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외눈박이 사회/ 조광호신부

주혜1 2026. 1. 12. 12:54

감정의 늪에 빠진
외눈박이 사회

인간에게 눈이 두 개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쪽 눈으로는 거리와 깊이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야는 흔들리고 방향 감각은 쉽게 무너진다. 두 눈으로 볼 때에야 우리는 공간을 제대로 인식하고 균형 잡힌 판단에 도달한다.

인간의 삶과 신앙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이성과 감성은 서로를 대신할 수 없는 두 개의 눈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 사회와 교회는 이 두 눈 가운데 하나를 거의 감아버린 상태에 놓여 있다.
감성은 과도하게 부풀려지고, 이성은 충분히 훈련되지 않는다.

대중문화와 베스트셀러, 청소년 문화 전반에서 감정적 호소와 즉각적인 공감이 숙고와 판단을 앞선다.

위로받았다는 느낌이 곧 진실이 되고, 감정의 고조가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된다.

그 결과 사회는 점점 생각보다 느낌이 먼저 반응하는 방향으로 기울어 간다.

이러한 감성 편향은 인간관계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이성이 배제되고 감정이 우선되는 만남과 관계는 개인을 점차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존재로 만든다.

관계의 기준이 성찰과 책임이 아니라 감정의 만족 여부가 되면서,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고 서기보다 타인의 반응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된다.

그 결과 관계는 성숙한 연대가 아니라 유아적 의존성으로 기울고, 과도한 눈치와 잦은 섭섭함 속에서 쉽게 상처받고 상처 주는 정서 구조가 자리 잡는다.

이렇게 감정만으로 유지되는 관계는 필연적으로 상처투성이의 삶과 사회를 낳는다.

이 현상은 문화의 영역에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오늘날 철학적 사고의 훈련 부족은 베스트셀러의 경향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질문을 던지는 책보다 즉각적인 위로를 제공하는 책이, 사유를 요구하는 문장보다 감정을 대변해 주는 문장이 선택된다.

이는 독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 구조의 문제다. 철학적 사유가 약화된 사회에서 독서는 더 이상 판단을 훈련하는 도구가 아니라 감정을 조절하는 수단으로 소비된다.
그 결과 모든 문화현상은 사고의 깊이를 넓히기보다 감정의 표면을 반복적으로 자극하는 역할에 머무르게 된다.

이성의 빈곤과 감성의 과잉은 정치의 공간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토론이 불가능한 사회라는 사실은 한국의 국회를 보면 분명해진다. 주장과 반론, 근거와 검증이 오가야 할 자리에서 감정적 언사와 진영 논리가 토론을 대신한다.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낙인찍고, 논증하기보다 감정을 자극하는 말이 앞선다. 이성적 숙의가 사라진 자리에 분노와 상처의 언어만 남을 때, 국회는 사회의 이성을 대표하는 공간이 아니라 감정의 충돌을 증폭시키는 유치찬란한 싸움의무대로 전락한다.

이는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 사고의 훈련이 부족한 사회 전체의 초상이다.

그러나 종교적 영성은 더 심각하다.

신흥 종교는 물론이고, 기성 종교 안에서도 “감성적 느낌이 좋을 때만 하느님이 가까이 계신다”고 여기는 태도가 확산되고 있다.

감성적 위로를 신앙의 핵심으로 오해하고, 감정의 고양을 하느님의 현존과 동일시한다. 위로가 느껴지지 않는 순간, 우리는 하느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의심한다.

메마른 감정 상태 자체를 신의 부재로 여기며, 오직 감성적 기도만이 하느님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은 본질적으로 가변적이다.

감성에만 의존한 신앙은 갈증을 물이 아닌 단 음료로 해소하려는 것과 같다. 마실수록 갈증은 깊어지고, 의존성은 강화된다.

이런 신앙은 늪에 빠진 외눈박이와 같다.
벗어나기 위해 움직일수록 더 깊이 빠져들 뿐, 방향을 회복하지 못한다. 감정은 신앙의 일부일 수는 있지만, 신앙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짚어야 한다.

이성적 사고의 토대는 철학이다. 철학은 단순한 학문 장르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 왜 그렇게 판단해야 하는지, 감정과 충동을 어떤 기준으로 걸러내야 하는지를 묻는 사고의 훈련이다.

철학이 빈곤해질수록 사회는 감정의 즉각성에 휘둘리고, 판단은 분위기와 여론에 종속된다.

이성이 훈련되지 않은 사회에서 감성은 방향을 잃은 채 과잉 증폭되고, 공동체는 쉽게 균열된다.
전통적인 신학은 이 지점에서 분명하다.

신앙은 이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을 통과해 마음으로 들어온다.

신앙은 이성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하느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성찰하고, 무엇이 신앙의 본질이며 무엇이 감정의 착각인지를 분별하는 힘이 바로 이성이다.

이성이 무너질 때 신앙은 미신이나 자기 위안으로 전락한다.

감성은 목적지를 제시하고, 이성은 그곳으로 가는 길을 찾는다.

감성만 있으면 열정은 넘치지만 길을 잃고, 이성만 있으면 정확하지만 생명력은 메마른다.

그래서 신앙과 삶 모두에는 두 눈이 필요하다.

머리는 차갑게, 그러나 가슴은 뜨겁게. 이 균형이 무너질 때 개인도 사회도 방향 감각을 상실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성을 억누르는 일이 아니다. 감성을 이성이 이끄는 질서 안에 다시 놓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이성의 훈련은 철학적 사유에서 시작된다.

꿈은 감성으로 꾸되, 판단은 이성으로 해야 한다.

신앙은 결국 두 눈으로 볼 때 가장 깊고 멀리 나아간다.

이것이 인간다운 삶의 조건이며,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성숙한 신앙의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