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소리의 육화ㅡ가수 김수철에

주혜1 2026. 2. 14. 01:04

소리의 육화(肉化)
— 어찌하여 음악가 김수철은 화가가 되었는가

김수철의 ‘소리그림’ 전시는 단순한 장르 확장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의 구조 자체를 다시 묻게 하는 미학적 사건이다.
오랜 인연으로 그에게 세례를 주었지만 그가 수십 년 동안 그림을 그려왔다는 사실을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철저히 숨겼다. 아마도
한국 현대 음악의 거장으로서
그 이름이 회화를 가릴까
염려 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충분히 무르익기 전에는 세상에 내놓지 않겠다는 고집이었을지 모른다.

전시장에 일찍 도착해 작품을 천천히 살폈다.

놀라웠다. 현대 추상회화의 다양한 기법과 조형 어법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정 놀라운 것은 기술적 숙련이 아니라, 이 전시가 지닌 본질적 특수성이었다.  

1.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다.
흐르고, 울리고, 사라진다.
존재는 진행 속에서만 성립한다.
미술은 공간의 예술이다.
정지하고, 머물고, 한눈에 드러난다.
존재는 배치 속에서 완성된다.
하나는 진동이고, 다른 하나는 형상이다.
하나는 비가시적 파동이고, 다른 하나는 가시적 구조다.
그러나 이 둘의 속성 사이에는 미세한 틈이 있다.
진동이 곡선을 만들고, 리듬이 반복을 낳으며, 강약이 명암으로 전환되는 지점.
김수철은 바로 그 틈을 눈여겨 보며 아무도 보지 못 하고 듣지 못한 경계를 통과한 작가다.
  

2.
그의 음악은 멜로디 중심이라기보다 리듬과 에너지, 원초적 타격감이 강하다. 그는 소리를 장식적 선율이 아니라 존재의 진동으로 다루어왔다.
진동은 귀에만 머물지 않는다.
몸을 울리고, 공간을 흔들며, 파동의 궤적을 만든다.
그는 이미 ‘보이는 소리’를 작곡해온 셈이다.
회화에서 그는 그 진동을 색채와 구조로 응축한다.
리듬은 반복되는 형상이 되고,
강약은 명암 대비가 되며,
클라이맥스는 화면의 중심 집중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번역이 아니다.
음악을 설명하는 시각화가 아니다.
소리의 육화다.
시간 속에 사라지던 음색이 색채로 남고,
리듬이 곡선으로 굳으며,
진동이 공간을 점유한다.
그의 그림은 소리를 묘사하지 않는다.
소리가 머무는 몸이 된다.  

3.
〈소리 푸른〉에서는 푸른 일획이 화면을 가르며 거대한 파동을 형성한다. 붓질은 물리적 힘을 드러내고, 색은 정적인 면이 아니라 진동하는 에너지로 기능한다.
〈수철소리〉에서는 인간의 감정과 무의식의 울림이 물감의 응집과 흐름 속에 구현된다. 자음과 모음이 해체되어 원초적 획이 되고, 그 획은 다시 파동으로 확장된다.
〈소리탄생〉에서는 반복되는 원형 구조가 우주적 공명을 만들어낸다. 원은 단순한 기하학이 아니라 리듬의 시각적 현현이다.
이 전시에서 소리는 더 이상 청각적 경험에 머물지 않는다.
눈으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감각의 전환이 일어난다.

4.
그의 작업은 하나의 스타일에 고정되지 않는다.
기하학적 질서, 격렬한 물질성, 문자적 구성, 순수한 파동 — 화면마다 조형 언어가 다르다.
이는 일관성의 부재가 아니다.
소리는 하나의 형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
폭포의 소리와 바람의 마찰음, 인간의 울음은 서로 다른 구조를 갖는다.
그는 형식을 고정하지 않는다.
울림에 따라 조형을 변주한다.
다성성(polyphony)이 그의 일관성이다.

왜 그는 화가가 되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직업 전환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음악을 떠나 회화를 택한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의 근원에서 출발했다.
ㅡ울림.
ㅡ떨림과 울림
ㅡ그리고 몸부림

그에게 음악은 이미 공간을 가진 구조였고,
회화는 그 구조의 시각적 현현이었다.
그는 장르를 넘은 것이 아니다.
감각의 경계를 확장한 것이다.

5.
김수철의 전시는 음악과 미술의 경계를 허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속성의 틈새에서 새로운 경지를 연다.
소리가 육화되어
그림이 울리는 자리.
그곳에서 예술은 더 이상 시간과 공간으로 나뉘지 않는다.
울림은 귀에도, 눈에도 동시에 존재한다.
전시장을 나서며 나는 확신했다.
그의 그림은 음악의 외도가 아니다.
또 하나의 본령이다.
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다른 몸을 입을 뿐이다.

소리의 육화(肉化)

‘소리의 육화’란 무엇인가.
보이지 않고 붙잡을 수 없는 진동이
색채와 형상, 물질과 공간을 입어
눈앞에 현존하게 되는 사건이다.

소리는 본래 시간의 예술이다.
울리는 순간 존재하고,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그러나 육화는 그 사라짐을 거부한다.
진동을 응축하여 공간 속에 머물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번역’이 아니라 ‘현현(顯現)’이다.
음악을 설명하는 그림이 아니라,
소리 자체가 다른 몸을 입고 다시 태어나는 일.
리듬은 반복되는 형상이 되고,
강약은 명암의 대비가 되며,
음색은 색채의 밀도로 변환된다.
클라이맥스는 화면의 집중으로 응결된다.
이때 그림은 침묵하지 않는다.
정지해 있으나 진동한다.
보는 행위는 동시에 듣는 행위가 된다.
‘육화’라는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형태 없는 것이 형태를 얻는 존재론적 전환이다.
시간이 공간이 되고,
파동이 물질이 되며,
비가시적인 것이 가시적인 것으로 몸을 얻는다.
소리의 육화는 장르의 융합을 넘어선다.
그것은 감각의 재배치이며,
예술의 근원을 다시 묻는 사건이다.

*소리는 사라진다*고믿는다
그러나 그는
*소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 존재론을 결코 포기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체험의 현현을 그는 그 생애에서
결코 포기 할 수 없었기에 그는
그 소리를 그림으로 그리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가 *소리의 육화(The Incarnation of Sound)다.
소리의 현현
소리그림이다
              ㅡ 조광호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