
그래서 예술이 사라진 사회는 단지 감상이 메말라진 사회가 아니라, 비판 능력을 상실한 불행한 사회가 된다.
장미만 가득한 정원은 잠시 화려할 수 있지만, 오래 보면 지친다. 그러나 들꽃과 나무, 풀과 이끼가 함께 자라는 정원은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아름다움은 단일함에 있지 않고, 서로 다른 존재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긴장 속에 있다.
이어령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유언 같은 당부의 말씀은 깊은 울림을 준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뛰면 1등에서 100등까지 등수가 매겨진다. 그러나 각자가 자기 방향으로 뛰면, 모두가 1등이 될 수 있다." 이 말은 경쟁을 부정하는 선언이 아니라, 방향의 전환을 요구하는 사유다.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포스트 휴먼 시대를 향해 가는 지금, 기술은 인간을 점점 더 효율적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효율은 창조성을 대신할 수 없다. 생물학적으로도 단일한 유전자 풀을 가진 종은 환경 변화에 약하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다. 다양성을 잃은 사회는 빠르게 성장할 수는 있어도, 오래 지속될 수는 없다.
결국 창조성이란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아니라, 고유성을 제거하지 않는 용기다.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그 고유성들이 서로 지워지지 않은 채 함께 존재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상태다.
그렇기에 모든 위대한 예술은 처음에는 낯설다. 그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여기던 세계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열어젖 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 자신이기를 선택할 용기가 있는가?
예술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작품 그 자체가 아니라, 다름을 긍정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재능을 존중하며 각자가 자기만의 색과 선을 찾을 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의 행복은 바로 그 지점, 다양성이 존중되는 세계에서 시작된다.
같아지기를 거부한다는 것, 그것은 존재의 가장 아름다운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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