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윽한 어둠에 대하여
― 재의 수요일,머리에 재를 얹으며
1.
재의 수요일, 우리는 머리에 재를 얹습니다.
전례는 짧고, 말은 간결합니다.
“너는 흙이다.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
이 문장은 인간을 낮추기 위한 경고가 아니라, 높아진 우리의 시선을 낮추는 은총입니다. 빛의 과잉 속에서 잃어버린 깊이를 되찾게 하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눈부심에 익숙해진 시대를 삽니다. 밝음은 성공의 상징이 되었고, 드러남은 존재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설명되어야 하고, 투명해야 하며, 측정 가능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 과도한 밝음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더 적게 봅니다.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빛이 극에 달하면 시야는 지워집니다.
태양의 눈부심은 오히려 어둠으로 경험됩니다. 이 물리적 사실은 존재의 깊은 구조를 비추는 상징이 됩니다. 과도한 밝음은 분별을 돕는 대신 마비시키고, 지나친 확신은 사유를 열어 두기보다 닫아 버립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순의 시작을 눈부신 조명으로 열지 않습니다.
잿빛으로 시작합니다. 번쩍임이 아니라, 불을 통과한 자리의 고요로 시작합니다.
2.
어둠은 혼돈일 수 있습니다. 길을 잃은 시간, 질서가 무너진 자리, 의미가 보이지 않는 밤. 상실과 고독의 순간은 분명히 어둠처럼 다가옵니다.
인간은 그 어둠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모든 어둠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질서가 붕괴된 어둠이 있다면, 질서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어둠도 있습니다.
전자는 붕괴의 경계이지만, 후자는 생성의 문턱입니다.
혼돈을 통과한 뒤에 만나는 그윽한 어둠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잉태의 자리입니다. 빛이 떠오르기 직전의 심연이며, 말이 태어나기 전의 침묵입니다.
철학은 오래전부터 모든 드러남은 숨음을 전제한다고
이 사실을 말해 왔습니다.
우리가 이해했다고 말할 때에도, 이해되지 않은 더 넓은 배경이 존재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완전히 드러난 존재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규정된 개념입니다. 존재가 살아 있으려면 일정한 숨음이 필요합니다.
그 숨음이 깊이를 지킵니다. 그윽한 어둠은 바로 그 숨음의 자리입니다.
빛이 현상이라면, 어둠은 구조입니다. 빛이 드러냄이라면, 어둠은 가능성의 장(場)입니다.
신비신학은 이 역설을 더욱 급진적으로 표현합니다. 디오니시우스는 하느님을 “눈부신 암흑”이라 불렀습니다.
하느님은 빛이시되, 우리의 인식을 초월하는 빛이십니다. 그 빛은 오히려 암흑처럼 다가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한 “어두운 밤”은 신의 부재가 아니라, 우리가 붙잡고 있던 신의 이미지를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감각과 개념이 무력해질 때, 신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서 근원으로 이동합니다. 설명되는 존재에서,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으로. 눈부심이 사라질 때, 깊이는 드러납니다.
3.
문학은 이 신비를 체험의 언어로 증언합니다. 릴케는 “나는 나를 낳아준 어둠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밤은 소멸의 시간이 아니라 성숙의 시간입니다. 낮은 세계를 분명하게 하지만, 밤은 영혼을 깊게 합니다. 별은 낮에도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밤이 되어야 비로소 그 광대함이 드러납니다. 어둠은 세계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더 깊은 층위를 열어 보입니다. 릴케의 어둠은 혼돈이 아니라, 존재를 낳는 자궁과 같은 심연입니다.
동양의 사유 역시 같은 길을 말합니다. 노자는 “知其白 守其黑(밝음을 알되 어둠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는 밝음을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라, 밝음만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도(道)는 번쩍임이 아니라 흐름이며, 극단이 아니라 균형입니다. 지나친 밝음은 자아를 팽창시키지만, 그윽한 어둠은 자아를 비워 줍니다. 이때 떠오르는 말이 회광반조(回光返照)입니다. 빛을 돌이켜 자신을 비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늘 밖을 향해 빛을 비춥니다. 세상을 분석하고, 타인을 판단하고,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재의 수요일의 잿빛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 빛을 거두어 안으로 돌리라고. 밖으로 향하던 빛이 안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설명되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하는 존재가 됩니다.
4.
과학 또한 이 통찰을 비추어 줍니다. 태양의 강렬한 빛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할 수 있습니다. 우주의 대부분은 직접 보이지 않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빛나는 은하와 별은 전체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생명의 시작 역시 어둠에서 이루어집니다. 자궁은 어둡고, 씨앗은 흙 속에서 발아합니다. 밤은 인간의 생체 리듬을 회복시킵니다. 빛은 활동을 가능하게 하지만, 형성은 어둠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태어남은 언제나 어둠을 통과합니다.
재의 수요일의 잿빛은 바로 이 모든 통찰을 하나로 묶는 표지입니다. 잿빛은 패배의 색이 아니라, 불을 통과한 존재의 흔적입니다. 우리는 흙입니다. 그러나 그 흙은 생명을 잉태한 흙입니다. 우리는 먼지입니다. 그러나 그 먼지는 신의 숨결이 스친 먼지입니다. 잿빛은 눈부심을 거두고, 심연으로 내려가는 용기의 색입니다.
너무 눈부신 빛은 우리를 흩어지게 합니다. 그윽한 어둠은 우리를 모이게 합니다. 빛은 어둠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어둠의 깊이에서 태어납니다. 머리에 재를 얹으며 우리는 이 역설을 배웁니다. 눈부심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보게 됩니다. 설명을 멈출 때, 우리는 비로소 머무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머묾 속에서, 빛은 다시 태어납니다.
그윽한 어둠은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빛이 태어나기 전의 심연이며,
존재가 깊어지는 자리입니다.
5. 마침 — 재 위에 피어나는 빛
머리에 재를 얹는 순간, 우리는 패배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무너진 자가 아니라, 벗겨진 자입니다.
눈부심이 걷히고, 과잉의 언어가 멈추고,설명과 증명의 욕망이 잠잠해질 때 비로소 존재는 자기 자리로 돌아옵니다.
재는 불의 흔적입니다.
타오름이 지나간 자리,
욕망이 한 번 불타고 난 뒤 남은 고요입니다.
그 재를 이마에 얹는다는 것은
자신의 허위를 인정하는 용기이며,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겸허이며,
자신이 흙임을 기억하는 지혜입니다.
그러나 흙은 단지 사라짐의 상징이 아닙니다.
흙은 씨앗을 품는 자리입니다.
어둠은 단지 빛의 부재가 아닙니다.
어둠은 빛의 태반입니다.
그윽한 어둠은
우리를 해체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깊게 합니다.
눈부심 속에서는 우리는 흩어집니다.
평판, 성취, 이미지, 확신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분산시킵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는
우리는 모입니다.
하나로 응집됩니다.
본질로 돌아갑니다.
재의 수요일은 슬픔의 날이 아니라
본질의 날입니다.
“너는 흙이다.”
이 선언은 모욕이 아니라 해방입니다.
더 높아지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
더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은총,
더 눈부시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
우리는 빛이 되기 전에
먼저 어둠을 통과해야 합니다.
부활은 언제나 무덤을 지나옵니다.
새벽은 밤의 심연을 건너옵니다.
그러므로 그윽한 어둠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곳에서 우리의 거짓은 사라지고,
우리의 과장은 식고,
우리의 교만은 재가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은
눈부심이 아니라
깊이로 다가오십니다.
그윽한 어둠은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작의 자궁입니다.
재 위에,
보이지 않게,
그러나 분명히,
빛은 이미 잉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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